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20화 (120/200)
  • # 120

    Chapter 30. 전쟁의 서막 (2)

    ***

    “거, 기분 더럽네.”

    정천우가 찜찜한 얼굴로 말 위에서 투덜거렸다.

    그가 이렇게 곤란한 표정을 짓는 것은 어제의 술자리 때문이다.

    정진석 공작의 명령이 석연치가 않았다. 왜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정진석 공작을 신뢰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아미파와 하북팽가 연합군이 화산파를 공격해 들어가는 게 쉬운 일인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냄새가 폴폴 풍겼다.

    중원에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던 정천우다. 다른 건 몰라도 눈치 하나는 귀신같이 빠르다. 그렇지 않았으면 낭인 생활을 그렇게나 오래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인님, 무슨 고민이 있으십니까?”

    샤칼은 정천우의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

    그의 기분에 따라 날벼락을 맞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미리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묻는 것이다.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후딱 해치우고 맘 편히 있는 게 나았으니까 말이다.

    “정진석 공작에 대해서 좀 알아?”

    정천우는 때마침 샤칼이 말을 걸어오자 잘 되었다는 듯이 물었다.

    자신이 살던 세계가 아니었기에 모든 게 낯설기만 했다. 가장 힘든 건 역시나 정보를 얻기 어렵다는 점이다. 중원에서라면 귀동냥으로 얻어 듣는 게 많지만 동대륙에선 아니다.

    자신이 느끼는 이 찜찜함의 정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오랫동안 살아온 샤칼이라면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생각을 그동안 왜 안 했는지 의아할 정도다. 아마도 신뢰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게 이유인지도 몰랐다.

    “정진석 공작? 무림맹주를 말하는 것입니까?”

    “맞아.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내가 들은 단편적인 얘기만으로는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워.”

    “주인님께 무례하게 굴었습니까? 제가 돌아가서 확 해치울까요?”

    샤칼은 금방이라도 달려가겠다는 듯 과장되게 행동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가 더 잘 안다. 정진석 공작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그가 걸친 대마법 주문이 새겨진 갑옷과 호위를 생각하면 어려운 일이다.

    정천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샤칼을 시키느니 자신이 해치우는 게 더 빠르니까 말이다.

    지금은 그를 해치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어째서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지, 그것을 파악하는 게 먼저다.

    “됐어. 어떤 사람인지부터 말해 봐.”

    “일단 무림맹주입니다. 무림맹의 실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게 통상적인 얘기는 됐어. 평판이나 성격, 그리고 요즘 무림맹에서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그런 정보들이 필요해.”

    정천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누구나 뻔히 아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그런 얘기는 들어 봐야 상황을 파악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무림맹 쪽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연락해 보고 알려 드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무림맹에 아는 사람이 있어?”

    “드워프도 그렇지만 엘프 역시 무림맹의 일에 협조하고 있습니다. 정도련과는 뜻이 좀 맞지 않아서 말입니다.”

    “알았으니까 어서 알아봐 줘.”

    정천우는 샤칼의 말이 길어질 듯하자 귀찮다는 기색을 드러내면서 말을 잘랐다.

    속으로 투덜거린 샤칼은 품에서 수정구를 꺼내고는 주문을 외웠다.

    정천우는 이내 그에게서 관심을 접고 고개를 돌려 사방을 살폈다.

    자신이 거느린 샤벨타이거 기사단은 아미파를 따라 이동 중이다. 화산파를 치기 위해서다. 하북팽가가 먼저 출발한 상태였기에 시간을 맞추려면 조금 서둘러야만 했다.

    양동 작전으로 동시에 화산파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정진석 공작의 말로는 너무나 쉬운 임무라고 했다. 하지만 정천우로서는 그 말을 100% 신뢰하기가 어려웠다.

    우선은 그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뭔가를 감춘 듯한 기색이었다.

    게다가 정영호의 표정이 수상했다. 정진석 공작의 명령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 표정이었지만 정천우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정천우가 찜찜해하는 것이다. 대체 정진석 공작의 숨져진 의도가 무엇인지. 왜 정영호 후작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는지.

    바로 그것이 의문이다.

    이동 중인 아미파의 병력을 바라보는 정천우의 눈은 더욱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설마 이렇게 많은 동맹군을 헛되이 희생시키지는 않겠지?’

    정천우는 아미파의 병력을 둘러보며 침음을 흘렸다.

    남궁세가와 전투를 벌이면서 네 개의 기사단이 둘로 줄었다. 볼튼 기사단의 주성룡 단장과 로즈메리 기사단의 주영애가 전사하는 바람에 기사들을 새로 배치한 것이다.

    기사단이 두 개로 줄어들었지만 기사의 숫자는 570명이나 된다. 게다가 병과별로 분류한 1만 명가량의 병사가 있다. 이렇듯 훌륭한 전력을 날려 버린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지 가늠해 보았다.

    정도련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자세히 알 순 없지만 1만의 전력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정천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권력이라는 요물에 취해 사람의 목숨을 우습게 아는 인간을 수도 없이 보아 왔다. 항상 버려지는 입장에서 살아왔던 정천우였기에 숫자는 중요치 않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기우이길…… 단순히 쓸데없는 의심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정치적인 일로 무의미한 희생이 없기를 원했다.

    그렇게 정천우가 심각한 얼굴로 아미파의 병력을 살피는 사이, 샤칼이 말의 속도를 높여 곁으로 다가왔다.

    “주인님, 얘기 끝났습니다.”

    “뭐라는데?”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정도련과 크게 한판 벌이는 것 때문에 전쟁 준비로 바쁘다는 얘기가 전부입니다.”

    “정진석 공작은 어떤 인간이라고 하는데?”

    “이해심 많고 추진력이 강하다고 합니다. 인간관계도 좋고, 무림맹의 장로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랍니다.”

    샤칼은 자신이 들은 대로 정천우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그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의심하기에는 평가가 너무나 좋다. 하지만 한 사람의 얘기만 들어서는 확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일단 알았어. 주소용 후작과 얘기해 봐야겠다.”

    정천우는 샤칼을 뒤로하고 말 머리를 틀었다. 수뇌급 인사인 주소용 후작이라면 정진석 후작의 진면목을 조금 더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녀를 찾아가려는 것이다.

    일반 병사들과 진격 속도를 맞추느라 이동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기에 주소용 후작에게 다가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 천우 경, 어서 오세요.”

    “주소용 후작님을 뵙습니다.”

    정천우는 자신을 반기는 주소용 후작에게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도와준 것을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게 그녀의 얼굴에서 느껴졌다.

    “우리가 남궁세가의 영역을 지나치다니, 가슴이 다 두근거려요. 남궁세가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속이 다 후련하네요.”

    “하하하! 다 주소용 후작님의 복입니다.”

    정천우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면서 그녀를 은근슬쩍 추켜세웠다.

    그녀는 한껏 기분이 좋아져서는 정천우에게 덕담을 건네며 칭찬의 말을 꺼냈다. 젊은 나이에 대단한 실력이라는 둥, 벌써 기사단장이니 미래가 탄탄대로라는 둥, 그의 얼굴에 금칠을 해 댔다.

    정천우는 대충 분위기가 잡혔다고 파악하고는 넌지시 본론을 꺼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주소용 후작님.”

    “말씀하세요.”

    “정진석 공작님은 어떤 분입니까?”

    “맹주님이요?”

    “아, 다른 뜻이 있어서 묻는 게 아니라 정말 대단한 검술 실력을 지니셔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을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다른 세상에서 살다 와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정천우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는 주소용 후작에게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그제야 주소용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정천우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맹주님은 그간 많은 일을 해 오셨어요. 뭉치지 못했던 무림맹을 완전하게 하나로 만드신 분이죠. 그분을 시기하는 사람들은 독단적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는 조금 독단적일 필요가 있었다고 봐요.”

    “혹시 맹주께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겁니까?”

    “아니,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적극 수용하는 편이죠. 단지 이번은…….”

    주소용은 정천우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가 말끝을 흐렸다. 말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드러나고 있었다.

    “제가 들어선 안 될 얘기입니까?”

    “들어선 안 될 얘기라기보다는 천우 경과 관련 있는 얘기예요.”

    “저와 관련된 얘기?”

    “그래요. 일부 장로들이 천우 경을 전면으로 내세워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을 내놓았거든요. 정도련을 치는 명분으로 ‘벽력대제의 후예’를 내세우는 편이 효과적이라고 했어요. 나쁘지 않은 얘기긴 한데, 그렇다고 바람직한 의견이라고 보기도 어렵죠. 그동안 무림맹을 이끌었던 맹주님을 무시하는 것이니까요.”

    주소용은 곤란해하던 것과 달리 편안하게 얘기를 들려주었다.

    정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에서 대충 뭐가 문제였는지 감이 왔기 때문이다. 결론은 밥그릇 싸움이었다.

    벽력대제의 후예?

    사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정진석 공작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의견을 냈을 게 분명하다.

    남을 밑으로 끌어내리면 자신이 위로 올라설 것이라 착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반대를 위한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들이 생기는 게 대부분은 그런 이유다.

    ‘결국은 정치적인 문제라는 건데…….’

    정천우는 상황이 참 재미있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물론 실제로 재미있지는 않다. ‘벽력대제의 후예’라는 이유로 자신을 구심점 삼아 싸우자는 의견이 나왔다는 게 약간 어이없기는 했다.

    문제는 정진석 공작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이다.

    ‘제길!’

    정천우가 속으로 욕설을 터트렸다.

    제대로 실수했다.

    자신이 대련에서 패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정진석 공작은 안다. 자신이 승리를 양보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와중에 협박까지 했으니, 어쩌면 재미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주님께서는 정진석 공작님을 아주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요. 무림맹 수련관의 선배님이셨지요. 공적으로는 무림맹의 동맹 영지에, 사적으로는 외삼촌이세요.”

    “아…….”

    정천우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조카를 사지(死地)에 밀어 넣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과 동맹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기분이 거슬린다는 이유로 조카까지 죽음을 내리기엔 아미파의 존재감이 지나치게 무겁다.

    정진석 공작이 보여 주었던 의미심장한 눈빛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지만 기분 탓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정천우였다.

    “응?”

    주소용 후작의 말을 듣고서 안도하던 정천우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악의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한두 사람이 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뿜어내는 살기와 투기가 뒤섞인 그런 종류의 것이다.

    군에서 말하는 이른바 사기(士氣)라는 게 바로 그렇다. 뭔가 조금은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말이다.

    정천우는 눈에 내공을 보내 안력을 돋우었다. 까마득히 먼 거리에서 가물거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주소용 후작님.”

    “말하세요, 천우 경.”

    주소용은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궁세가의 잔존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기껏해야 3천에서 4천 정도일 거예요.”

    “그것보다 최소 다섯 배는 넘는 병력이 우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천우는 내공을 담은 눈으로 멀리 떨어진 적들을 살피며 말했다.

    “네? 말도 안 돼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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