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32화 (132/200)
  • # 132

    Chapter 33. 괴로운 진격(進擊) (2)

    ***

    “에이…… 경계할 게 뭐가 있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네.”

    디독스는 하품을 하면서 작게 투덜거렸다.

    그는 아미파의 영지병이다. 나름 전쟁에서 공을 세우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지원했다. 그런데 정작 싸움다운 싸움은 해 보지도 못했다.

    좀비 군단과 싸운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워낙 괴기스러운 놈들이었기에 싸운다기보다는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어제만 해도 그렇다. 마교의 기사들이 공격해 왔지만 아미파와 맹주의 기사단이 간단하게 해치웠다.

    이러다간 공을 세우기는커녕 구경만 하다가 싱겁게 전쟁이 끝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친구야, 배부른 소리 하지 마. 괜히 나대다가 모가지 따인 놈 여럿 봤어. 그저 우리네 같은 허접들은 주는 대로 잘 먹고 월급이나 잘 챙기는 게 최고야.”

    같이 경계 근무를 맡은 에담은 피식 웃으면서 디독스를 향해 핀잔을 주었다.

    아직 나이가 젊어서 그런지 혈기가 왕성하다. 뭐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이십 대 후반의 나이는 한창 힘을 쓸 나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영지병으로 살아온 에담에겐 디독스가 그저 어리석게만 보일 뿐이다.

    “에담 아저씨는 너무 꿈이 없으세요.”

    “꿈? 이 친구 아주 재밌네? 그래, 자네 꿈은 뭔데?”

    “훌륭한 기사가 되는 거요.”

    디독스는 가슴을 앞으로 내밀면서 턱을 치켜들었다.

    “우리 아미파의 무공은 여자들을 위한 거야. 남자는 기사가 되긴 어렵다는 거 몰라?”

    “왜 몰라요? 그래서 저도 열심히 검술을 익혔다니까요?”

    “그래서? 어디 무공을 익혔는데? 무당파? 하북팽가?”

    “무당파의 검술을 배웠어요.”

    에담의 물음에 디독스는 우쭐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에담은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봐야 반쪽짜리 검술이 뻔하다.

    아미파의 검술은 이상하게도 남자들이 배우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 아미파에 여기사들이 많은 이유가 그것이다.

    물론 남자들도 가만히 손을 놓고만 있지는 않았다. 다른 문파의 검술을 배워 기사의 꿈을 이어 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다른 문파의 무공을 수준급으로 배운 이들이 아미파에 자리 잡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독학을 하거나 고만고만한 실력자들끼리 뭉쳐서 검술을 배웠다. 거기에서 두각을 나타낸 일부의 사람만이 아미파의 남자 기사로 들어가는 것이다.

    요즘은 남자 기사들의 비율이 좋아져서 검술을 배우기 쉬워졌다고는 하는데, 그래 봐야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게다가 남자 기사들의 입지도 좁아서 아직도 아미파에서는 차별 대우를 받는다고 들은 에담이다.

    하지만 굳이 디독스의 꿈을 짓밟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는 것으로 건투를 빌어 주었다.

    “그래,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빛을 볼 날이 올 거다. 하지만 무리하는 건 좋지 않아. 지금은 경험을 쌓는 것에…… 뭐지?”

    디독스의 어깨를 다독이던 에담의 손이 그대로 멈추었다. 자신이 경계를 맡은 방향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병사나 기사가 아니었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것은 조잡한 쇠붙이였다. 심지어는 나무를 깎아 끝을 뾰족하게 만든 창을 쥔 사람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에담은 서둘러 목에 건 뿔나팔을 불었다.

    뿌우우우, 뿌뿌우!

    다가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아 위협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디독스! 가서 이 사실을 알려!”

    “예, 예!”

    디독스는 놀란 얼굴로 몸을 돌렸다. 공을 세워 기사가 되겠다던 그의 포부는 몰려오는 화산파 사람들에게 짓눌려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계속 뿔나팔을 불어 대던 에담 역시 디독스가 충분히 멀어졌다 싶은 순간 몸을 돌려 달아났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미파의 군대가 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계속 신호를 보내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나머지 자세한 상황은 디독스가 알려 줄 테니까 말이다. 에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한편.

    화산파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 휴식을 취하던 아미파의 병사들과 기사들은 비상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에 서둘러 군장을 챙겼다. 느슨하게 풀어 두었던 장비들을 다시 바짝 조이고,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것은 정천우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남는 것 같아 한차례 더 내공을 운기하려던 정천우는 자신의 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훌쩍 몸을 띄웠다.

    잠시 후, 샤벨타이거의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각자의 말에 타고서 정천우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무슨 일인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주소용 후작께 묻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습니다.”

    헤이먼은 정천우의 물음에 즉각 대답했다.

    전에도 정천우에게 감히 반항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군기가 팍팍 들어 있었다.

    기사들의 꿈이라는 마스터가 된 사람이다. 헤이먼 역시 마스터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다.

    애초에 자신이 보호해야 할 사람인 데다가, 존경받아 마땅한 경지에 올랐으니 헤이먼으로서는 오히려 반가운 기분이었다. 상대하기 껄끄러운 ‘성격 파탄자 주인’에서 ‘능력자 주인’으로 승격된 셈이니까 말이다.

    “좋아! 주소용 후작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정천우가 손으로 아미파의 진영을 가리키면서 말 머리를 돌렸다.

    아미파 역시 비상을 뜻하는 뿔나팔 소리에 허겁지겁 진영을 구축하는 중이었다. 기사단은 병사들보다 월등한 육체 능력을 자랑하면서 벌써 말에 올라 출진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심각한 얼굴로 병사들의 상태를 살피던 주소용 후작이 정천우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반색했다.

    “맹주님, 어서 오세요.”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습니까?”

    “화산파에서 적이 몰려오고 있다고 해요. 정규 병사들이 아닌 농민들로 이루어진 무리라고 들었어요. 그래도 만약에 대비해 준비는 해 두어야죠. 위장일 수도 있으니까요.”

    “위장한 것이라면 저쪽도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이 끼어 있다는 말인데…….”

    정천우가 말끝을 흐리면서 주소용 후작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적이 몰려오고 있다는 방향에서는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그가 우려하는 대로 정예병을 영지민으로 위장한 거라면 특유의 군기(軍氣)가 느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저 다수의 사람이 뿜어내는 잡다한 기운이 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잡병 중의 잡병들이나 내보일 만한 기세였다.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입니다.”

    기세를 파악한 정천우가 주소용 후작을 향해 그렇게 말하고는 굳었던 표정을 바꾸었다.

    “맹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안심되는군요. 그럼 어찌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 이 여자는 왜 자꾸 나한테 이런 걸 물어보는 거야?’

    정천우는 주소용 후작이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부담된다기보다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은 떠날 사람이다. 그걸 알면서도 이런 일까지 자기의 뜻을 묻는 게 귀찮게 느껴졌다.

    “대충 겁이나 주면 될 것 같습니다. 가장 효과가 좋은 건 역시 마법입니다. 마법을 사용해서 뜨거운 맛을 좀 보여 준 뒤에 기사단이 한차례 휘저으면 겁을 먹고 물러날 것입니다.”

    “음…… 너무 잔인하지는 않을까요? 마법은 위협 정도로 사용하고 기사단이 출동하는 건 어떨까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두려워할 것 같은데요.”

    주소용 후작은 잔인하게 느껴지는 정천우의 작전에 조심스럽게 반론을 펼쳤다.

    아무런 방어구도 없는 영지민에게 마법이 퍼부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뻔하다. 그런 상태에서 기사단까지 출동한다면 학살하는 것밖에 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다. 어차피 화산파를 점령하면 모두가 한 식구가 될 텐데 그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천우는 대충 주소용 후작의 마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녀의 뜻에 찬성하기 어려웠다.

    그가 경험하기로, 적에게 자비를 베풀면 만만하게 보고 또 덤벼드는 게 보통이었다. 그동안 동대륙에 평화가 길어 주소용 후작의 실전 경험이 부족해 이렇게 판단하는 거라고 정천우는 생각했다.

    ‘뭐, 당해 봐야 뜨거운 맛을 알겠지. 아니면 진짜로 겁을 먹고 적병이 도망칠 수도 있겠지.’

    “주소용 후작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마법사를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샤칼! 제인 마법사님!”

    정천우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샤벨타이거 기사단 소속의 마법사 두 명을 불렀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천…… 맹주님, 부르셨어요?”

    정천우의 목소리를 들은 샤칼과 제인이 말을 몰고 앞으로 나왔다.

    두 사람의 반응에 정천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샤칼은 뭘 잘못 먹었는지 바싹 군기 든 척을 했고. 제인은 자신을 대하는 게 어렵다는 듯 쭈뼛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샤칼! 안 어울리게 뭐야?”

    “주인님께 충성을 맹세한 몸입니다. 이걸 안 어울린다고 하시면 저의 충성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지랄.”

    “으윽! 너무하십니다.”

    샤칼은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정천우를 애처롭게 쳐다보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니까 앞으로 지켜보겠다. 제인 마법사님은 또 왜 그래요?”

    “네, 네? 제가 뭘요?”

    “맹주님이 뮙니까? 그냥 전처럼 편하게 불러요.”

    “그, 그래도…….”

    제인은 주소용 후작을 흘깃 바라보고는 곤란하다는 듯 뒷말을 삼켰다.

    ‘여러모로 귀찮네.’

    정천우는 다른 사람들에게 티가 나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사람들 없을 땐 편하게 불러 주세요.”

    “……네.”

    제인은 부드럽게 말하는 정천우에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대답하고는 얼굴을 붉혔다.

    까마득히 높은 위치에 올라간 사람이라고 생각해 제대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마음을 졸였다. 그런데 그가 먼저 자신에게 다가오자 기쁘면서도 달콤한 느낌을 받았다.

    “두 분께서는 아미파의 마법사들과 함께 적에게 위협 마법을 사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네, 주인님.”

    “알았어요, 맹주님.”

    정천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인과 샤칼은 이제 막 앞으로 나선 아미파의 마법병대와 합류했다. 에쉴이 이끄는 아미파의 마법병대다.

    그러나 에쉴은 자신의 지휘권을 샤칼에게 넘겼다.

    제인만 하더라도 5서클의 마법사였다. 그에 반해 에쉴은 4서클의 마스터다. 자신이 주도해 봐야 효율이 떨어질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샤칼이 제인과 에쉴에게 작전을 설명하고 위치를 잡아 갔다. 일자로 길게 늘어선 그들은 정신을 집중하면서 저마다 마나를 재정비하며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적들이 아미파 군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마법사들이 앞으로 나선 뒤 30분이나 지나서였다.

    “적이 온다!”

    누군가가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화산파의 영지민으로 구성된 적병은 장비를 비롯한 모든 것이 엉망이었지만 그 숫자만큼은 엄청났다. 어떻게 저처럼 많은 영지민을 끌어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못해도 2만 명은 되어 보였다.

    적병들의 얼굴엔 두려움이 없었다. 그렇다고 싸우겠다는 의지가 확실하게 드러난 것도 아니었다.

    정천우를 비롯한 기사단장급 인물들이 의아함을 느낄 사이도 없이 샤칼을 선두로 마법이 터져 나왔다.

    콰과광! 콰광! 쿠구궁!

    엄청난 폭음과 함께 아미파의 군대와 적병 사이에서 각종 마법이 폭발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적병들이 진을 친 근처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샤칼이 6서클에 해당하는 마법을 발사하고 나머지 마법사들이 저마다 위력적인 마법을 사용했다.

    “주소용 후작님, 우리 차례입니…… 저것들 뭐야?”

    막 출진을 제안하려던 정천우가 김빠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마법으로 인한 연기가 사라지기 무섭게 화산파의 영지민으로 구성된 적의 군대가 일제히 조잡한 무기를 집어 던지고 무릎을 꿇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