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38화 (13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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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34. 잔인한 화산파 (3)

    “은인이시여…….”

    “은인이시여!”

    “마을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지긋하게 나이 든 노인의 선창에 따라 나머지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원통함과 울분이 가득했다.

    언뜻 보아도 2~3천 명 정도가 살 만한 크기의 마을이었다. 하지만 정천우의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들의 숫자는 고작해야 100명이 될까 말까 했다.

    정천우는 맨 앞에 무릎을 꿇은 노인을 부축해 일으켰다.

    “노인장께서 촌장이십니까?”

    “저는 드간이라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촌장을 맡았습니다. 저는 영주님이 우리에게 이럴 줄은…… 으응?”

    드간은 정천우에게 대답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요란하게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부하들입니다.”

    정천우는 드간을 안심시켰다. 그러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선두에서 말을 달려오는 것은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이었다. 굳이 부르지 않았지만 자신이 이곳에 있으니 달려온 모양이었다. 괜스레 마음이 뿌듯해지는 정천우였다.

    “어헉! 저, 저들은!”

    드간은 샤벨타이거 기사단의 모습에 안도했다가 이내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미파의 기사들을 발견하고서 보인 반응이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마을에 들어와 잔인한 살육을 벌이던 기사들의 복장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똑같다기보다는 갑옷의 형태가 비슷하고 색상마저 비슷했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충격을 받은 드간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자 정천우가 드간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안심하십시오. 저들은 진짜 아미파의 기사들입니다.”

    “아…….”

    드간은 부드러운 정천우의 말에 하마터면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긴장이 풀렸다가 다시 긴장하기를 반복하느라 그의 심력이 바닥난 까닭이었다.

    그것은 다른 영지민도 마찬가지였다. 끔찍한 학살을 당한 기억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자신을 공격한 기사들의 정체가 화산파의 기사였다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그렇지만 잔인한 살육의 기억이 남아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한 것이다.

    “그래, 우린 우리의 영주한테 당한 거였어.”

    “다른 영지의 기사들을 반기게 될 줄이야…… 크흑!”

    “제길! 차라리 이번 영지전에서 콱 뒈져 버렸으면 좋겠어!”

    “망할 영주놈!”

    영지민은 저마다 욕을 하면서 울분을 쏟아 냈다.

    믿고 따르던 자신들의 영주가 이처럼 악랄한 짓을 했다는 게 그들에겐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던 것이다.

    ***

    아미파는 구축하던 진지를 철수하고 마을 옆에 새롭게 진지를 구축했다.

    마을 사람의 시체를 치우고 전부 불에 태웠다.

    화산파의 기사들이 마을을 없애려다가 정천우의 손에 죽임을 당한 터라 마을에는 온전한 건물이 많았다. 덕분에 기사들과 병사들은 오랜만에 편안한 침대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살아남은 영지민들은 마을 사람들의 시체가 불에 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마을이 정리되어 가는 사이, 아미파의 수뇌부는 촌장인 드간을 불러 정황을 들었다.

    여관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임시 사령부로 사용했다. 그동안 지나쳐 온 마을과는 다르게 먹을 것들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지휘부 사람들이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게 된 건 덤이었다.

    “영주의 명령으로 사람들이 차출되어 끌려갔습니다. 그것은 인근의 다른 마을에도 같은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병력을 차출하려 했던 모양이군요.”

    촌장인 드간의 얘기에 주소용 후작은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대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물론 마을에 생긴 일은 안타까웠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성인 남성들을 징집해 병력을 늘리는 거야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라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신도 아미파가 다른 영지의 침략을 받는다면 당연히 그렇게 할 테니까 말이다.

    “아닙니다. 노인과 여자들을 차출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

    촌장인 드간의 얘기를 들으면서 스테이크를 썰던 주소용 후작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고는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게 언제 일어난 일입니까?”

    “일주일 정도 되었습니다. 영지병이 인솔해서 데리고 갔습니다.”

    “흐음…… 맹주님, 혹시…….”

    주소용 후작은 굳은 얼굴로 정천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생각하는 게 맞는 것인지를 묻는 듯한 행동이었다.

    “아마도 주소용 후작께서 생각하고 계신 게 맞을 겁니다. 드간 씨, 남자들의 징집은 없었습니까?”

    정천우는 우울한 얼굴의 촌장에게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물었다.

    단편적인 정보라도 모아 놓으면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다. 특히 드간과 같이 촌장 일을 하던 사람들의 정보는 신뢰성이 좋다. 대략적인 영지의 인구를 알 수 있고, 병력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식사하던 수뇌부 사람들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드간의 말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이삼십 대의 젊은 남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징집되었습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마을에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사오십 대의 남자밖에 없었습니다. 그마저도 이번…… 크흑…….”

    드간은 말을 하면서 감정에 북받치는지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버려진 거군요.”

    정천우가 씁쓸한 듯 입맛을 다시면서 중얼거렸다.

    그 뒤로 이어진 드간의 얘기는 우울하고도 괴로운 내용들뿐이었다.

    영지전이 선포되기가 무섭게 강제로 식량을 빼앗아 가고 사람들을 마구 데려갔다는 거였다. 그렇게 끌려간 사람들이 아마도 화산파 초입에서 마주쳤던 영지민일 게 분명했다.

    주소용 후작을 비롯한 수뇌부 사람들은 치를 떨었다. 화산파의 영주인 임철중 백작이 냉혈인간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잔인한 인물일 줄은 몰랐다.

    수뇌부 사람들은 드간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분노가 끓어올라, 음식을 먹을 수도 없을 만큼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잘됐어. 이제는 좀 달라지겠지.’

    정천우는 속으로 안도했다.

    드간의 얘기에 분노하는 수뇌부 사람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진군하는 내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던 사람들이었다. 힘없는 영지민을 무참하게 학살했다는 죄책감이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게 모두 다 화산파의 영주인 임철중 백작의 간악하고도 잔인한 전술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은 순간, 수뇌부 사람들의 얼굴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들처럼 변해 있었다. 그리고 순수한 분노를 마구 터트렸다.

    드디어 전쟁을 수행할 준비가 갖추어진 것이다.

    ‘이제 싸워 볼 만하겠어.’

    주소용 후작의 붉어진 얼굴을 쳐다본 정천우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다음 날.

    아미파의 병사들은 오랜만에 활기에 차 있었다.

    무고한 영지민을 학살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자 아미파 병사들은 어느새 전사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수뇌부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서서 화산파가 벌인 잔인한 행위를 떠벌이자 마음의 짐을 벗어던진 까닭이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화산파 영지의 마을로 퍼진 아미파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자발적으로 나서서 해명해 주겠다고 드간이 말했다는 점이다.

    벌써 격문을 작성하고 마을 사람들을 시켜 다른 마을의 촌장에게 보낸 상태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아미파가 말을 지원해 주었다.

    아미파의 군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화산파의 영지성을 향해 출발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대열이 갖춰지자 정천우를 비롯한 샤벨타이거 기사단이 주소용 후작의 곁으로 다가와 합류했다. 화산파 초입에서 벌어진 사건 이후로 오랜만에 합류한 것이다.

    “주소용 후작님, 이제야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셨군요. 보기 좋습니다.”

    정천우가 이제껏 보여 주었던 냉랭한 모습은 거짓이었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잠시 눈빛이 흔들렸던 주소용 후작은 몸가짐을 바로 하고서 자신의 가슴에 오른손을 대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존경한다는 의미를 담은 군례(軍禮)다.

    “제가 멍청했어요.”

    그녀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만약 그때 정천우의 말을 따랐다면 2만 명에 이르는 영지민을 모조리 죽여야만 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잔인하다는 생각에 모질게 마음을 먹지 못했다.

    때로는 독하게 행동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우쳤다. 그래서 더 정천우가 존경스러웠다.

    단순히 정진석 공작과 싸울 카드로 삼았을 뿐이었는데…….

    주소용 후작의 눈빛을 받은 정천우가 멋쩍은 듯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주소용 후작께서는 멍청하지 않습니다. 다만 마음이 약했을 뿐입니다. 전장에서는 그게 약점이 될 수 있겠지만, 영주로서는 최고죠.”

    “그런 걸까요?”

    “낯간지러우니까 그만 출발하죠?”

    “알겠어요.”

    주소용 후작이 환하게 웃으면서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출발!”

    화산파 공략을 위해 잡병에서 정예병으로 거듭난 아미파 군대에 그녀의 낭랑한 음성이 출발을 명령했다.

    ***

    아미파의 진군은 평온하게 이루어졌다.

    잔인하고 가증스러운 화산파를 치겠다는 일념으로 아미파 군대의 사기가 높았다. 행군으로 인해 지쳐 있음이 분명함에도 병사들의 얼굴엔 반드시 이번 전쟁에 승리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뿌우우우!

    “무슨 일이지?”

    주소용 후작은 멀리서 들려오는 뿔나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척후대에서 보내는 신호였다. 위험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었기에 그녀의 호기심을 자아낸 것이다.

    잠시 후, 멀리서 한 필의 말이 흙먼지로 이루어진 꼬리를 단 채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 게 눈에 띄었다.

    아미파가 진군하는 중이었기에 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마침내 척후대의 병사가 달려와 군례를 올리고는 말 머리를 주소용 후작과 나란히 했다.

    “보고하세요.”

    “하북팽가의 군대가 오고 있습니다.”

    “하북팽가가요?”

    주소용 후작은 놀란 눈으로 척후병에게 고개를 돌렸다. 원래라면 이틀 후, 화산파의 영지성을 양쪽에서 동시에 공략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부탁했습니다. 팽선웅 백작님에게 아미파와 합류해서 일거에 몰아치자고 제안했습니다.”

    “맹주께서요?”

    주소용 후작은 대체 왜 일을 그렇게 처리했느냐는 듯이 정천우를 쳐다보았다.

    “어제까지의 아미파는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군요.”

    주소용 후작은 순순히 인정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미파는 무기력한 군대였다. 싸울 의지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의 작전대로 하북팽가와 양동작전을 벌여 봐야 하북팽가가 단독으로 공격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게 뻔하다.

    “하북팽가에게 적당한 지점에서 야영을 준비해 달라고 전달해 주세요.”

    “예, 영주님!”

    척후병이 군례를 올리기 무섭게 말의 배를 걷어찼다. 그녀의 명령을 최대한 빨리 전하기 위해서다.

    멀어져 가는 척후병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천우가 입을 열었다.

    “이번 전쟁, 아미파가 승리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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