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21화 (121/200)
  • # 121

    Chapter 30. 전쟁의 서막 (3)

    정천우는 심각한 얼굴로 대답하고는 눈에 내공을 더욱 집중시켰다.

    ‘부자연스러워.’

    너무 멀어서 자세히 살필 수는 없었지만 몰려든 적들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천우 경, 정말 2만 명 이상의 병력이 집결해 있는 건가요?”

    주소용 후작은 조금은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당황하는 기색은 없었다. 남궁세가의 주전력을 지난번 전투에서 격파한 상태이기에 위협이 될 수 없다는 계산에서다. 기껏해야 영지 주변의 마을에서 어중이떠중이 모아다가 급조한 병력일 게 분명했으니까.

    문제는 숫자다.

    아무리 급조한 병력이라고 할지라도 두 배에 이르는 숫자는 무시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천우를 바라보는 주소용 후작의 얼굴이 걱정에 물든 이유는 바로 그런 이유였다.

    “네! 정확하진 않지만, 우리보다 수가 많은 건 확실합니다.”

    “알았어요. 그럼 전투를 준비하라 지시하겠어요. 천우 경도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정천우가 나직하게 대답하고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전방에 적이 있다. 힘을 아끼면서 전진하되 공격에 대비하라!”

    그가 등을 보이기가 무섭게 주소용 후작의 낭랑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정천우가 샤벨타이거 기사단으로 돌아오자 헤이먼이 다가왔다.

    “단장님, 무슨 일입니까?”

    “저기 협곡 보이지?”

    헤이먼이 궁금증을 드러내자 정천우가 손을 내밀어 대략 5킬로미터 전방에 보이는 협곡을 가리켰다.

    협곡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양쪽 곡벽의 사이가 넓지만 어쨌든 형태는 협곡이 맞았다. 중앙으로 이동하면 매복을 하더라도 공격이 쉽지 않아, 주소용 후작이 선택한 이동로였다.

    정천우의 손을 따라 협곡을 바라본 헤이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흙먼지 때문에 적의 모습이 가려진 탓이다.

    “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샤칼! 제인 마법사님!”

    정천우는 간단하게 설명하고는 샤벨타이거 기사단에 소속된 마법사를 불렀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천우 경, 무슨 일이에요?”

    제인과 샤칼은 자신들의 이름이 불리기가 무섭게 정천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정천우는 협곡을 가리켰다.

    헤이먼에게 말하다 말고 두 사람을 부른 것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저기 협곡에 적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광역 마법을 준비해 주시면 효과가 좋을 듯합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묘해서 말입니다.”

    원래라면 샤칼에게 아무렇게나 말했을 테지만 제인이 있어 조금은 상냥하게 명령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네, 샤칼 님과 함께 준비하도록 할게요.”

    두 사람은 정천우의 명령을 받고는 뒤로 물러났다. 7서클 마법과 5서클 마법으로 펼칠 수 있는 가장 위력적인 조합을 찾으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뒤로 물러나기가 무섭게 정천우가 상체를 뒤로 틀면서 샤벨타이거 기사단에 명령을 내렸다.

    “샤벨타이거 기사단은 들어라! 전방에서 적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 샤벨타이거 기사단은 마법 지원을 받은 후에 돌격하기로 한다. 전멸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적을 도망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은 힘차게 대답하면서 말안장에 걸어 놓은 창을 들었다.

    아직 거리가 있지만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다. 전투란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협곡에 다가갈수록 흙먼지가 점점 더 심해졌다.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지만 바람에 흙먼지가 날려 주변을 뿌옇게 흐려 놓았다.

    이러니 멀리서는 적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제길! 저건!”

    남들은 아직도 적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정천우의 눈에는 확실하게 보였다.

    실혼인(失魂人).

    중원에서 보았던 실혼인의 모습과 흡사하다.

    이렇게 흙먼지가 날리는 데도 입을 헤벌린 채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누구 하나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눈에 초점이 없다.

    “주인님, 왜 그러십니까?”

    “네가 한번 봐! 눈 좋아지는 마법이 있다며?”

    “알겠습니다. ЁбДЙЭб…… 이글 아이(Eagle eye)!”

    샤칼이 곧바로 마법을 사용해 전방을 주시했다. 그러고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좀비!”

    “좀비?”

    “네! 주인님, 저것들은 좀비라고 부르는 것들입니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모호한 경계에 있는 놈들입니다.”

    “저것들도 혹시 감정이 없는 거냐?”

    정천우는 중원의 실혼인을 떠올리며 물었다.

    사실 실혼인 따위는 두려운 게 아니다. 그래 봐야 일반인 수준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무인을 실혼인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저 조금 더 힘이 좋은 실혼인일 뿐이니까.

    다만, 한 가지 경우에 실혼인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바로 숫자가 엄청나게 많을 때다.

    겁이 없으니 무작정 달려든다. 일반적인 사람과 달리 망설임이 없다. 워낙 살기가 짙어 감각에 의존했다가는 봉변당하기 십상이다.

    그 모든 게 감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두려움도 아픔도 모른다. 팔다리가 잘려도 기어이 상대에게 다가가 물어뜯기라도 하는 게 실혼인이다.

    좀비라는 게 중원의 실혼인과 비슷한 놈들이라면 지금 상황은 심각한 거였다.

    “맞습니다. 저것들은 이빨에 독을 품고 있어서 물리면 상처가 쉽게 낫지 않고 살이 썩기도 합니다.”

    “빌어먹을! 해치울 방법은?”

    “완전하게 무력화시키거나 머리를 부숴야 합니다.”

    “실혼인과 똑같군!”

    “네?”

    정천우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대는 모습에 샤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런 게 있어. 넌 어떤 마법을 사용할지 그거나 고민해. 난 주소용 후작님께 가 볼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샤칼은 말 머리를 돌려 제인을 향했다.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마법을 바꿔야 했다.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늦기 전에 서둘러 준비해야 한다.

    ‘저 무식한 인간이 또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몰라!’

    샤칼의 속마음은 그랬다. 또 헤이먼과 비교당하고 싶진 않았다.

    헤이먼에게는 단장님이라고 부르라면서 자신에게는 주인님이라 부르라고 한 인간이다. 가뜩이나 굴욕적인 대우를 받는 마당에 더 우울해질 순 없었다.

    샤칼이 제인에게 다가가 마법의 위력을 극대화할 방법을 찾는 사이, 정천우는 주소용 후작의 곁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주소용 후작님!”

    “아! 천우 경! 그렇지 않아도 부르려던 참이었어요.”

    “앞에 있는 놈들의 정체가 좀비라고 합니다.”

    “네? 조, 좀비요?”

    주소용 후작은 적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기사단 돌격을 생각하던 중이었다.

    일차로 병사들이 크로스보우 공격을 하고 난 뒤에 적의 대열이 흐트러지면 곧바로 기사단을 운용할 생각이었다. 압도적인 무력을 보이면 적들이 알아서 지리멸렬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정천우의 입에서 ‘좀비’라는 말이 튀어나온 순간,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고통을 모르는 좀비들의 몸에 쿼렐이 박힌다고 해서 효과가 있을 리가 없다. 기사단이 돌격한다고 한들 머리를 부수거나 목을 치지 않는 이상 의미 없는 짓이다.

    “네! 저희 마법사가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려고 왔습니다. 우선 마법 공격으로 적의 수를 최대한 줄여야 합니다. 아미파의 마법사들을 모아 주십시오.”

    “아, 알았어요! 에쉴! 에쉴!”

    주소용 후작은 당황한 중에도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 크게 소리쳤다.

    잠시 후 뒤에서 마차 한 대가 덜컹거리면서 튀어나왔다. 마차의 창문이 열리고 나이 들어 보이는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마차 안에는 10명가량의 사람이 타고 있었다.

    “영주님, 부르셨습니까!”

    “에쉴, 그대는 천우 경을 따라 샤벨타이거 기사단의 마법사와 합류해 주세요.”

    “음…… 어째서 그런 명령을 내리시는 겁니까?”

    에쉴은 정천우를 흘깃 쳐다보고는 찜찜하다는 듯이 물었다.

    일반 기사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마법사는 기사들과 다른 존재다. 그들에겐 충성심보다는 영주를 돕는다는 개념이 더 강하다. 그들에겐 당연한 행동이었다.

    “우리 군대의 앞을 가로막은 놈들의 정체가 좀비라고 해요. 천우 경의 전속 마법사가 마법을 준비하고 있으니 가서 도움을 주세요.”

    “좀비…… 알겠습니다, 영주님.”

    에쉴은 사태가 심각함을 깨닫고 곧바로 수긍했다.

    주소용 후작은 전진 속도를 더욱 늦추라 명령하고는 화산파로 가는 길목을 좀비가 막았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천우는 이미 다 아는 내용이었기에 에쉴이 탄 마차 앞으로 다가가 마부에게 따라오라고 명령했다.

    마법사들을 이끌고 샤벨타이거 기사단에 돌아가던 정천우의 인상이 달라졌다.

    “제길! 놈들이 움직인다!”

    정천우가 사자후의 수법으로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느린 걸음으로 진군하던 아미파의 병사들이 술렁였다.

    자신들의 앞을 막은 게 좀비라는 말을 들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와 싸워야 한다는 것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어 병사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드러났다.

    하지만 진군을 멈추지는 않았다. 흩어지면 더욱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직은 전장의 광기에 노출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도망치면 탈영의 이유를 들어 죽을 수 있다는 이성이 남아 있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우우우우…….”

    뿌연 흙먼지 너머로 음산한 괴성이 들려오자 병사들은 솜털이 빠짝 서는 듯한 공포감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심장을 옥죄는 느낌이었다.

    병사들이 위축되는 모습을 발견한 정천우는 더 늦기 전에 아군의 힘을 보여 줘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샤칼! 샤칼!”

    정천우는 샤벨타이거 기사단에 도착하기도 전에 힘껏 소리쳤다.

    “예! 주인님!”

    “어서! 어서 마법 공격을 시작해!”

    정천우가 소리치는 사이, 아미파에는 정지 명령이 떨어졌다. 적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공격 명령을 내릴 모양이었다. 덕분에 정천우가 이끄는 샤벨타이거 기사단도 멈췄다.

    모든 병력이 진군을 멈추고 전투를 준비했다.

    방패병이 앞으로 나와 궁수를 보호했다. 궁수는 방패병과 함께 크로스보우에 쿼렐을 장착하고 명령을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창병이 방패병과 궁병의 뒤에서 창을 들고 대기했다. 쿼렐을 발사하다가 적들이 다가오기 전에 쇼트 스피어로 한 차례 더 공격할 생각이었다.

    전투 대세를 갖춘 병사들이 만들어 놓은 중앙의 자리에 아미파 기사단과 샤벨타이거 기사단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샤칼과 제인을 포함한 마법사들이 마나를 집중하면서 공격 마법을 준비했다.

    “ЭДЁФБЙбДЁ…… 파이어 레인!”

    “ЭДФБЙбЁФ…… 파이어 캐논!”

    샤칼이 6서클 마법인 파이어 레인을 완성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제인의 5서클 마법과 아미파 마법사의 마법이 거의 동시에 발동했다.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불덩이가 광범위하게 동시다발적으로 하늘에서 떨어졌다.

    “퀴에에엑! 퀘엑…….”

    “크롹! 크롸아아악…….”

    마법이 연달아 폭발하는 지점에서 듣기 거북한 괴성이 튀어나왔다.

    샤칼을 비롯한 마법사들은 위력적인 마법을 연달아 사용하면서 엄청난 광경을 보여 주었다. 덕분에 불안해하던 아미파 병사들의 사기가 높아졌다.

    엄청난 위력의 마법사가 자신들의 편이라는 사실이 든든했고, 저런 위력의 마법에 적들이 많이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안심되었다.

    콰광쾅! 쾅, 콰광!

    더 재미있는 것은 광역 마법이 쏟아지면서 점차 흙먼지가 가라앉는다는 점이다. 아마도 흙먼지 역시 마법에 의해 일어난 현상이었던 것 같았다.

    샤칼과 나머지 마법사들이 마나 고갈을 느낄 정도로 마법을 난사하고 숨을 헐떡이면서 뒤로 물러났다.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일반 병사들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시야가 좋아졌다.

    “이, 이런 말도 안 될 일이! 조준! 발사!”

    주소용 후작이 질린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좀비들은 인간뿐만이 아니었다. 인간 좀비의 한참 뒤쪽에서 각종 몬스터들이 눈동자가 풀린 채 비틀거리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슈슈슈슉!

    “크훠어엉!”

    “쿠워! 쿠와아아아!”

    쿼렐이 일제히 날아가 좀비로 변한 인간과 몬스터에게 박혀 들었다.

    그러나 좀비들은 분노의 함성만 지를 뿐, 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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