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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135화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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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33. 괴로운 진격(進擊) (5)

    헤이먼이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주소용 후작이 척후대를 운용한 이유는 숲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숲에 난 길을 찾거나 길을 만들기 위해서 척후대를 보낸 것이다.

    그런데 척후대가 꼬물거리면서 숲에 다다른 순간, 말과 함께 우르르 쓰러졌다. 누군가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헤이먼은 놀란 얼굴로 정천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알고 계셨습니까?”

    “물론!”

    “그런데 어째서…….”

    “날 못마땅하게 생각한 건 저쪽이야. 굳이 알려 줄 의무 따윈 없지 않겠어? 경고를 무시한 대가는 저 사람들의 몫이야.”

    정천우는 피식 웃으면서 말하고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원래라면 주소용 후작에게 다가가 이것저것 얘기할 텐데 이번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주소용 후작에게 알아서 처리하라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척후대는 죽어 나가고 있었다. 탈출에 성공한 대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척후대가 다 쓰러지기 무섭게 숲 속에서 꼬물거리면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의 복장은 아까 샤벨타이거 기사단에게 쫓겨 가던 화산파 영지민들의 복장이었다.

    “저들은…….”

    주소용 후작은 눈에 마나를 돋우어 살피다가 이내 안색이 굳어졌다.

    그녀의 눈을 자연스럽게 정천우에게 향했다. 하지만 정천우는 담담한 얼굴로 그녀의 눈빛을 받아넘길 뿐이었다.

    ‘내가…… 멍청한 거라는 뜻이겠지?’

    주소용 후작은 아무런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정천우의 눈빛을 확인하고는 아랫입술을 윗니로 깨물었다.

    혼비백산하면서 도망쳤던 화산파의 영지민들이 매복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째서 정천우가 추격대를 조직해 영지민들을 흩어 놓아야 한다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되었다.

    “……하지만 늦은 거겠지.”

    “네? 영주님, 방금 뭐라고 명령하신 겁니까?”

    주민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주소용 후작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누가 들으라고 한 말도 아니었기에 그녀가 못 알아듣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주소용 후작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부단장의 말에 일일이 반응해 줄 때가 아니었다.

    선택의 기로에 섰다.

    부들부들 떨던 화산파의 영지민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그저 적일 뿐이다. 죽이지 못한다면 오히려 당할 수 있다.

    허망하게 죽은 척후대처럼 말이다.

    “부단장! 전투를 준비하라! 에쉴을 불러 마법 전력을 배치하고, 맹주님께 샤칼 대마법사님과 제인 마법사님을 지원받아라. 한꺼번에 몰아친다.”

    “옛! 알겠습니다, 영주님!”

    주민하가 절도 있게 군례를 올리고는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자신의 주인인 영주가 전투를 결심했으니 따르는 것이 도리다. 화산파를 평정하기 위해서는 앞을 가로막는 모든 걸 뚫고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정천우는 멀리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멀뚱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주민하를 발견하곤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래도 아주 꽉 막힌 사람은 아닌 모양이야.”

    정천우가 피식 웃었다.

    뭘 원하는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아미파의 진영에서 마법사를 태운 마차가 앞으로 나서는 걸 보고서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샤칼! 제인 마법사님!”

    “네, 주인님!”

    “네, 맹주님.”

    “도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최대한 강한 걸로 마법을 사용하세요. 무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저들이 자초한 일이니까요.”

    정천우는 주민하가 오기도 전에 샤칼과 제인을 불러 당부했다.

    마침내 주민하가 도착했을 때, 정천우는 손짓으로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러자 샤칼과 제인이 주민하의 곁으로 말을 타고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맹주님.”

    “별말씀을.”

    정천우가 나름 부드럽게 미소 지었지만 주민하는 어쩐지 그의 미소가 차갑게 느껴졌다.

    숲까지는 대략 2킬로미터의 거리.

    주소용이 마법사들을 앞세워 진군을 시작했다. 정천우는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지켜보면서 묵묵히 뒤를 따랐다. 이제껏 그녀를 도와 조언을 해 주던 모습과는 무척이나 대조적인 행동이었다.

    이윽고 숲의 초입에 도착한 아미파의 군대는 본격적인 공격을 준비했다. 방패병을 앞세우고, 궁병대는 크로스보우를 장전했다.

    기사들은 오히려 아무런 할 일이 없었다. 숲에 말을 끌고 가는 건 무리가 있었으니까.

    “ЭДЁФБЙбДЁ…… 파이어 레인!”

    “ЭДЁФБЙ…… 파이어 버스터!”

    “ЦфЖЙП…… 라이트닝 볼트!”

    갖가지 마법들이 화려한 빛을 뿜어내면서 숲을 덮쳤다.

    마법사들이 펼치는 마법은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뒤따르는 건 엄청난 굉음과 인간의 비명.

    마나가 다할 때까지 마법을 퍼부어 달라는 주소용 후작의 당부가 있었다. 마법사들은 마나홀이 뻐근해질 때까지 마법을 난사했다.

    4서클 수준의 마법사로 이루어진 에쉴 마법병대의 마법사들이 먼저 마나가 소진되었다. 그다음으로 제인이 세 번의 마법을 더 펼치고서야 뒤로 물러났고, 샤칼은 7서클의 대마법사답게 6서클의 마법을 두 번이나 더 사용하고 나서야 물러났다.

    숲의 초입 부근은 엉망으로 변했다. 위력적인 마법이 땅거죽을 헤집어 놓는 바람에 숲을 이루던 나무들이 흉물스럽게 쓰러졌다. 화염 마법에 직격한 나무들은 불이 붙은 채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공격하라! 간악한 아미파 놈들을 무찌르자!”

    마법의 위력에 질렸을 법도 한데, 숲 안에서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숲에서 튀어나오는 영지민들의 손에는 제대로 된 무기가 들려 있었다. 병사들이 사용하는 롱스피어였다. 애초에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궁병대 발사!”

    주소용 후작의 얼굴에 분노가 드러났다.

    자신이 속은 것이다. 저들은 애초부터 싸울 생각이었는데 자신이 멍청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부끄러워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지금은 적을 죽이는 것만이 아미파가 살길이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쿼렐들이 일제히 허공을 갈랐다.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쏘아진 쿼렐은 화산파의 영지민을 마구 꿰뚫었다.

    그럼에도 영지민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공포.

    영지민의 눈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공포였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화산파 영지민들이 맹목적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마치 돌진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인 것처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크로스보우에서 쏘아진 쿼렐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화산파 영지민들의 진격은 좌절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악착같이 돌진해 왔다. 놀라운 것은 숲 안쪽에서 비명이 튀어나온다는 점이다.

    “쏴라! 최대한 수를 줄인다!”

    주소용 후작이 앙칼진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수가 많다는 것이 이렇게 부담으로 다가올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무장 상태도 별로인 데다가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은 병력이라 우습게 본 게 실수였다.

    숫자로 밀어붙이는 게 이렇게나 두려운 일이라는 걸 주소용 후작으로서는 처음 깨달았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적을 전멸시키지 않는다면 끝나지 않을 싸움이 돼 버리고 말았다.

    “기사들은 방어선을 구축하고 병사들이 크로스보우를 쏠 수 있도록 막아라! 손에 인정을 두지 마라!”

    주소용 후작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치면서 롱소드를 뽑았다.

    창을 앞세워 달려드는 영지민을 향해 마나 쉐도우가 담긴 롱소드를 휘둘렀다. 대번에 창대가 잘려 나가고 화산파 영지민의 목이 뎅겅 썰렸다.

    피비린내가 훅 밀려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크로스보우의 재장전 시간이 길어 이제는 적들의 진격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처참하고도 지루한 전투가 이어졌다.

    아미파가 싸움에 열을 올리는 동안에도 정천우와 샤벨타이거 기사단은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한발 뒤로 물러서서 싸움을 관망하고 있었다.

    아예 지금 싸움이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이제 끝난 건가?”

    정천우는 말 위에서 무감동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전투를 끝낸 아미파의 군대는 망연자실한 분위기였다. 살기가 흐르고 욕설이 지배하던 남궁세가의 전장과는 달랐다.

    아미파의 사람들은 울고 있었다.

    왜 우는 것인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기분 더러운 전투는 처음 겪은 탓인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주소용 후작은 아예 넋을 잃은 채 사방에 쌓인 화산파 영지민의 시체들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글렀네, 글렀어.”

    “뭐가 말입니까?”

    헤이먼은 갑작스러운 정천우의 혼잣말을 듣고선 인상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사기가 바닥이야. 이래서는 화산파의 영역에 들어간다고 해도 병사들이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지 걱정이다.”

    정천우가 혀를 끌끌 차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까 봐 추격대를 구성하라고 전한 것인데, 결국은 주소용 후작의 고집으로 사기가 바닥을 치게 되었다.

    “이젠 적을 해결했으니 해결된 것 아닙니까?”

    “해결되긴 개뿔이 해결돼? 주소용 후작은 너무 물러. 이런 식이라면 화산파를 공략하기도 전에 자멸할지도 몰라.”

    “설마요.”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정천우는 느긋하게 말고삐를 잡아당기고는 천천히 말을 몰았다. 이젠 주소용 후작이 대화할 만한 상태가 되었는지 확인하러 가 볼 참이었다.

    계속 고집을 피운다면 맹주 자리까지 때려치우겠다고 할 참이었다. 수하를 자처하면서 지지리 말도 안 듣는 걸 가만히 놔둘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주소용 후작은 정천우가 생각한 것처럼 뭔가를 깨닫지는 못했다. 정천우는 미련 없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와 아미파에 관한 관심을 접었다.

    ***

    “저기도…….”

    주소용 후작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화산파 영역에 들어서면서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화산파 영역 내의 마을마다 폐허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맞닥뜨리는 마을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아미파 사람들의 분위기가 더욱 나빠졌다. 군대의 사기는 이미 바닥을 치는 중이다.

    아무 힘도 없는 영지민을 학살한 격이었으니 병사들은 자괴감을 느꼈다. 겨우 힘없는 양민들을 도륙하기 위해서 뼈를 깎는 훈련을 받은 게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이번엔 좀 다른 게 보이는군요.”

    정천우는 마을 중앙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원래는 주소용 후작과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일부러 곁에 다가왔으니 예의상 동조해 주고 있었다.

    거기에는 ‘아미파의 앞길을 막는 자, 죽음으로 단죄하노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주소용 후작은 착잡한 심정이 되어 물었다.

    그녀가 생각한 영지 토벌전은 이런 게 아니었다. 전략과 전술을 사용해 전쟁다운 전쟁을 벌이는 걸 원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영지민을 사지(死地)로 내모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영지 마을을 약탈하고서 그것을 아미파에 뒤집어씌운다. 치가 떨리도록 야비하고 지저분한 짓이다.

    주소용 후작은 전신을 부르르 떨면서 야무지게 이를 갈았다. 영지민들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화산파에 대한 분노다.

    “왜겠습니까?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죠.”

    “……이렇게 해서 전쟁에 이긴다는 말입니까?”

    주소용 후작은 말도 안 될 소리를 들은 거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정천우는 그녀의 반응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아미파의 병사들을 가리켰다.

    “직접 보십시오. 아미파는 이미 싸우기 전부터 지고 들어가는 겁니다. 저런 놈들을 데리고 가서 이길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건…….”

    주소용 후작은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자신이 보아도 아미파의 병사들은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이런 상태로 화산파와 싸운다면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뻔하다.

    “인간의 싸움은 치사한 겁니다. 얼마나 대놓고 치사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전쟁이 유리해지기도, 불리해지기도 합니다.”

    정천우는 중원에 참가해서 싸웠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마냥 낭만을 찾을 것 같았던 동대륙 사람들이었는데, 그렇지 않은 놈들을 만난 것 같아 입맛이 썼다.

    중원에서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지만 이렇게나 입맛 더러운 전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결국은 화산파를 하루라도 빨리 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괴로운 진격이 될 겁니다.”

    “……네.”

    주소용 후작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마을 중앙에 쌓은 시체를 쳐다보았다.

    그의 말처럼 괴롭고도 슬픈 행군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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