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Chapter 31. 단지 말하지 않았을 뿐 (1)
“으으으…… 이건 악몽이야!”
“이길 수 없어! 으으으…….”
아미파의 병사들은 흐느적거리면서 다가오는 좀비들을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뭣들 하느냐! 장전! 재장전하라!”
주소용 후작이 마나를 담아 소리쳤다.
비록 효과가 없을지라도 일단 할 수 있는 건 해 봐야만 한다. 그런데 자신의 병사들이 허둥대고만 있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기사들이 굳건히 버티는 게 그나마 주소용 후작에게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
흉측한 몰골로 다가오는 좀비들은 그녀에게도 역겹고 두려웠다. 특히나 좀비들의 가장 뒤쪽에 웅크린 거대한 살덩어리는 그녀를 질리게 했다.
주소용 후작이 병사들을 독려하며 명령을 내리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정천우는 마법사들을 뒤로 물렸다.
마나를 박박 긁어 쓴 탓에 마법사들의 얼굴이 퍼렇게 질려 있었다. 다가오는 좀비의 모습을 발견한 때문인지도 몰랐다.
“저런 건 어떻게 처리하라는 거야?”
정천우는 좀비들이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다가오는 것보다 그 뒤쪽에 웬만한 이층집보다 크게 뭉쳐 있는 살덩이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꿈틀거리는 것으로 보아 분명 생명체가 확실하다. 저런 게 일어나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단장님, 저건 사이클롭스라는 몬스터입니다. 아니, 몬스터라기보다는 마물에 가깝습니다.”
“마물?”
“네, 마계의 존재라고 알려진 놈입니다. 이 좀비들도 아마 저놈이 조종하고 있을 겁니다.”
“저놈이?”
정천우는 헤이먼의 설명을 들으며 놀라워했다.
저런 거대한 살덩이가 이렇게 많은 생명체를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런 덩치로 이렇게 쪼잔한 짓을 할 수 있다는 게 짜증스러웠다.
“눈은 하나지만 대신 머리가 큽니다.”
“쉽게 말해! 저놈만 죽이면 된다는 뜻이야?”
“어렵게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놈만 죽이면 끝납니다.”
“좋아! 저 덩어리 약점은 뭐야?”
정천우는 한 놈만 죽이면 된다는 생각에 희망을 가지고 물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헤이먼의 대답은 그를 절망시켰다.
“한 뼘 두께의 피부를 뚫고, 이 정도쯤 되는 두께의 두개골을 부수고, 그 안에 든 푸딩을 휘저으면 됩니다.”
헤이먼은 대략 40센티미터는 될 정도로 두 손의 간격을 벌리며 말했다.
“나하고 농담하자는 거야?”
정천우는 괴물의 두개골 두께가 웬만한 성문 정도라는 소리에 반쯤 맛이 갔다.
그런 엄청난 두께의 두개골을 뚫기 위해선 얼마만큼의 힘이 필요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방법이 없잖습니까? 놈을 죽이는 수밖에요.”
헤이먼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느릿하게 다가오는 좀비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정천우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의 말대로다. 이성이 없는 이들이 항복 따위를 할 리가 없다. 결국은 모두 해치우든지, 좀비를 조종하는 몬스터를 죽이든지, 둘 중 하나다.
정천우의 선택은 당연히 후자였다.
이렇게 많은 좀비를 죽이려다가는 언제 상황이 끝날지 예측할 수 없다. 머리를 파괴해야만 숨이 끊어지는 존재와 싸우는 건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 될 테니까.
병사들은 겁에 질려 있고, 몬스터가 포함된 좀비가 달려드는 상황. 그런 와중에 저 거대한 마물이 합세한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제길! 샤벨타이거 기사단은 준비하라! 샤칼!”
정천우는 크게 명령을 내리고 마지막으로 샤칼에게 고개를 돌렸다.
“괜찮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숨을 헐떡이던 샤칼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시간에 마나를 심하게 소모했지만 아직은 견딜 만했다. 7서클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전보다 여유가 있었다.
“좋아! 그럼 샤칼은 합류하고 제인 마법사님은 아미파의 마법사들과 마차를 타고 대피하십시오!”
“저도 따라갈…….”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잖습니까! 지금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알았어요.”
제인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먹을 꼭 쥐었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지나친 마법 사용으로 마나가 고갈되었다. 그러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와 같이 가고 싶었다. 무모하게 사이클롭스와 싸우러 떠나는 정천우를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지막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하지만 정천우의 굳은 얼굴을 보고는 고집을 피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마차에 올라 아미파의 마법사들 사이에 앉고는 전력으로 마나 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조금이라도 마나를 회복해 그를 돕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그런 제인을 바라보면서 정천우의 눈에 애잔한 감정이 드러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녀의 마음은 알지만, 지금은 싸워야 할 때다.
남들은 무모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최선의 방법이다.
현재 이곳에서 가장 강한 사람을 꼽으라면 자신과 주소용 후작이다. 그러나 주소용 후작은 군대를 지휘해야 한다. 게다가 정천우보다 한참이나 수준이 떨어진다.
선택의 여지 따위는 거론할 가치가 없는 일이었다.
‘한다! 무조건 한다!’
정천우는 거대한 덩어리를 노려보며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서대륙에는 저런 놈들이 득실거린다고 했다. 아니, 저런 놈들보다 훨씬 더 위험한 놈들이 도사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이름부터 섬뜩하게도 암흑 산맥이라고 했으니까!
여기서 도망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자신의 역량을 시험할 기회이기도 하다.
정천우는 내공을 끌어올리고 역천검을 창대에 꽂았다. 저런 흉악한 괴물을 상대하기에는 세이버보다 역천검이 더 믿음이 갔기 때문이다.
“마음 단단히 먹어라!”
“자, 잠깐!”
정천우가 역천검을 끼운 창을 들며 소리치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소리치면서 다가왔다.
“왜?”
“이건 좀 아니잖아! 우리가 왜 저 무지막지한 놈이랑 싸워야 하는 건데?”
제럴드가 퍼렇게 질린 얼굴로 사이클롭스를 가리켰다.
그는 말도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처럼 엄청난 덩치의 괴물을 창으로 찔러 봐야 별다른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정천우가 요즘 들어 실력이 늘었다지만 이건 무모한 짓이다.
그것도 수많은 좀비 괴물들을 헤치고 나가면서까지 왜 싸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겁나면 넌 빠져!”
“그, 그래도 돼?”
“마음대로 해! 대신에 너하고는 이제 인연 끝이다.”
정천우는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싸움이다. 하나가 빠지면 다른 사람도 빠지고 싶어 할 게 분명하다. 그래선 곤란하다.
사이클롭스가 있는 곳까지 뚫고 가려면 혼자는 무리다. 샤벨타이거 기사단의 도움이 없다면 이 싸움은 해보나 마나다.
체력을 최대한 아끼면서 싸움을 시작해도 모자랄 판이다. 좀비들과 싸우면서 전진하다가 정작 사이클롭스와의 대결에서 제 기량을 다 발휘하지 못하면 그저 자살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때였다면 제럴드가 빠지는 걸 막지는 않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모두의 힘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
정천우가 다시 한 번 역천검이 장착된 창을 높이 들었다.
“목표는 사이클롭스! 돌격!”
창날에 마나 쉐도우를 일으킨 정천우가 힘찬 고함과 함께 말의 배를 걷어찼다.
“썅!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빠지냐! 끼랴앗!”
제럴드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도망치지 않고 말을 출발시켰다.
100명에 이르는 기사들이 마나 쉐도우가 맺힌 창을 한 손에 쥐고 일제히 튀어 나갔다. 다가오는 좀비 괴물들을 향해 괴성을 지르며 달리면서도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의 표정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저 명령에 따를 뿐.
정천우가 시키면 그대로 따른다!
이제껏 받아 온 훈련은 샤벨타이거 기사단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명령을 거스를 때마다 쏟아지는 지옥 같은 훈련과 구타에 기사단원들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달렸다.
이제까지 쌓아 온 기억으로는 사이클롭스보다 정천우가 더 끔찍했으니까.
“크워어억!”
“크룩! 커허헝!”
샤벨타이거 기사단이 살기를 뿜으며 다가오자 좀비들이 이를 드러냈다. 이성을 잃고 있어도 어쨌든 반쯤은 살아 있는 존재다.
싯누런 이를 드러내는 오크와 오우거는 샤벨타이거 기사단과 정천우가 다가오자 큼지막한 몽둥이를 휘둘렀다.
서겅!
“크롹?”
정천우의 역천검이 번쩍인다 싶은 순간, 오우거의 몽둥이가 한 방에 잘렸다.
어른의 허리 굵기만 한 몽둥이가 맥없이 잘려 나가자 오우거가 휘청거렸다. 갑자기 무게가 줄어들면서 균형을 잃은 것이다.
그런 오우거의 목을 헤이먼의 워엑스가 훑고 지나갔다. 엄청난 양의 핏물이 왈칵 튀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정천우를 중심으로 좀비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마나 쉐도우를 품은 역천검의 검날이 좀비가 된 인간과 몬스터를 손쉽게 처리했다. 정천우를 향해 덤비려던 좀비들은 좌우를 받치는 헤이먼과 잭슨에게 썰렸다.
선두의 3명이 틈을 벌리고 그 뒤를 따르는 다른 기사들이 확실하게 좀비들을 좌우로 밀어냈다.
“멈추면 죽는다! 후미는 좀비들이 쫓아오지 못하게 견제만 하라! 이탈하면 죽는다!”
정천우가 누런 이를 드러내면서 육탄 공세를 벌이는 트롤의 머리통을 창날로 쪼개며 크게 소리쳤다.
날카로운 고함에 기사들이 긴장의 끈을 더욱 바짝 조였다. 정천우를 비롯한 선두의 3명이 휘저어 주지 않았다면 벌써 파탄을 드러냈을 것이다.
서로가 하나다.
뒤를 받쳐 주지 못하면 선두가 아무리 잘 싸워 준다고 해도 고립될 위험성이 있다.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 줘야 앞서 달리는 3명도 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창날이 틀어박히듯이 인간 좀비와 몬스터 좀비들을 꿰뚫고 들어갔다. 정천우의 돌파력이 확실한 효과를 발휘하는 중이었다. 그가 창을 휘두를 때마다 팔다리가 후두둑 잘려 허공을 날았다.
확실하게 목을 잘라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진격 속도가 줄어들 게 뻔했다. 어차피 사이클롭스만 해치우면 끝날 일이기에 빠르게 목표 지점까지 가는 게 중요하다.
좀비의 숫자는 얼추 3만 5천 정도.
아미파 전력의 세 배가 넘는 숫자다.
하지만 샤벨타이거 기사단이 3만 5천을 모두 상대해야 하는 게 아니다. 그저 가장 숫자가 적은 좀비의 벽을 뚫고 들어가면 된다.
“목표가 멀지 않았다. 승리의 함성을 질러라! 으아아아!”
정천우가 콧김을 뿜으면서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는 미노타우르스의 머리를 날리고는 크게 소리쳤다.
“으아아아!”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은 악을 쓰면서 창을 휘둘렀다.
주변이 온통 몬스터다.
죽여도 죽여도 계속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몬스터에 질려 가던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기사단장의 외침이 들려왔다.
힘이 솟았다.
자신들이 모시는 단장은 악랄하다. 하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이 끔찍한 돌격의 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일단은 기분 좋았다.
단장이 내린 명령을 충실히 끝낼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이었다.
“그르릉…… 나와…… 싸우겠다는 것인가?”
이제껏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며 싸움을 지켜보던 사이클롭스가 재미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인간 기사 몇 명이 무리를 이루어 자신에게 달려오기에 일부러 좀비화된 몬스터를 더 집중시켰다. 그런데도 인간 기사들은 무작정 뚫고 들어왔다.
아무리 멍청한 좀비들이라고 해도 흉포성만큼은 엄청나다. 속도가 느려진 대신에 근력과 방어력이 높아져 부하로 써먹기에 제격이다.
그런데 고작 인간 따위가 강화시킨 자신의 부하들을 마구 썰어 대면서 다가오자 의외였다.
놀랍지는 않았다. 가끔 이런 인간들도 있다. 자신만 해치우면 좀비들이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질 거라 믿는 인간들 말이다.
그 믿음이 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껏 자신을 쓰러뜨린 인간은 없었다. 인간 세상의 마스터급 실력자가 아니면 위협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사이클롭스는 마스터가 나타나면 미련 없이 후퇴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이클롭스는 다가오는 인간의 기사 중에 마스터급 실력자가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고는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5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키와 덩치.
그가 일어서는 순간, 푸른색의 거대한 탑이 갑자기 생겨난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사이클롭스가 상체를 숙이며 입을 크게 벌렸다.
“그워어어어어어!”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사이클롭스의 입을 통해 사방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