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31화 (131/200)
  • # 131

    Chapter 33. 괴로운 진격(進擊) (1)

    “……이거였어!”

    정천우는 황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는 검강의 모습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동대륙에 넘어올 때까지만 해도 삼류에 불과했다. 지닌바 능력이라고는 20년가량의 열악한 내공이었다. 그래서 벽력대제라는 무인의 경지에는 올라야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 당장은 벽력대제를 능가할 순 없겠지만 조금만 더 강해진다면 엇비슷한 정도까지는 따라잡을 자신이 생겼다. 무려 100년 내공을 쌓았고, 무공 실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중원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미령 소저, 괴롭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줘요.’

    정천우는 아름답게 빛나는 검강을 향해 다짐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이내 눈을 빛냈다.

    지금은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정천우가 역천검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아미파와 마교의 기사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미파의 기사들은 감동한 얼굴이었고, 마교의 기사들은 갈등하는 얼굴이었다. 마교의 기사들은 정천우가 마스터의 상징이라는 오러 블레이드를 만드는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덤비자니 상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미파의 기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단장을 죽인 정천우에 대한 복수심도 그에 못지않았다.

    “내가 맹주임을 인정하시는 분은 그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정천우가 내공을 담아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일상적인 말투였고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주변의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를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아미파의 기사들은 순순히 그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마교의 기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차압!”

    파바박!

    정천우가 짤막한 기합을 지르면서 땅을 박찼다.

    몸을 움직이기 직전 역천검에 더욱 내공을 불어넣어 검강을 기다랗게 만들었다. 늘어난 마나와 환골탈태한 그의 몸은 엄청난 속도로 이동했다.

    뭐가 번쩍인다 싶은 순간, 정천우의 몸은 어느새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헛! 모두 검을 뽑아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다크 기사단의 부단장이 고함을 질렀다.

    마교의 기사단원들이 당혹한 놀란 감정을 뒤로하고서 롱소드를 뽑았다. 자리에 앉았던 아미파의 기사들이 벌떡 일어나 롱소드를 덩달아 뽑아 들었다.

    “1조는 나와 함께 저놈을 공겨억…….”

    다크 기사단의 부단장이 명령을 내리고 고개를 돌리려다가 말을 잇지 못했다.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고는 세상이 기울어졌다.

    단지 기울어진 것뿐이라면 다행이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기이한 현상에 다크 기사단의 부단장이 눈을 크게 떴다. 빙글거리며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 목을 잃은 기사가 있었다.

    가슴에 ‘Dark II’라는 문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갑옷이었다. 다크 기사단의 넘버 2가 자신이었으니까 말이다.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다크 기사단의 부단장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필사적으로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려 했지만 그의 머리통이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강한 충격이 왔다. 그것을 끝으로 그의 의식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앗!”

    “이게 어떻게…….”

    아미파의 기사들은 뒤로 물러나면서 경악성을 토했다.

    마교 기사들의 목이 기다렸다는 듯 차례로 떨어졌다. 그와 함께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뜨끈한 핏물이 쏟아져 나와 갑옷을 적시자 아미파의 기사들은 놀란 와중에도 몸을 피했다.

    살인에 익숙한 그들이었지만 죽은 사람의 피를 뒤집어쓰는 것이 기분 좋지는 않았던 까닭이다.

    텅, 터더덩, 터덩…….

    마교의 기사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머리를 잃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정천우가 작정하고 기습한 탓에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단장을 잃은 충격과 정천우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것에 경악한 틈을 노린 결과였다.

    만약 마교의 기사들이 조금이라도 방비하고 있었다면 100명에 이르는 기사들을 이렇듯 쉽게 처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 시체들 사이에는 남궁세가에서 나온 몇 명의 기사와 남궁성환이 끼어 있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답시고 출정했으나 정작 롱소드를 손에 쥐어 보지도 못하고 목이 잘렸다.

    “싸움은 끝났습니다. 모두 돌아가서 쉬도록 합시다.”

    정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는 역천검을 검집에 넣었다.

    아미파의 기사들은 쓰러진 마교의 기사들과 정천우의 뒷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뭔가 번쩍한 것 같았는데 마교의 기사들이 하나같이 목을 잃고 쓰러졌다.

    사실 마교의 기사단을 완전히 신뢰하진 못했던 아미파의 기사들이었다. 그래서 최정예 기사들 100명을 꾸려 상대와 수를 맞췄다. 상대보다 많으면 의심받을 테고, 적으면 불리했기 때문이다.

    마교의 기사들과 마주하고 보니 자신들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딴마음을 먹으면 어쩌나 불안했었다.

    그런데 마교의 기사단장을 해치운 정천우가 순식간에 100명에 이르는 나머지 기사들까지 처리했으니…….

    “대체 맹주님의 실력은 어디까지인 걸까요?”

    “정진석 공작이 마스터라고 알려져 있지만 저렇게까지는 아닙니다. 지난번 결투에서도 우리 맹주님이 크게 밀리진 않았습니다. 아마 지금 다시 대결을 펼친다면 정진석 공작을 어렵지 않게 패배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주소용 후작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호위기사 단장인 주성애가 심각한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주소용 후작은 존경의 뜻을 담아 멀어져 가는 정천우의 등에 대고 가볍게 군례를 올렸다. 비록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청년이지만 까마득히 높은 경지에 올라선 이에게 보이는 예의였다.

    나머지 아미파의 기사들도 주소용 후작을 따라 걸어가는 정천우의 등에 대고 군례를 올렸다.

    그렇게 아미파의 기사들이 존경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제기랄…… 더 무식해졌어.”

    “귀병신, 앞으로 잘해라. 이젠 금제가 없어도 너보다 강할지 모른다.”

    “……젠장!”

    샤칼은 빙글거리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헤이먼에게 투덜거렸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반발할 수 없었다. 조금 전에 보여 주었던 정천우의 움직임은 엄청났다. 자신의 눈으로도 정천우의 움직임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몸이 길게 늘어지는 것 같더니, 어느새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 움직임을 발휘하는 정천우와 순수하게 정면 대결을 벌인다면…….

    “……좆나게 깨지겠지.”

    “뭐?”

    “몰라, 반 토막 새꺄!”

    샤칼은 신경질적으로 투덜대고는 정천우가 걸어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교의 기사들이 쏟아 낸 피비린내가 훅 밀려들었다. 샤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뜩이나 성질머리가 더러운 정천우가 실력까지 더 좋아졌다. 자칫 그 더러운 성질을 건드렸다가는 자신도 바닥에 쓰러진 마교 놈들처럼 언제 한 방에 훅 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겼다.

    물론 7서클 대마법사를 함부로 대할…… 아니, 최소한 죽이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

    마교 기사들이 탔던 전투마는 모두 회수되어 수레를 끌게 했다. 그들의 무기와 방어구는 빈 수레에 옮겨 담았다. 당장 쓸 수 있을 것 같은 할베르트는 필요한 사람에게 주었다.

    마교 기사단의 야습을 손쉽게 저지한 아미파의 군대는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자신들의 맹주로 추대된 정천우가 엄청난 실력을 지녔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홀로 100명이 넘는 기사단 하나를 해치웠다. 그것도 흉포하고도 강인한 마교의 기사단을 상대로 말이다.

    출발하기에 앞서서 마교 기사들이 죽은 모습을 확인하느라 병사들이 결투장을 확인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혼자서 기사단 하나를 박살 낸 사람이 자신들의 맹주라는 사실에 아미파의 병사들은 마음이 뿌듯했다. 행군하는 병사들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화산파 정도는 손쉽게 요리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 병사들의 앞에서 말을 탄 기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이루어 행군을 주도하는 중이다. 그 중앙에는 정천우가 말고삐를 쥐고서 천천히 말을 몰았다.

    옆에서 말 머리를 나란히 하며 묵묵히 전방을 바라보던 주소용 후작이 거리를 좁히면서 다가왔다.

    “맹주님, 이제 조금만 더 행군하면 화산파의 영역이에요. 이쯤에서 휴식을 취하고 병사들을 쉬게 한 다음에 진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북팽가와 시간을 맞춰야 하니, 그들과도 연락해야 하거든요.”

    “네, 주소용 후작님.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맹주님, 말씀을 편하게 해 주세요.”

    “그게 좀…….”

    정천우는 손가락으로 뒷머리를 긁으면서 말끝을 흐렸다.

    자기네들 멋대로 맹주 자리에 앉혀 놓았다. 그래 놓고는 편하게 대하라니…….

    자신보다 나이도 많은 데다가 작위까지 높은 사람들이다. 아무리 맹주가 되었다지만 쉽게 대하기가 어려웠다.

    “곤란하시다면 당장은 괜찮아요. 하지만 앞으로 사람이 모이면 지금처럼은 안 될 거예요.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확실하게 서열을 규정해 줘야 아랫사람들이 흔들리지 않는 법이지요.”

    “알겠습니다.”

    정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다. 자신이 원해서 맹주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이왕에 맹주가 되었으니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 동시에 명령이 떨어질 경우 아랫사람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선두 제자리!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 후에 화산파의 영역으로 진군한다. 각 지휘관은 병사들을 이끌고 휴식을 취하라!”

    주소용 후작이 마나를 담아 소리쳤다.

    그러자 병사들 사이에서 지휘관들이 튀어나와 병사들을 이끌고 흩어졌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경계조를 배치하고 나머지 병사들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앉았다.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사이, 정천우 역시 말에서 내려 휴식을 취했다. 그의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어제의 활약상 때문에 그를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워졌다.

    제인조차 그에게 다가오지 못할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더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덕분에 정천우는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스으읍…… 후우우…….

    정천우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단전의 마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운기할 순 없지만 점검하는 건 가능했다. 단전에 의식을 집중하고 혼원벽력신공의 구결에 따라 내공을 움직였다.

    순간, 정천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껏 운용하던 내공의 두 배가 넘는 양이 기혈을 타고 흐른다. 거대한 기운이 혈도를 따라 이동하면서 육체에 새로운 기운을 나누어 주는 느낌이었다.

    전신을 도는 내공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뇌전의 기운을 담은 혼원벽력신공이었기에 외부에서 이끌려 온 잡스러운 기운은 순식간에 동화되어 고스란히 내공이 되었다.

    과연 정파의 무공다웠다. 초반에는 지극히 진도가 느리다가 일정 수준에 올라서면 내공을 쌓는 게 빨라진다고 하더니 그게 정말이었다.

    순식간에 십이주천을 마친 정천우가 눈을 번쩍 떴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동자에서 금빛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단약까지 복용하면 더 많은 내공을 쌓을 수 있어.’

    정천우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혼원벽력신공을 운기하면서 대자연의 기운이 정수리를 타고 들어왔다. 성격이 다른 기운이었기에 동화하는 데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거대한 크기가 된 그의 내공은 순식간에 그것을 뇌전의 기운으로 바꾸었다.

    이런 식이라면 단약의 기운도 어렵지 않게 자신의 기운으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100년 내공을 완성한 상태였기에 더 많은 내공을 쌓아 봐야 위력적인 면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걸 그도 안다.

    하지만 다다익선이라고 했다. 많은 내공을 지니고 있다면 그만큼 더 오래 싸울 수 있다는 의미다.

    “이젠 해 볼 만하겠어.”

    정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정도라면 서대륙에 가서도 충분히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경지가 이제 그 옛날 하북팽가에서 왔다는 벽력대제에 거의 근접했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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