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33화 (13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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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33. 괴로운 진격(進擊) (3)

    “매, 맹주님, 이게 무슨 상황일까요?”

    주소용 후작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것은 정천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싸울 것처럼 나타나서는 겨우 마법 한 방에 항복해 버리는 적이라니.

    정천우의 고민이 깊어졌다. 녀석들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파악하느라 머리가 복잡해졌다.

    적병들의 상태를 본 정천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대부분이 비전투원이었다.

    앞쪽에는 제법 청년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영지민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화산파의 꿍꿍이가 뭔지 정천우는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뜨악한 얼굴의 그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군량!”

    “네? 맹주님, 지금 군량이라고 하셨나요?”

    주소용 후작은 뜬금없이 정천우의 입에서 ‘군량’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적들이 항복한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머리가 복잡한 판에 정천우가 엉뚱한 소리를 한다. 그녀로서는 더욱 골치가 아팠다. 대체 화산파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후우…… 주소용 후작님.”

    “네, 맹주님.”

    “이들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애초부터 우리에게 항복하러 온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주소용 후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냈다. 싸울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하는지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전쟁이라는 건 피와 살이 튀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화산파가 한 짓은 그녀의 상식 밖이었다.

    어째서 싸우기도 전에 항복을 선언하는지, 이럴 거라면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자신들이 진영을 꾸린 곳까지 힘들게 왔는지……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정천우는 그런 주소용 후작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모르는 것 같네.’

    이건 중원에서 흔히 사용하는 전술 중의 하나다.

    전투 수행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무장시켜 싸움터에 내보내고서 곧바로 항복시킨다. 멍청한 짓처럼 보이지만 우습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주소용 후작께서는 이들을 전부 죽이실 겁니까?”

    “항복해 온 적을 죽이는 것은 너무 비인간적이잖아요. 화산파를 굴복시키면 이들 역시 우리의 소중한 영지민이 될 테니까요.”

    “그럼 저들을 어떻게 관리할 생각인지 묻고 싶습니다.”

    “당연히 포로로…… 이런…….”

    주소용 후작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려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문제인지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항복한 이들을 포로로 두려면 재워 주고 먹여 줘야만 한다.

    거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아미파의 병력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포로다. 대충 수프를 끓여서 먹인다고 해도 엄청난 양의 군량이 필요하다. 어쩌면 화산파의 영지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군량이 바닥날지도 모른다.

    그래서는 전쟁을 수행할 수도 없다. 공성전이 단기간에 끝난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화산파가 작정하고 수성하면서 장기전으로 끌고 간다면 아미파는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소용 후작은 정천우를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이 생각하는 게 지금 맞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정천우를 보고 있었다.

    “우리의 군량을 축내겠다는 전술입니다.”

    “맹주님, 그럼 어떻게 하죠?”

    “해산시켜야 합니다. 저들을 받아들였다가는 우리의 발목이 붙들릴 겁니다.”

    정천우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화산파의 적병들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까지 치사하게 나오는 것을 보면 화산파도 어지간히 잔머리를 굴리는 놈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시간을 끌어 다른 영지의 지원을 기다리는 건지도 몰랐다.

    정천우가 그런 생각에 빠진 동안 주소용 후작은 한동안 갈등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들이 해산하지 않으면 어쩌죠?”

    “강제로 해산시켜야죠.”

    “강제 해산이라는 말씀은…….”

    “저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죽음의 공포를 보여 줘야 할 겁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잔인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저들을 받아들이실 거라면 차라리 후퇴하시고 다음을 기약하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정천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때론 잔혹해져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자비를 베푸는 건 자멸하는 지름길이다.

    포로는 끊임없이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아미파의 행군 속도를 저하시키고, 불필요한 잡무에 시달리게 할 것이 틀림없다. 두 배에 달하는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서 불필요하게 인원을 배치해야 한다. 게다가 쉬어야 할 때는 포로들의 수용 시설에도 신경 써야 한다.

    그것은 미친 짓이다. 차라리 다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저들을 받아들일 순 없는 일이다.

    “만약 강제 해산에 실패한다면…….”

    주소용 후작은 차마 생각하기도 싫다는 얼굴로 정천우를 바라보았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맹주님.”

    “어째서 이런 걸 제게 묻는 것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천우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은근슬쩍 자신의 책임으로 떠넘기려는 것 같아 찜찜한 느낌이었다. 전략이나 전술과 같은 전쟁에 관한 일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다. 싸움이라면 하겠지만 단순한 학살은 그가 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주소용 후작의 행동은 자신에게 모든 결정을 떠넘기려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게, 그게…… 제가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답을 찾을 수 없어서, 조, 조언을 구하려고 말씀드렸어요.”

    “이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현재 이곳의 병력은 샤벨타이거 기사단을 제외하곤 모두 아미파의 병력입니다. 이 결정은 주소용 후작님께서 해 주셔야 합니다. 조언이라고 하셨으니 저도 제가 아는 바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제 해산에 실패하신다면, 저들을 모조리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에서 지워야 합니다.”

    “그, 그런!”

    “독하지 않으면 우리가 당합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

    정천우가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자 주소용 후작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영지민 2만 명의 생명이 달렸다.

    차라리 전쟁이었다면 고민도 없을 일이다. 아군과 적군의 전력을 비교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구상하면 된다. 능력이 부족하다면 다른 지휘관들의 도움을 받아 세세한 부분까지 계획을 세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게 불가능하다. 모든 게 자신의 손에 달렸다. 당장 입을 열어 명령을 내리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그녀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화산파를 공략하려면 눈앞에 엎드린 영지민들을 해산시켜야 한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 될 것만 같아 그게 불안했다. 만약 영지민들이 반항한다면 학살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그렇게 되면 심적인 부담감은 모조리 자신이 져야만 한다. 점점 가슴이 답답해져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빠른 결정이 필요합니다.”

    “맹주님은…… 잔인한 분이셨군요.”

    “중원에서는 ‘독하지 못하면 장부가 아니다’는 말이 있습니다. 장부가 꼭 남자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때론 잔인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적군과 아군 모두에게 인정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저들은 우리의 영지민이 될 사람들이에요.”

    “아직은 우리의 영지민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정천우가 그녀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그러자 주소용 후작은 눈시울을 붉혔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이내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감상 따위에 빠지기에는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화산파의 병사들은 들어라! 나는 항복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무기를 다시 들고 싸우든지 후퇴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 열을 셀 동안 기회를 주겠다. 만약 후퇴하지 않는다면, 싸우겠다는 것으로 간주하고 공격할 것이다.”

    차마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기에 주소용 후작의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항복을 받아 주십시오!”

    “항복! 항복합니다! 제발! 제발 항복하게 해 주십시오!”

    “살려 주세요.”

    화산파의 영지민들은 항복을 받아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중에는 노인의 목소리와 여자의 목소리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미파의 진군을 저지할 생각으로 이들을 보낸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전투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지니지 못한 이들을 보내다니, 지독한 인간들…….’

    주소용 후작의 눈에서 증오의 감정이 일어났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간악한 짓을 벌이는 화산파에 이가 갈렸다.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영지민들의 모습이 가여웠지만 정천우의 말처럼 이들을 받아들였다가는 이번 전쟁은 끝장이다.

    “궁병대 장전!”

    영지민들이 난리를 피웠지만 주소용 후작은 마음을 모질게 먹고 명령을 내렸다.

    크로스보우의 활시위를 후크를 사용해 장착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이어졌다. 궁병대가 쿼렐까지 장전하고서 무릎을 꿇은 영지민들을 겨누었다. 그러자 화산파 영지민들이 더욱 통곡을 하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고 마음먹은 주소용 후작은 이를 한차례 갈아붙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열을 셀 동안 기회를 주겠다. 후퇴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하나…… 둘…… 셋…… 넷…….”

    주소용 후작이 나름 단호한 목소리로 숫자를 세나갔다.

    계속 아우성을 치던 영지민들은 주소용 후작의 입에서 ‘다섯’이라는 숫자가 나오자 선두에서부터 벌떡벌떡 일어났다. 다른 영지민들과 달리 건장한 체구의 사내들이었다.

    “제기랄,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똑같다면 차라리 싸운다!”

    일어선 사내가 발악하듯 소리치는 순간, 뒤쪽에서도 그에 호응하면서 악을 썼다.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던 영지민들은 주소용이 냉정하게 숫자를 세어 가자 눈빛이 달라졌다. 대열의 틈바구니에 있던 바람잡이들이 싸우자고 선동하면서 무기를 쥐자 자신도 모르게 따라서 무기를 쥐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주소용 후작은 마지막 숫자를 세어 가고 있었다.

    “아홉…… 열! 쏴라!”

    투두둥, 투둥퉁!

    쉬쉬쉭, 슈슈슈슉!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궁병대가 쏘아 보낸 쿼렐 2천여 개가 날아갔다. 쿼렐들은 영지민들의 살을 헤집고 들어가 붉은 피를 빨아 댔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구나.’

    상황을 지켜보던 정천우가 입맛을 다셨다.

    이럴 수밖에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화산파의 영지민들이 자발적으로 여기까지 찾아왔을 거라고는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 협박을 받았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피해를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잔인해지는 것뿐이다.

    주소용 후작에게 못할 짓을 시켰다. 심적인 부담감이 컸으리라는 건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조금은 그녀의 부담을 덜어 줘야 할 때였다.

    정천우가 높이 창을 들었다. 그러고는 역천검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창자루를 타고 뻗어 올라간 그의 내공이 역천검의 검날에서 눈부신 빛으로 화했다.

    오러 블레이드!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은 정천우의 빛나는 창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창 자루를 굳게 잡았다.

    “적을 죽여라!”

    정천우의 고함이 지축을 흔들었다.

    말의 배를 박차고 나가는 정천우의 모습에 샤벨타이거 기사단은 무엇에 홀린 것처럼 각자 말의 배를 걷어찼다. 마치 엄청난 적이 앞에 기다리는 것과 같은 느낌에 그들은 마나를 전력으로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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