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34화 (13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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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33. 괴로운 진격(進擊) (4)

    “도망치지 않는다면 죽여 주겠다!”

    정천우가 쩌렁쩌렁하게 고함을 지르면서 창을 높이 들었다. 뒤를 따르는 부하들이 딴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몰아붙이려는 것이다.

    정천우가 말 위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담긴 창을 망설임 없이 힘차게 휘둘렀다.

    투두둥, 투두둑.

    누군가에게 선동되어 달려들던 화산파 영지민의 팔과 머리가 섬뜩한 절단음과 함께 후두둑 잘려 나갔다.

    이건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나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창날이 풀을 베듯 화산파 영지민들을 가르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피비린내가 사방으로 퍼졌다.

    “이익!”

    “제길!”

    정천우의 학살에 뒤를 따르던 샤벨타이거 기사단원이 마지못해 창을 휘둘렀다.

    처음이 힘들 뿐이다.

    타성에 젖은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은 저마다 마나 쉐도우가 담긴 창을 마구 휘둘렀다.

    명령이니까…….

    “아아악! 사, 살려 줘!”

    “이럴 수는, 이럴 수…… 커헙!”

    화산파의 영지민들은 샤벨타이거 기사단의 잔인한 돌진에 비명을 질렀다.

    부당함을 부르짖는 이들에게도, 살려 달라 비는 이들에게도 창날은 여지없이 파고들었다. 정천우가 주도하면서 벌이는 무의미한 살육은 화산파 영지민에게 공포를 심어 주었다.

    “우, 우린 다 죽을 거야! 죽는다구! 크흐흑!”

    화산파의 영지민 중의 하나가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아무런 위험도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속절없이 영지민들이 죽어 나가는 중이다.

    인근 마을에 살던 친척의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혀를 길게 빼물고 날아오는 머리통을 받아 든 순간, 사타구니가 찌릿거리더니 자신도 모르게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이대로는 모두 죽을 거라고 생각하니 맥이 쭉 빠졌다.

    그때, 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모두가 죽는 게 아니었다. 잔인한 적 기사들의 손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기사들에게 등을 돌린 자들은 살았다. 도망치는 사람은 모두가 멀쩡하게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적 기사들이 커다란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는 게 이제야 귀에 들어왔다. 두려움에 젖어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이제야 들려오는 것이다.

    “어, 어, 어!”

    영지민은 자신을 향해 곧장 달려오는 기사단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입을 쩍 벌리고서 컥컥댔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겠지만 기사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 모습이 느린 동작으로 보였다.

    영지민은 등을 돌렸다. 그리고 달렸다.

    ‘제발! 제발!’

    자신의 목숨이 오늘로 끝이 아니기를 빌고 또 빌었다.

    두두두두!

    “아!”

    영지민은 자신을 스쳐 지나는 기사들의 모습에 감탄성을 흘렸다.

    살았다. 저들은 도망치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그것을 깨달은 영지민은 목이 찢어져라 소리치며 달렸다.

    “도망가! 도망치면 안 죽어! 도망쳐어!”

    영지민은 피를 토하는 듯한 얼굴로 소리치며 마구 달렸다. 기사들의 칼질에 죽어 나가던 영지민들이 목소리를 듣고는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등을 돌렸다.

    거짓말처럼 죽음의 칼질이 멈췄다.

    간혹 등을 돌리지 못한 영지민에게는 차가운 검날이 몸을 훑었다. 시뻘건 핏물이 왈칵 쏟아지면서 도망치는 다른 영지민의 등을 적셨다.

    영지민들이 저마다 소리치면서 등을 돌렸다. 정천우가 이끄는 샤벨타이거 기사단이 돌진해 오는 모습에 영지민들이 다급해졌다. 조잡한 무기는 내팽개치고 무작정 뒤로 돌아 달렸다.

    “도, 도망쳐!”

    “이건 개죽음이야!”

    “으아아아! 기사단이 오고 있어!”

    화산파의 영지민들이 식겁한 목소리로 서로 도망가겠다고 난리를 피워 댔다. 그러자 맨 앞에서 잔인하게 창을 휘두르던 정천우가 말의 속도를 줄이면서 창을 높이 들었다.

    “대기한다!”

    정천우는 냉기가 묻어날 것만 같은 목소리로 내공을 담아 한마디 툭 던졌다. 전투마와 그의 전신은 영지민들의 피로 얼룩져 있었다.

    화산파의 영지민들이 모두 물러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말 머리를 돌렸다.

    “복귀한다!”

    정천우는 일부러 더욱 냉정하게 소리치고는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은 입을 꾹 다물고 그의 뒤를 따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기사가 할 짓이 아니었다는 생각뿐이었다. 저항할 수단이 없는 영지민을 상대로 창을 휘두르다니…….

    기사들은 이러려고 기사도를 배우고 무공을 연마한 것이 아닌데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잔인한 학살을 벌인 기사들답지 않게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말을 몰았다.

    “다녀왔습니다.”

    정천우는 주소용 후작의 앞에 멈추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아미파의 기사들이 정천우를 바라보는 눈빛이 곱지 않았다. 어째서 무고한 영지민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였느냐는 질책을 담은 얼굴들이었다.

    아미파의 병사들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을 정도니 기사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추격대를 보내야 합니다.”

    정천우는 주소용 후작의 눈을 바라보면서 담담한 어조로 요구했다.

    하지만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몹쓸 짓을 했는데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하는 화산파의 영지민에게 추격대를 보내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맹주님,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어요? 지금만 해도 너무…….”

    “잔인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으십니까?”

    “……예.”

    주소용 후작은 정천우의 눈을 마주 보기가 어려워 고개를 돌리고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추격대를 보내지 않겠다고 말씀하고 싶으시겠군요.”

    “적을 지나치게 잔인하게 대한다면 오히려 아군의 사기가 떨어집니다, 맹주.”

    “주소용 후작님께서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후회하지 않겠어요.”

    주소용 후작은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정천우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차례 빙긋 웃어 주고는 말 머리를 돌렸다. 더 얘기해 봐야 의미가 없겠다고 판단한 그는 미련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단장님, 조금 심하셨습니다.”

    “심해?”

    정천우의 뒤를 따르던 헤이먼이 곁으로 다가와 질책하는 듯한 어조로 말하자 정천우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반항할 의사가 없는 적을 베는 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몇 명이나 죽었지?”

    “최소한 2~300명은 죽었을 겁니다.”

    헤이먼은 화산파의 길목으로 통하는 곳에 쓰러진 영지민의 시체를 대충 헤아리면서 말했다.

    초반에 아미파의 병사들이 크로스보우로 공격한 것을 제외하면 샤벨타이거 기사단이 100명 이상을 학살한 것이다.

    “그리고 2만 명 가까이 살았지. 만약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모조리 죽여야 했을 거야. 포로로 삼자는 순진한 소리나 할 거라면 집어치워. 어떤 또라이 지휘관이 자신의 부대보다 많은 수의 포로를 거느려?”

    “정말 그렇게 믿으십니까?”

    “믿기 싫으면 관둬. 굳이 믿어 달라고 애원하진 않으니까.”

    정천우는 헤이먼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일일이 설명해 줄 이유가 없었다. 대체 이 세상에서는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정천우가 군부 출신은 아니었지만 중원에서 주워들은 게 있다. 그리고 경험해 보았다. 어설픈 자비심이 어떻게 끔찍한 일로 되돌아오는지 말이다.

    ‘전쟁에서 낭만을 찾는 것인가?’

    정천우는 불만이 가득한 부하들을 스윽 훑어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어쩌면 이들은 생각보다 더 순진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다.

    그때까지 정천우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나서 봐야 괜한 반감만 살 테니까 말이다. 세상엔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깨닫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법이니까.

    “알아서 하겠지.”

    “네?”

    “아무것도 아니다. 곧 출발할 모양이니까, 다들 다시 무기를 점검하라!”

    정천우는 주소용 후작을 힐긋 쳐다보았다가 이내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이 불만을 드러내는 게 느껴졌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요즘 덜 굴렸더니 개김성이 늘어났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어쩐지 으스스해.”

    “그, 그러게…….”

    정천우가 마음속으로 빡세게 굴려야겠다고 다짐한 것을 느낀 것인지,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은 나지막하게 소곤거리면서 정천우의 눈치를 보았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단지 너희가 그 일을 했을 뿐이다. 내가 시켜서 한 일이니 다 털어 버리고 화산파를 공략할 생각만 해. 또 이번 일 가지고 지저분 떠는 새끼는 특별 교육에 들어가겠다. 알겠냐!”

    “예, 알겠습니다!”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은 정천우의 말에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계속 투덜거렸다가는 악마 같은 정천우에게 특별 교육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일반 교육도 죽을 맛인데 특별 교육이라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

    아미파의 진군은 우울하기만 했다.

    본격적인 공략을 위해서 화산파의 영역에 첫발을 들이는 중이다. 그러나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화산파의 영지민을 학살했다는 죄책감과 그들의 투항을 거부했다는 찜찜함이 병사들을 괴롭혔다.

    병사들의 그런 불만을 감지한 것인지, 그게 아니면 수뇌부 역시 병사들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인지, 힘차게 진군해야 할 군대의 이동 속도는 느릿하기만 했다.

    가라앉은 분위기 탓인지 선두에서 지휘하는 주소용 후작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척후대는 아직인가?”

    “그렇습니다, 영주님. 척후대를 추가로 보내는 건 어떻겠습니까?”

    주소용 후작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곁에 선 부단장에게 물었다. 부단장인 주민하는 즉각 대답하면서 주소용 후작의 뜻을 물었다.

    척후대는 20명씩 다섯 개를 운용하는 중이다. 최소 30분 단위로 보고가 올라와야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척후대의 보고가 없었다.

    척후대에서 연락이 없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를 담는다. 척후대가 공격을 당하는 중일 수도 있고, 길을 잃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섯 개의 척후대를 운용하고 있으니 길을 잃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무의미하다. 결국은 적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

    문제는 과연 누가 척후대를 공격했느냐는 거다.

    화산파의 병력이 이런 변방에까지 지원을 나왔을 리가 없다. 전력을 한 군데로 모아도 부족한 판에 이런 곳에까지 병력을 쪼개는 미련한 짓을 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게 더 무리다.

    “다시 척후대를 꾸린다. 단, 30분 단위로 운용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척후대를 배치하고, 나머지 척후대 역시 다른 척후대의 시야 안에 두도록 운용하라.”

    “예, 영주님!”

    주민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서 뒤로 물러났다.

    척후대가 없다고 해서 이동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아미파의 진군 속도는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다시 대열에서 척후대가 나섰다.

    마교 놈들에게서 빼앗은 전투마까지 박박 긁어다가 척후대에게 지원한 것이다.

    척후대는 명령을 받아 빠른 속도로 앞에 나섰다. 본대를 뒤로하고서 미리 위험을 감지하기 위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 척후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정천우였다.

    “또 골로 가겠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곁에 있던 헤이먼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정천우의 말에서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암시와도 같은 얘기였으니까 말이다.

    “후회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어떻게 하는지 봐야지.”

    “그게 무슨…….”

    “직접 봐!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야.”

    정천우는 멀어져 가는 척후대를 손을 가리켰다.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무심한 얼굴이었다.

    헤이먼은 입이 툭 튀어나온 채 투덜거리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저, 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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