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Chapter 30. 전쟁의 서막 (1)
“이거야 원…….”
정천우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그의 손에는 한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공서를 읽는 것은 아니다. 무공서 가장 뒷장에 벽력대제가 남긴 글을 읽는 것이다.
<키아벨리아스.
나 팽진옥은 그에 대해 오랫동안 조사해 왔다.
키아벨리아스가 암흑 산맥에 자리 잡은 이유가 모종의 맹약에 의해서라는 걸 알았을 때는 기쁨을 참을 수 없었다. 암흑 산맥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암흑 산맥에 대한 보고서를 받으면서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 절정 이상의 경지에 올라서야만이 암흑 산맥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되었다.
이곳 동대륙에서 흔히 말하는 크로스 마스터의 경지를 개척해야만 암흑 산맥에 도전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크로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는 너무나 할 일이 많았고,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접어들었을 때는 나의 수명이 다해 감을 깨달았다.
역천검.
이 괴이한 물건을 파악하는 것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역천검은 두 자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것만으로도 반평생이 걸렸다.
키아벨리아스를 만나려면 반드시 역천검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역천검은 키아벨리아스가 만든 것이니까…….>
“이걸?”
정천우는 허리춤에 걸린 역천검을 뽑으며 놀라워했다.
키아벨리아스라는 늙은 드래곤이 어째서 이런 장난질을 쳤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벽력대제가 쓸데없이 헛소리를 적어 두었을 리가 없으니 믿는 수밖에.
역천검을 뽑아 들고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꼼꼼히 살폈다.
과연 벽력대제의 말이 맞았다. 손잡이 끝에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키아벨리아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동대륙의 글이 아닌 서대륙의 글로 적혀 있었다.
엮여도 더럽게 엮였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하면서 정천우는 역천검을 검집에 넣었다.
“제길, 하루라도 빨리 실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는 건가?”
정천우가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그나마 벽력대제보다 나은 점이 있다. 벽력대제는 순수하게 자신의 실력만으로 경지를 개척했지만 정천우는 조금 달랐다. 단약의 힘으로 빠르게 내공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최소한 내공이 부족해 허우적거릴 걱정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벽력대제보다는 좋은 조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큰일 날 뻔했어.”
정천우는 역천검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이게 없으면 키아벨리아스를 만나도 소용없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전까지는 검 따위는 아무거나 사용해도 문제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쉽게 역천검을 포기했다. 하지만 역천검이 없으면 중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벽력대제가 말하고 있다.
이제부턴 절대로 남에게 함부로 넘겨주지 말아야겠다고 정천우가 다짐했다.
벽력대제의 글을 모두 읽은 정천우는 서재의 문을 열었다. 궁금증을 풀었으니 서재에 더는 미련이 없었다.
“천우 경!”
“응?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까?”
“네, 출정 문제로 영주님께서 뵙자고 하세요.”
“출정?”
주미혜가 하는 말을 정천우는 알아들 수 없었다. 전쟁이 벌어지는 것과 자신이 무슨 상관인지 그것부터 이해가 불가능했다.
주미혜는 그가 의아해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로 다시 입을 열었다.
“무림맹에서 정도련에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할 거라고 해요. 하북팽가에도 정식 명령이 떨어졌어요.”
“흐음…… 알겠습니다. 영주님을 만나 뵙겠습니다.”
정천우는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으나 하북팽가에도 명령이 떨어졌다니 일단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서재에서 영주 집무실로 가는 것은 금방이다. 서재는 보통 영주 집무관에 만들어져 있으니까 말이다. 지하 서고에서 영주 집무실로 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5분도 되지 않았다.
어느 영지나 그렇듯 영주 집무실 문을 지키는 기사들이 두 사람을 막았다. 주미혜가 영주의 딸임에도 의례적인 절차였기에 일단 제지하고 보는 것이다.
“멈추십시오.”
“영주님께서 천우 경을 모셔 오라고 하셨어요. 전시 상황이라 명령서는 생략하시겠다고 하셨어요.”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호위 기사는 옆으로 물러나면서 건틀릿을 낀 손으로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소용 후작은 한창 서류 작업에 몰두한 상태였다.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서류에서 눈을 뗐다.
“하아…… 어서 오세요. 전쟁이 벌어지면 뭐가 이렇게 복잡한지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그쪽 소파에 앉으세요.”
주소용 후작은 양쪽 손으로 피로해진 눈을 문지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다가왔다. 정천우와 주미혜는 그녀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소파에 앉았다.
“천우 경, 혜아를 통해 들으셨겠지만 무림맹이 정도련에 전쟁을 선포했어요. 우리 아미파에게는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그래서 천우 경을 뵙자고 했답니다.”
“퇴로 차단이라…… 가능한 일입니까?”
“하북팽가와 연합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미파와 하북팽가만으로 충분하다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정천우는 의심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아까 지하 수련실에서 싸웠던 정진석 공작이 무림맹주라고 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왜 하필 아미파와 하북팽가를 시켜 퇴로를 차단하라고 했는지 의심부터 생겼다.
“어째서 천우 경이 걱정하는지 모르겠지만, 하북팽가와 연계하여 화산파부터 공략할 생각이에요.”
“그러시다면 안심입니다. 조금 더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정천우는 속으로 안도하며 주소용 후작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주소용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림맹의 명령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기색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무림맹에서 근래 들어 ‘벽력대제의 후예’ 혹은 ‘전설의 계승자’에 대한 얘기가 오가는 중이다. 상징적인 의미에서라도 전설의 계승자인 정천우를 내세우는 것이 정도련에게 명분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이었다.
아마도 그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정천우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미파와 천우 경의 샤벨타이거 기사단은 함께 행동하게 돼요. 하북팽가는 현재 화산파로 진격 중이라고 하니, 우리는 내일 아침 남궁세가의 영역으로 들어갔다가 곧장 화산파로 진격할 생각이에요.”
주소용 후작은 손가락으로 아미파와 하북팽가의 깃발을 움직여 화산파를 향해 각각 이동시켰다.
하북팽가와 합류해서 함께 진격하는 게 아니라 각각 다른 경로로 이동해 화산파를 앞뒤로 공격할 모양이었다.
“남궁세가에서 뒤를 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럴 염려는 없어요. 우선 남궁세가의 주전력이 궤멸된 상황이죠. 남은 전력이라고는 한두 개의 기사단과 약간의 병사가 전부일 테니 안심하셔도 좋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출정은 내일 몇 시에 하는 겁니까? 미리 부하들에게 준비시켜야 합니다.”
“아침 7시에 이동할 생각이에요. 하북팽가와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조금 서둘러야 해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천우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듣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보면 무례한 행동일 수도 있었지만 지금부터 준비한다고 해도 기사들은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게 뻔하다. 자신 역시 저녁에는 꺼림칙한 상대인 정진석 공작과 술을 마셔야 하기에 미리 준비해 둬야만 했다.
***
영주 집무실에서 나온 정천우는 곧장 샤벨타이거 기사단의 임시 거주지를 향해 걸어갔다.
다행스럽게도 기사들은 대부분이 거주지에 돌아온 상태였다. 하기야 한따까리 하자는 얘기에 위기를 모면하려고 자리에서 뜬 셈이라 딱히 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임시 거주지 앞에서는 아직도 제인이 단약을 졸이고 있었다. 졸여진 상태를 확인한 그가 제인에게서 주걱을 넘겨받았다.
“제인 마법사님,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일단 이걸 환으로 만들어야겠네요.”
정천우는 한쪽에 놓아둔 자신의 마법 배낭에서 주섬주섬 물건을 꺼냈다. 그러고는 걸쭉해진 헤따이에 약재 가루를 잔뜩 집어넣고 덩어리로 만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기에 단약을 제조하는 데만 집중했다.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밤톨만 한 수준으로 단약을 빚어 대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을 드러냈다. 전처럼 작게 만들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전 크기의 단약으로 만들면 열댓 개를 한꺼번에 먹고서 내공 수련을 해야 하기에 아예 크게 빚은 것이다. 이렇게 해 놓으면 내공을 수련할 때 두 알 정도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말이다.
“부탁드려요, 제인 마법사님.”
“흥! 수고했다는 말도 없어요? 얄미워 죽겠어. ЖЙПБФБЙ…… 드라이!”
제인은 뾰로통한 얼굴을 하면서도 정천우의 요구대로 만들어진 단약을 마법으로 건조시켜 주었다.
“고마워요.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정천우는 아이를 달래듯이 제인에게 말하고는 단약을 마법 배낭에 챙긴 다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자! 모두 잘 들어라! 내일 아침 우리는 출정할 예정이다. 딴짓하고 돌아다니는 놈들 모두 불러오고, 나머지 인원은 출정을 준비한다.”
정천우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만한 태도로 뒹굴던 기사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뜻밖의 명령이었음에도 기사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단장이 명령하면 기사는 따른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절대 영역이다. 사정 설명이 없다는 것은 이미 상부에서 그렇게 결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어디에나 반골 기질이 있는 사람은 있다.
“천우야, 갑자기 뭔 일인데?”
제럴드는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게 가까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잘 쉬고 있는데 난데없이 출정하라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를 벌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이었기에 출정 명령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목숨이 걸린 일이기에 찜찜했던 제럴드는 인상을 잔뜩 구겼다.
“까라면 까는 거지, 뭘 따지고 들어? 하북팽가에서도 출정한 상태라니까 별수 있냐? 화산파를 치러 가는 거니까 준비 단단히 해 둬. 못해도 닷새는 걸릴 거야.”
“제기랄, 싸우지 못해서 안달 난 유령이 씌었나…….”
“새가슴이냐? 사내새끼가 뭘 그리 겁이 많아? 너도 이제 기사야, 기사!”
“알았어, 인마.”
제럴드의 입이 댓 발이나 튀어나왔다. 툴툴거리던 그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면서도 자신의 전투마를 향해 걸어갔다.
“제인 마법사님,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겁니다. 제가 곁을 지켜 드릴 수 없으니 샤칼 녀석과 떨어지면 안 됩니다.”
“……알았어요.”
제인은 정천우가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말을 해 주자 지금까지 쌓였던 불만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샤칼 녀석이 조금 까칠해서 그렇지, 실력만큼은 좋은 놈이니까 제인 마법사님을 잘 보호…… 그러고 보니, 이 자식들 어디 있지? 이놈들은 조금만 풀어 주면 짱박힌다니까?”
정천우는 제인과 얘기하다가 두 사람이 자리에 없는 것을 깨닫고 이리저리 사방을 살폈다. 그러고는 화가 난 얼굴로 자리를 떴다.
“처, 천우 경…… 히잉…… 너무해!”
제인은 좀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는데, 정천우가 훌쩍 가 버리자 울상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