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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129화 (12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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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32. 전화위복(轉禍爲福) (4)

    아이작은 살기등등한 눈을 빛내며 크게 소리쳤다.

    우람한 덩치에서 절로 위압감이 느껴졌다. 살기를 드러내면서 시커먼 마기를 뿌려 대자 더욱 기괴한 분위기가 풍겼다. 마치 지옥에서 막 기어 나온 악마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천우는 상대의 분위기가 어떻든 관심 없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제길…… 장난하나.’

    정천우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목을 내놓고 싸워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일대일 결투라니, 참 한가한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들의 정서가 이렇다면 따르는 게 맞다.

    정천우가 역천검의 손잡이를 쥐고서 결투장 안으로 들어갔다.

    “네놈이 엑스타콘 경을 죽였다고?”

    아이작은 결투장에 들어온 정천우를 쳐다보면서 어이없다는 듯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기껏해야 이제 막 베테랑급에 오른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저런 놈에게 자신이 아끼는 부하가 목숨을 잃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가 아는 ‘슈발리에 드 엑스타콘’이라면 저런 실력의 애송이한테 목숨을 잃을 이유가 없다. 엑스타콘은 최후의 수단을 동원하면 거의 마스터에 육박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사였으니까 말이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아이작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정천우를 실눈으로 쳐다보다가 한마디 툭 내던졌다.

    저런 녀석한테 자신의 부하가 실력으로 패해 목숨을 잃었을 거라고는 상상이 가질 않았기 때문이다.

    “뭔 개소리야?”

    정천우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면서 역천검을 한차례 휘둘렀다. 싸우러 나온 놈이 개소리를 지껄여 대는 게 우습지도 않았다.

    긴말이 필요 없다. 누가 살아남느냐가 결투의 목적이다. 잡소리를 지껄일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집중하는 쪽이 유리하다.

    “훗, 그렇군! 직접 확인해 보면 될 일이야.”

    아이작은 피비린내가 묻어 나올 듯한 미소와 함께 바닥에 꽂은 클레이모어를 뽑았다.

    지이이잉!

    검은빛의 마나 쉐도우가 클레이모어의 검날을 타고 흘렀다.

    진동을 일으키던 마나 쉐도우가 점점 더 짙어졌다. 그러고는 마침내 뚜렷한 형상을 만들면서 위협적인 기운을 사방에 풍겼다.

    “……오러!”

    “마스터라니!”

    “맹주님이 위험해!”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아미파의 사람들이 사색이 되어 저마다 한마디씩 해 댔다.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기사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스터는 마스터만이 상대할 수 있다고들 한다. 사람들은 정천우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천우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애쓴다, 애써.”

    정천우가 비웃음을 날리면서 아이작을 향해 역천검을 겨누었다.

    검강이 아니다. 그저 검강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할 뿐이다. 진짜 검강이라면 저렇게 무식하게 내공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의 눈에는 아이작이 만들어 낸 오러 블레이드에서 기운이 새고 있는 게 보였다.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양이 아님에도 상대는 오만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도발적인 눈빛을 보냈다. 아마도 마스터라는 것을 뽐내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정천우로서는 아이작의 오러 블레이드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그를 비웃었다.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마나를 쏟아부어서 검강 비슷하게 보이는 것쯤은 자신도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큭! 객기를 부리는 것인가? 오늘 네놈은 반드시 죽는다!”

    “마음대로.”

    정천우는 아이작이 뭐라고 지껄이든 관심이 없었다.

    주둥이로는 뭐든 할 수 있다. 도발 축에도 끼지 못하는 수준의 말싸움은 굳이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지지직!

    정천우의 왼발이 땅바닥을 긁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는 완전하게 몸에 붙은 혼원벽력도법으로 아이작을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검 끝으로 상대를 겨누고, 두 손으로 검자루를 잡았다.

    “겁 없는 놈!”

    아이작이 눈을 부라리더니 이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흙더미가 뒤쪽으로 후두둑 휘날렸다. 아이작의 속도는 단순히 빠르다는 정도를 넘어섰다. 다리에 마나를 집중할 능력이 없다면 이런 움직임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래 봐야 정천우에게는 수준 낮은 속도에 불과할 뿐이다. 보법만을 위한 무공이 있는 세상에서 넘어온 정천우다. 아이작의 움직임은 그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쿵!

    정천우가 오른발을 앞으로 내뻗으면서 진각을 밟았다.

    입가에 닿을 듯 말 듯 붙여 두었던 역천검이 치켜 올랐다가 날카로운 파공성을 일으키면서 사선으로 공간을 갈랐다.

    역천검의 궤적에는 클레이모어가 있었다. 시커먼 빛깔의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클레이모어가 역천검을 박살 낼 기세로 들이받았다.

    쩡!

    고막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충돌음이 일어났다.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는 아미파의 사람들은 이를 악물었다. 정천우가 틀림없이 낭패를 당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충돌의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다.

    “오오오!”

    “밀리지 않아?”

    “대단해!”

    아미파의 기사들은 뜻밖의 광경에 놀라면서 감탄성을 흘렸다.

    무시무시한 오러 블레이드를 마나 쉐도우로 방어해 낸 정천우가 놀랍기 짝이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러 블레이드뿐이라고 알았던 기사들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충격을 받은 건 당사자인 아이작이었다.

    “이익! 어째서!”

    아이작은 정천우를 짓눌러 버릴 기세로 클레이모어에 힘을 주었다.

    쉽게 죽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던 정천우가 자신의 공격을 너무나도 수월하게 막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어째서는 무슨!”

    정천우는 억울한 표정을 짓는 아이작의 클레이모어를 힘껏 밀쳤다.

    스파크를 일으키면서 서로의 마나를 갉아 대던 두 개의 무기가 떨어지면서 듣기 싫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공간이 생겨났다 싶은 순간, 역천검이 꿈틀거렸다. 좌우 베기가 거의 동시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공간을 할퀴었다.

    자신의 오러 블레이드가 마나 쉐도우 따위에 막혔다는 충격에 빠졌던 아이작은 뜨악한 얼굴로 재빨리 클레이모어를 들었다.

    카강!

    끔찍한 충돌음과 함께 마나 파장이 주변에 퍼졌다.

    ‘큭! 고작 마나 쉐도우가 이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아이작은 손아귀가 저릿한 느낌에 속으로 놀랐다.

    자신의 부하인 슈발리에가 어째서 죽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마스터에 오른 자신도 이런 충격을 받았는데, 그보다 실력이 훨씬 떨어지는 슈발리에라면 죽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결과가 이렇다 해도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의 오러 블레이드를 마나 쉐도우로 막아 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오러 블레이드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나다. 겨우 마나 쉐도우에 가로막힐 것 같으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려고 버둥거린 게 바보 같은 짓이 되어 버린다.

    그건 참을 수 없다!

    “으아아아!”

    아이작이 비명처럼 기합을 내지르며 마구잡이로 클레이모어를 휘둘렀다. 그럼에도 정천우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 내고 있었다.

    혼원벽력도법을 빌려 뇌전의 기운을 품은 역천검이 마구 날뛰었다. 아이작이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금방이라도 피를 빨아낼 것같이 흉흉한 공격이었다.

    정천우는 지금 일월섬전(日月閃電)의 초식을 무한히 반복하는 중이다. 틀에 갇히지 않은 유연한 초식이었기에 반복에 반복을 한다고 해도 같은 초식이라는 것을 상대가 눈치채지 못했다.

    점점 강해지는 압력에 아이작은 절망감에 빠져들기 일보 직전이었다. 설마 자신보다 수준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정천우에게 이렇게까지 밀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응? 이 자식들이?’

    공격 일변도로 아이작을 압도하던 정천우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사방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이 우습지도 않은 결투를 신성한 의식처럼 대하던 마교의 놈들이었다. 그런데 아이작이 불리한 지경에 처하자 은은하게 살기를 드러내면서 자신을 위협한다.

    말과 행동이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빨리 해치우고 다 조지겠어!’

    정천우의 눈에 짙은 살기가 스며 나왔다.

    처음부터 봐줄 생각은 없었지만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다. 아이작만 처치하는 게 아니라 남은 놈들까지 한꺼번에 처치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자신들이 한 말을 책임도 못 지는 놈들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뒤끝을 남기는 짓 따위는 물러터진 생각이다.

    “차아압!”

    정천우가 벼락과도 같은 기합성을 지르면서 역천검을 휘저었다.

    여섯 번의 빠른 베기!

    혼원벽력도법의 제육초식, 육섬뢰(六閃雷)!

    누런빛이 번쩍이면서 아이작의 전신을 사납게 휘몰아쳤다.

    카가강, 캉! 카강!

    “죽엇!”

    여섯 개의 방위를 일순간에 몰아친 정천우가 살기를 흘리면서 소리쳤다.

    살기에 물든 외침과 동시에 머리 위로 치켜든 역천검이 싯누런 빛을 뿌리면서 공간을 갈랐다.

    “치잇!”

    아이작은 너덜거리는 두 팔로 클레이모어를 힘겹게 쥐고 머리 위로 올렸다.

    콰앙!

    “커억! 푸흡…….”

    머리 위로 들어 올린 클레이모어에 가해진 충격으로 아이작의 입에서 피 분수가 튀었다. 견디기 어려운 충격에 한쪽 무릎이 꺾이면서 주저앉고 말았다.

    아이작의 입장에서는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교의 기사로 성장해서 이날 이때까지 교주를 제외하고는 누구 앞에서도 무릎을 꿇은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이를 부드득 갈면서 상대를 노려보는 와중에도 역천검이 전하는 압력이 더욱 무거워졌다.

    ‘이, 이렇게까지 강하다니!’

    아이작의 얼굴이 고통과 함께 경악으로 물들었다.

    내장이 뒤집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전신이 부서지는 충격에 마나까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이대로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

    “으아아아!”

    아이작은 몸 안에 남은 힘을 터트리면서 클레이모어를 잡은 손에 마나를 터트렸다.

    찰나의 시간에 몇 배나 응축된 마나가 팔에 응집되고 말았다. 역천검을 순간적으로 밀어내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팔뚝을 타고 흐르는 혈관이 일제히 터지고 말았다.

    “이런 미친노…… 응? 무슨 개수작이야?”

    정천우는 상대의 황당한 행동에 헛웃음을 터트리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작의 행동은 그만큼 황당했다.

    공격한 것도 뭣도 아니다. 그저 너덜너덜하게 피투성이로 변한 손바닥으로 자신의 팔목을 쥐었을 뿐이다. 힘도 쓰지 못할 것 같은 손으로 자신의 팔목을 붙든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더 괴이한 것은 결투를 지켜보는 나머지 마교의 기사들이었다. 이제까지 흉포하게 흘려 대던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정천우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의문이 더욱 깊어졌다.

    대체 아이작은 자신의 팔목을 왜 붙들었고, 마교의 기사들은 어째서 승리자의 미소를 짓는지.

    꺼림칙한 느낌을 받은 정천우가 아이작의 손을 떼어 내고 다시 공격을 이어 가려고 했다. 찜찜할 때 그저 빨리 상대를 해치워 버리는 게 여러모로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했다.

    “무, 무슨! 어째서!”

    정천우가 당혹성을 흘렸다.

    자신의 팔목을 움켜쥔 아이작의 손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의 손을 떼어 내려고 가져다 댄 왼손까지 그의 손에 들러붙었다.

    괴이한 상황에 정천우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어 아이작을 쳐다보았다.

    “크흐흐흐…… 걸려들었다!”

    아이작이 핏물로 얼룩진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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