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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136화 (13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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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34. 잔인한 화산파 (1)

    마을 근처에 진지를 구축할 수 없었던 아미파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깔았다.

    아미파 병사들의 사기는 이제 바닥을 기는 중이었다. 전투다운 전투를 해 보지도 못하고 가는 마을마다 시체만 그득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화산파의 분노한 영지민들이 시시때때로 야습을 감행해 오니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화산파의 영지민들은 변변한 무장도 갖추지 못했으니 야습이라고 해 봐야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아미파 병사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병사들은 의욕을 잃고 수동적으로 행동했다. 아미파 지휘관들이 나서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병사들의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다.

    느그적거리면서 야영을 준비하는 아미파 병사들을 바라보는 정천우의 시선은 냉랭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그의 곁에 선 헤이먼 역시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했다.

    날카롭게 벼려져 있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좀비처럼 행동하는 아미파의 병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북팽가의 병사들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증거로 샤벨타이거 기사단은 정신적인 충격에서 빠르게 회복되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다. 정천우의 박력과 정신교육에 기인한 바가 크다.

    군대라는 조직은 단순해야 한다.

    진격과 후퇴.

    공격과 수비.

    단순하기 짝이 없는 명령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부대를 운용할 수 있다. 말단 병사들이 ‘생각’이라는 걸 하기 시작하면 그 부대는 오합지졸이 되고 만다.

    정천우가 경계하는 것이 바로 그거다. 지금의 아미파 병사들은 전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아미파의 병사들은 쓸데없이 잡생각이 너무 많아. 이런 상태로 싸워 봐야 영지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자멸할지도 모르겠다. 뭔가 자극이 필요해.”

    “좋은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하북팽가와 합류해야지. 그리고 굴린다. 잡생각이 쏙 빠지도록.”

    “네? 적을 코앞에 두고 훈련을 시킨다는 말씀이십니까?”

    헤이먼은 정천우의 황당한 생각에 혀를 내둘렀다. 싸움에 임박한 상황에서 훈련한다는 그의 발상이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천우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아미파의 군대가 하북팽가보다 개개인의 실력은 좋을지 모르겠지만, 정신 상태가 글러 먹었어. 저런 녀석들과 함께 싸우느니 하북팽가 혼자서 화산파를 공략하는 편이 훨씬 더 유리할 거야.”

    “흐음…….”

    헤이먼은 정천우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역시 아미파의 군대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제인 마법사 좀 불러다 줘.”

    “알겠습니다, 단장님.”

    헤이먼은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몸을 돌렸다. 그러나 필요 없는 행동이었다.

    정천우에게 집중하고 있던 제인은 그의 눈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깨닫고는 먼저 걸어오고 있었다.

    “맹주님, 절 찾으신 거 맞죠?”

    “우리끼리 있을 땐 맹주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고 했잖아요.”

    “알았어요. 천우 경, 무슨 일이세요?”

    “팽선웅 백작님과 대화가 필요해서 부탁 좀 드리려고요.”

    “잠시만요.”

    제인은 품속에서 수정구를 꺼내고는 마나를 집중했다. 수정구에서 희미하게 빛이 흘러나오면서 음성이 들려왔다.

    [하북팽가의 그라디안이오. 소속을 밝히시오.]

    수정구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로 하북팽가 영지의 직속 마법사인 그라디안이었다.

    제인이 정체를 밝히지 않았기에 영상을 차단하고 목소리로만 대화하는 것이다.

    “제인입니다. 천우 경께서 영주님과 대화를 원합니다.”

    [아! 제인 마법사! 오랜만입니다.]

    제인의 정체를 들은 그라디안이 그제야 영상을 전송했다.

    “영주님과 대화할 수 있어요?”

    [옆에 계십니다. 그럼…….]

    그라디안이 옆으로 물러나고 팽선웅 백작이 수정구에 나타났다.

    팽선웅 백작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직 화산파의 더러운 술수에 말려들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주님, 저 정천우입니다.”

    [맹주님! 하하하! 이거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인, 반갑구나.]

    팽선웅 백작은 정천우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크게 웃었다. 제인과 함께 나란히 있는 모습이 보기 좋은 모양이었다.

    “후우…… 맹주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하북팽가는 화산파의 공격이 없었습니까?”

    [공격이랄 것도 없습니다. 떨거지들이 달라붙는 바람에 귀찮은 정도입니다. 화산파 놈들이 영지민을 방패로 사용하려고 작정한 듯합니다.]

    “병사들의 사기는 어떻습니까.”

    [지루해하는 정도입니다. 빨리 영지성을 공격해야지, 귀찮아서 말입니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들이 설쳐 대니…….]

    팽선웅 백작은 짜증스럽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확실히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그것은 하북팽가의 정서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하북팽가는 영지민을 전투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영지민이든 뭐든 무기를 들었으면 한 명의 전사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미파의 주소용 후작과 달리 팽선웅 백작은 그저 귀찮아하는 정도의 반응이었다.

    살아온 환경의 차이가 이렇듯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아미파가 하북팽가보다 전력상 우위로 평가받고 있지만 당장 처한 현실만 놓고 보자면 하북팽가가 몇 수 위다.

    “영주님, 양동 작전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전력을 합쳐서 적을 공격하는 게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응? 무슨 문제가 생긴 겁니까?]

    “아미파 사람들이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화산파의 영지민들이…….”

    정천우는 팽선웅 백작에게 아미파의 상태를 얘기하면서 전력을 합칠 것을 주장했다.

    팽선웅 백작은 상황을 이해하고는 그러겠다고 흔쾌히 승낙했다. 위험부담을 안고 싸우느니 안전하게 싸우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있으나 마나 한 아군은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대략적인 얘기를 끝내고 난 팽선웅 백작은 수정구 속에서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제인, 잘돼 가니?]

    “모, 몰라욧!”

    제인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팽선웅 백작에게 톡 쏘아붙이고는 통신을 끊었다.

    그가 말하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에 부끄러웠다. 당사자인 정천우가 옆에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짓궂게 말하는 팽선웅 백작 때문에 당황한 것이다.

    제인이 당황해하거나 말거나, 정천우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이제야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활로가 생겼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밥만 축내는 아미파 병사들은 같이 싸울 ‘동료’로서는 전혀 의미가 없는 전력이었으니까 말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안전하게……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귀찮은 아미파 떨거지들을 원래의 자리로 돌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고민하는 그의 눈에 제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온다.

    처음 동대륙에 넘어와 얼떨떨한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준 여인이다. 알게 모르게 자신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도 하는…….

    정천우는 제인의 어깨에 두툼한 손바닥을 가볍게 얹었다.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안다. 계속 일이 꼬이는 바람에 둘만의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는 게 아쉬웠다.

    “제인 마법사님, 이번 전쟁이 끝나거든…….”

    정천우가 막 분위기를 잡으면서 제인에게 말을 걸 때였다. 한 떼의 인마가 거칠게 달려와 진영 내부를 휘젓고 지나갔다.

    주변을 살피기 위해서 출동했던 아미파의 정찰대였다.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 전원 기사로 구성했었다.

    한껏 분위기를 잡아 가던 정천우의 시선이 정찰대를 향했다. 뒷말을 기대했던 제인은 급하게 말을 몰아 달리는 정찰대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제인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정찰대원들의 모습이 엉망인 까닭이었다.

    한쪽 팔을 잃은 기사도 있었고, 머리를 잃은 기사도 있었다. 말이 본능적으로 뒤를 따라 달리는 바람에 주인이 죽었는지 어쨌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무, 무슨 일일까요?”

    “좋은 일은 아닐 겁니다. 제가 가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천우는 제인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내려놓고는 경공을 발휘해 주소용 후작에게로 달려갔다.

    벌써 주소용 후작이 정찰대의 기사에게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살아 돌아온 기사는 겨우 2명뿐이었다. 정찰대로 차출한 기사가 20명이나 되었는데 말이다.

    정천우의 경공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진 덕분에 이제 막 보고가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북서쪽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에서 대규모 학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찰대가 마을을 구원하러 달려갔지만, 저희 실력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크흑…….”

    보고하던 기사는 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적의 추격에 동료를 잃은 게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매, 맹주! 위험해요.”

    정천우가 보고 사항을 지켜보는 사람을 뚫고 앞으로 나서자 주소용 후작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추격대 파견을 놓고서 대립한 이후로 근처에도 다가오지 않던 정천우가 제 발로 다가오자 의외였다. 하지만 그의 말이 더 의외였다. 혼자서 가겠다는 말이었으니까.

    “많은 수를 이끌고 간다면 놈들은 도망칠 겁니다. 적의 숫자는?”

    정천우는 주소용 후작의 얘기를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정찰대 기사를 향해 물었다.

    “대, 대략 50명가량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덤볐다? 그렇게 실력에 자신이 있었나? 정찰대는 정찰이 목적이다. 싸우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걸 모르나?”

    정천우가 한심하다는 듯이 한마디 툭 내던졌다. 그러자 보고하던 정찰대 기사가 고개를 떨궜다.

    그의 말대로다. 정찰대라면 싸울 것이 아니라 본대로 달려와 보고를 먼저 해야만 했다. 그러나 화산파의 악의적인 학살에 울분이 쌓였던 정찰대는 숫자가 부족함을 알면서도 전투를 택했다.

    정천우에게 질책을 듣고 나니 그제야 자신의 실수가 생각나 후회가 밀려왔다.

    “50명이라. 딱 좋아.”

    정천우는 짧게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경공을 발휘했다. 어찌나 빠른지 정천우가 서 있던 자리가 원래부터 빈자리였던 것만 같은 착각이 일어날 정도였다.

    경공을 발휘해 달려간 정천우는 자신의 전투마에 올라탔다.

    “헤이먼! 샤칼! 따라와!”

    “예, 주인님!”

    “예, 단장님!”

    샤칼과 헤이먼은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말 위에 몸을 실었다.

    정찰대의 처참한 모습에서 이미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굳이 묻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말에 올라탄 세 사람은 그야말로 바람처럼 아미파 진영을 빠져나왔다.

    “어디 가는 겁니까!”

    아미파 진영을 빠져나온 샤칼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북서쪽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적이 있다.”

    “우리만으로 충분합니까?”

    “충분하다.”

    “몇이나 된다고 합니까?”

    “기사 50명?”

    정천우는 말을 달리면서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자 샤칼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주인님, 미친 건…….”

    “죽을래?”

    “주인님을 믿습니다.”

    정천우가 눈을 부라리기가 무섭게 샤칼이 꼬리를 말았다.

    자신이 있으니까 달랑 셋이 가는 거라고 마음 편하게 먹었다. 그게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2킬로미터의 거리는 금방이었다. 하기야 평범한 인간의 뜀박질로도 4~5분이면 도착할 거리였으니, 말을 타고 달리는 그들에겐 더욱 가까운 거리였다.

    정찰대 기사가 말한 2킬로미터보다는 좀 더 멀었지만 위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비명과 마을이 불타오르는 모습만으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말에 탄 기사들이 마구 학살을 벌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이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아미파의 기사와 싸우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는지, 아직도 마을을 공격하고 있었다.

    “멈춰라!”

    정천우가 내공을 담아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대답은 다른 방식으로 돌아왔다.

    슈슈슉!

    살기를 머금은 쿼렐이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면서 정천우를 향해 쏟아졌다. 정천우는 손에 쥔 창을 풍차처럼 휘두르면서 날아오는 쿼렐을 모조리 퉁겨 냈다.

    상대가 쿼렐 공격에도 무사한 것을 확인한 적 기사들은 의외라는 듯 일제히 말 머리를 돌렸다.

    “겨우 셋?”

    전신에 피 칠갑을 한 기사가 천천히 앞으로 말을 몰아 나오면서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셋도 많아!”

    정천우는 역천검이 장착된 창을 들면서 눈썹을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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