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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126화 (12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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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32. 전화위복(轉禍爲福) (1)

    [지금…… 뭐라고 했는가?]

    수정구 속의 정진석 공작은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정천우는 당당하기만 했다.

    오히려 냉기가 철철 흐르는 얼굴로 정진석 공작을 노려보았다. 눈앞에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때려죽일 듯한 표정이었다.

    “이 새끼가 귓구멍에 좆을 박았나…… 너 새꺄, 개새끼라고! 뭐? 확인되지 않은 정보라 굳이 얘기하지 않았어?”

    [자네, 말을 함부로 하는군.]

    “까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넌 확인됐어. 그러니까 얘기해 줄게.”

    애써 화를 참으면서 얼굴을 붉히는 정진석 공작에게 정천우가 말을 하다가 중간에서 끊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가?]

    정진석 공작은 수정구 속에서 태연한 척하면서 물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아미파의 수뇌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기에 평소의 인자하고 대범한 모습을 연기하는 것이다.

    “너, 정말 개새끼야. 굳이 말하고 싶진 않았는데 확인된 정보라 어쩔 수 없다. 씨발 새꺄! 재수 없는 면상 꼴도 보기 싫으니까 통신 끊는다.”

    [뭐? 이노옴! 감히 무림맹주인 내게 그런 망발이라니! 정녕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인가! 아미파를 믿고 까부는 #!$#%#$^……!]

    정진석 공작이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쉼 없이 떠들어 대는데 나름 점잖게 하는 욕이라도 내용이 협박에 가까웠다.

    하지만 수뇌부 사람들을 분노케 하기에는 충분한 내용이었다.

    정천우가 쓰게 입맛을 다시면서 아미파의 마법사 에쉴을 쳐다보았다.

    “에쉴 마법사님, 분위기 좀 맞춰 주십시오. 제가 끊는다고 했으면 끊어 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저 미친 영감쟁이가 지껄이는 게 그렇게 듣고 싶었습니까?”

    “그, 그게…… 영주님께서 명령을 내리지 않으셔서 제가 함부로 통신을 끊기가…….”

    [뭣? 미친 영감쟁이? 이런 #=$$%^$+#……!]

    수정구 속의 정진석 공작이 광분해서 소리쳤다.

    미친 영감쟁이라는 말이 더 열 받는 모양이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근접하면서 나름 동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부정당하는 것이 더 기분 나빠하는 것 같았다.

    “에쉴, 통신 끊어요.”

    “네, 영주님.”

    주소용 후작이 냉기가 뚝뚝 떨어질 듯한 얼굴로 명령하자 에쉴 마법사가 마나 공급을 중단했다.

    그제야 정진석 공작의 꽥꽥거리는 소리가 사라졌다. 대신에 수뇌부가 모인 천막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충격적인 얘기를 연달아 들은 탓이다.

    정천우가 대놓고 욕을 할 때는 경악했다.

    하지만 정진석 공작이 아미파와 정천우를 싸잡아서 지껄인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정천우의 막말에 화가 나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홧김에 그런 것인지는 모른다. 확실한 것은 정진석 공작이 아미파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게 아미파의 사람들을 심각하게 만들었다.

    특히 주소용 후작이 받은 정신적인 충격은 심각했다. 사적으로는 외삼촌이다. 조카가 영주로 있는 아미파를 헌신짝처럼 취급하는 것에 마음이 상했다.

    비록 그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한 일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잘못했다고 할지라도 혈연으로 묶인 관계인데 말이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던 주소용 후작이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아…….”

    그녀가 탄성을 흘리자 천막 안에 모인 수뇌부 사람들과 정천우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씨발, 이거 재수 없으면 독박 쓰는 거 아니야?’

    정천우는 주소용이 자신을 쳐다보자 뜨끔했다.

    홧김에 사고 쳤다. 막말해 놓고 나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간이 조마조마했다.

    아미파의 수뇌부들을 해치우고 몸을 빼내야 하는가 마는가의 기로에 선 것이다.

    만약 아미파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무조건 튀는 게 맞다. 그런 뒤에 하북팽가에 합류해야 한다.

    문제는 수뇌부를 해치운 다음이다.

    500명으로 기사와 수가 줄긴 했지만 9천에 이르는 병사를 뚫어내고 도주해야 하는 상황이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소용 후작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이미 곁에 선 샤칼과 헤이먼에게 전음을 보냈다. 여차하면 튀어야 하니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그들 역시 주소용 후작의 시선이 닿자 저마다 긴장하고 말았다.

    하지만 주소용 후작의 눈빛에서 묻어나는 체념의 기색을 읽은 정천우는 길게 한숨을 터트렸다.

    ‘싸울 일은 없겠어.’

    싸우려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 주소용 후작의 눈빛이 정천우를 안심시켰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다.

    무림맹주와 대등하게 싸웠던 정천우와 7서클의 대마법사, 그리고 용맹하기로 소문난 드워프 전사가 함께 있다. 아미파의 수뇌부가 모조리 덤벼도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으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이미 마음이 돌아선 정진석 공작이었기에 그녀로서는 선택의 여지조차 없는 일이 되었다. 씁쓸한 얼굴로 남몰래 한숨을 내쉰 그녀는 정천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맹주께서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미파의 수뇌부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행동하는 수뇌부의 모습에 정천우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주소용 후작은 정천우가 어떻게 생각하는 것에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저 역시 전설의 계승자가 이번 전쟁을 이끄는 게 맞다고 주장했어요. 맹주께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그분께서 이렇게 변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주소용 후작은 한층 어두워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권력이라는 게 사람을 망친다는 건 알았지만 그녀의 외삼촌인 정진석 공작이 그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

    기사는 일신의 영광보다 자신을 채찍질하고 실력 향상에 힘써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권력에 취해서 혈연으로 묶인 인연까지 매몰차게 끊을 줄은 몰랐다.

    주소용 후작이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그런 이유다.

    “그러셨군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주소용 후작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 생각은 없습니다.”

    정천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미 없는 감투 따윈 그가 바라는 게 아니다. 강해져서 서대륙으로 넘어가, 키아벨리아스라는 드래곤을 만나는 게 그의 목표다. 욕심 때문에 벌어지는 전쟁을 이끌 마음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 정천우의 바람과 달리 주소용 백작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환하게 웃었다.

    “맹주의 뜻대로 하소서.”

    주소용 후작이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나머지 아미파의 수뇌부 사람들도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맹주의 뜻대로 하소서!”

    미리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수뇌부 사람들은 주소용 후작의 선창에 따라 크게 소리쳤다.

    ***

    남궁세가.

    아미파와 결전을 벌이고 이끌고 간 병력을 모두 잃은 그들의 영주 집무실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결사항전을 외치다가 호위기사의 손에 기절한 채로 몸을 빼낸 남궁성환은 흉포한 기운을 풍겨 대는 건장한 체구의 사내 앞에 서 있었다.

    남궁성환 앞에 선 사내의 전신에서는 끈적끈적하고도 난폭한 기운이 은연중에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습한 기운만 아니라면 기사들의 표본이라고 보아도 될 만큼 강인한 모습이었다.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님의 복수를 도와주십시오.”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남궁성환이 비통한 목소리로 간청했다. 그의 입장에서 믿을 건 자신을 오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눈앞의 사내뿐이었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번 아미파와 벌인 전쟁에서도 그와 함께 출정했다면 이렇듯 처참한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궁성환의 아버지인 남궁기정이 그의 출정을 말렸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는 없다는 게 이유였다.

    실제로 남궁세가의 힘을 보여 주고 더욱 많은 이득을 끌어내는 선에서 그칠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대로 일은 진행되지 않았고, 오히려 치명적인 전력 손실을 가져왔다.

    이제 눈앞의 사내가 아니라면 남궁세가는 끝장이다.

    아니, 이미 끝장난 상태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눈앞의 남자가 마음만 먹으면 남궁세가는 이자들의 손에 넘어간다. 자신과 살아남은 기사들로는 이들을 상대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훗…… 재미있군. 그러니까 네 녀석의 말은 애비의 원수를 갚아 달라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남궁성환은 순간 울컥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에게 예의를 지키던 사내다. 그러나 기사단과 병력을 다 잃은 지금은 아랫사람을 대하듯 하고 있다.

    완벽한 무시.

    사람을 발아래로 놓고 보는 듯한 사내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지만 그렇다고 발작할 정도로 남궁성환이 멍청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주제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전사했을 때, 자신은 멍청하고 멍청한 명령을 내렸다. 그 때문에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 참아야만 했다. 잔존 병력을 이끌고 다음을 노렸어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눈이 뒤집혀 치명적인 미친 명령을 내렸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의미가 없는 일이지만 같은 일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네 복수를 도와주면 내게 떨어지는 이득은 무엇이지?”

    “남궁세가를 바치겠습니다.”

    “큭…… 뭔가 심하게 착각하고 있군. 남궁세가가 아직도 너의 것이라고 생각하나? 재미있는 농담이었다.”

    사내는 비틀린 웃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남궁세가는 벌써 자신의 손에 들어온 상태다.

    남궁성환의 존재는 오히려 걸림돌이다. 차라리 죽여 버리고 남궁세가를 통째로 가로채는 편이 훨씬 더 쉽다. 귀찮게 그의 복수를 도와주는 것보다 몇 배나 더 간단한 일이다.

    “역천검의 주인이 있습니다.”

    “역천검?”

    사내는 그제야 흥미롭다는 듯 반응을 보였다.

    남궁성환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내가 혹할 만한 얘기를 꺼낸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전신에 뇌전의 샤벨타이거를 마나 쉐도우로 만들어 내면서 자신의 아버지와 정예기사단을 손쉽게 썰어 대던 적의 모습이…….

    자신의 능력으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반드시 복수하고 싶었다. 눈앞의 사내라면 그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자신과 아버지를 비롯한 남궁세가의 실력자 세 명이 한꺼번에 덤볐어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을 만큼 대단한 실력자였으니까 말이다.

    이런 사람이 자신의 복수를 도와준다면 어렵지 않게 복수를 끝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내의 마음이 돌아선 것을 확인한 순간, 남궁성환은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그렇습니다. 역천검을 가졌습니다. 그를 해치워 주신다면 저는 아이작 드 크림슨 백작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역천검을 가졌다는 놈이 하북팽가의 인물인가?”

    “그렇습니다. 호위대로 같이 왔다고 합니다.”

    남궁성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들었던 기억을 되살려 대답한 것이다.

    아미파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가 정천우라는 인물 때문이었다.

    결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흐음…….”

    사내…… 그러니까 아이작 드 크림슨 백작은 침음을 흘리면서 까칠하게 돋아난 자신의 턱수염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흑룡조장을 해치운 놈이 근처에서 알짱거리고 있다는 건가? 재미있군! 좋다. 네놈을 도와주기로 하지.”

    아이작이 눈에 살기를 띄우면서 흉성이 묻어나는 미소를 입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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