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18화 (118/200)
  • # 118

    Chapter 29. 치명적인 명령 (6)

    [전음이라는 것입니다.]

    정천우가 놀라워하는 정진석을 향해 재차 전음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공격 자세는 전혀 풀지 않았다.

    그것은 정진석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대의 의도를 알 수 없으니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전음’이라는 얘기를 듣고서야 상대가 마법이 아닌 중원의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과연 전설의 계승자는 다르다는 것인가?’

    정진석 공작은 이를 드러내면서 정천우를 노려보았다.

    엄청난 공격에 맞서느라 온몸이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상대는 분명 자신보다 훨씬 약한 마나의 기운을 풍긴다. 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감당하기 어려운 공격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공포를 느꼈다.

    작은 실수조차도 허용치 않는 살벌한 대결이었다. 아니…… 이미 대련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살기가 짙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기분이었다.

    실수로라도 상대의 공격을 놓치면 온몸이 난자(亂刺)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피부에 돋은 소름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죽음의 공포를 느껴 버린 자신의 몸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그런 정진석 공작의 귀에 정천우의 전음이 다시 파고들었다.

    [제가 이런 식의 대련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정천우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전음을 날렸다.

    일방적인 구타는 해 봤어도 자신과 실력이 엇비슷한 상대와 실력을 겨루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언제 상대가 돌변해서 롱소드를 쑤셔 박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최선의 수비는 공격.

    그래서 정천우가 택한 것은 숨 쉴 틈 없는 무자비한 공격이었다. 상대는 믿을 수 없고, 자신의 생명은 하나뿐이었으니까.

    [더 싸우실 거라면 고개를 끄덕이시고, 그만두실 거라면 고개를 흔드십시오. 마무리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정천우는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정진석 공작을 향해 물었다.

    여차하면 덤비겠다는 듯이 눈을 번뜩이자 정진석 공작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정진석이 마른침을 삼키면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롱소드의 손잡이가 미끈거리는 기분이었다. 긴장으로 인하여 손에 땀이 흥건하게 난 것이다.

    평소에는 롱소드의 손잡이를 잡으면 편안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부담스럽기만 했다. 더 싸움을 이어 간다면 반드시 패할 거라고 본능이 속삭여 댔다.

    잠시 갈등하던 정진석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고개를 살짝 옆으로 흔들었다. 그것은 워낙 미세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다면 아무도 알아볼 수 없었다.

    “쿨럭! 커헉! 우욱…….”

    그러자 정천우가 입가에서 피를 흘리더니 자세를 무너뜨렸다. 숨을 몰아쉬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심하게 다친 듯 보였다.

    정진석은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제껏 자신에게 두려움을 주던 상대가 갑자기 허무하게 쓰러졌다.

    ‘허세였던 것인가!’

    정진석은 긴장을 풀며 얼떨떨한 와중에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아무리 전설의 계승자라고 해도 그래 봐야 젊은 청년이다. 몇십 년을 수련한 자신을 압도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특이한 기술들을 많이 사용하긴 했지만 오랜 연륜 앞에선 잔재주가 통하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대단한 친구야. 아직 어린 나이에 저런 실력이라니…… 계획을 변경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진석은 괴로워하는 정천우를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이번에 벌이게 될 정도련과의 전쟁은 정진석 공작 본인이 주축이 되어 진행될 예정이다. 그게 가장 모양새가 좋기 때문이다.

    전설의 후계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무림맹의 수뇌부가 술렁거렸다.

    지금이야 몇 명 정도의 수뇌부가 ‘전설의 후계자’를 운운하고 있는 정도다. 그러나 정천우의 실력이 자신과 대등하게 싸울 정도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정진석 공작을 우러러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 기회에…….’

    정진석 공작의 눈에 잠깐이지만 살기가 맺혔다.

    이제껏 무림맹을 이끌어 왔는데 애송이 하나 때문에 술렁이는 건 질색이었다. 동대륙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잡음은 없는 편이 나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숨을 몰아쉬는 정천우를 향해 정진석 공작이 다가갔다. 여전히 롱소드를 손에 쥔 채였다.

    ‘이, 이건!’

    느긋하게 걸어가던 정진석 공작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익숙한 느낌.

    아니…… 익숙했는지도 의문스러운 느낌.

    바로 조금 전까지 느꼈던 위화감이 전신을 뒤덮었다. 이 느낌은 바로 정천우가 흘려 대던 살기와 똑같았다. 처절한 무언가가 스며 있는 끔찍한 살기다.

    그것이 정진석 공작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싸움을 멈추기로 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아…….”

    정진석 공작은 자신의 귀에 파고드는 음성을 듣고서 탄성을 발했다.

    정천우는 상처를 입고 쓰러진 게 아니었다. 피를 흘리고 숨을 헐떡이면서도 자신을 노려보는 눈빛은 싸늘하기만 하다. 연기가 워낙 자연스러워서 진짜로 그가 상처 입은 줄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정천우는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았다.

    ‘만약 그가 공격했다면…….’

    정진석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만약 자신의 욕심대로 공격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상대는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서 싸움을 멈추자고 했다. 그런데 자신은 상대를 죽이려고 고민하고 있었다.

    순간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일을 망칠 뻔했다.

    정진석 공작은 숨을 크게 내쉬고는 롱소드를 검집에 넣었다. 그러고는 정천우에게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은가?”

    “쿨럭, 쿨럭!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정천우는 정진석 공작에게만 집중시켰던 살기를 거두며 기침을 해 댔다.

    “맹주님, 역시 대단하십니다! 천우 경, 그대의 솜씨도 훌륭했네. 과연 전설의 계승자다운 검술일세.”

    정영호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흉험한 살기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다가왔다.

    주소용과 주미혜가 부러움을 가득 담아 정천우와 정진석 공작을 칭찬했다. 아미파의 무공으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펼치지 못할 가공할 위력의 검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미파의 무공은 애초에 여인을 위한 무공이라 위력보다는 섬세함을 강조한다. 게다가 이곳에는 없는 종교지만, 불교에서 강조하는 ‘대자대비한 마음’이 무공의 근간에 깔려 광포한 위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웠다.

    “쿨럭, 쿨럭! 과찬이십니다. 정진석 공작님이 손에 사정을 두셔서 큰 부상을 당하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정천우는 핼쑥해진 얼굴로 대답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누가 봐도 아픈 사람의 모습이었기에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정천우의 몸을 걱정해 주었다.

    단 한 사람을 빼고는 말이다.

    ‘어린 나이에 이런 능구렁이 같은 연기라니……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인가.’

    정진석 공작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며 혀를 내둘렀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린 애송이는 살기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자신이 암습을 가하면 곧바로 반응할 수 있도록 교묘하게 사람들을 방패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단한 친구로군. 심하게 다친 게 아니라면 저녁에 술이나 한잔하세. 어떤가?”

    정진석 공작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말속에는 뼈가 들어 있었다. 이걸 거절하면 뒤끝이 좋지 못할 거라는 암시를 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리 큰 상처는 아니니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소용 후작님.”

    “말씀하세요.”

    “아미파에 소장된 무공서를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무공서요?”

    “네, 제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정천우는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따로 시간을 잡아 말을 꺼내기보다 겸사겸사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다. 정진석 공작의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자리를 뜨고 싶다는 마음이기도 하다.

    “언제든지 보세요. 그러나 별로 쓸 만한 무공은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미혜야, 네가 천우 경을 모시고 가려무나.”

    “네, 영주님.”

    주미혜는 명령이 떨어지자 곧바로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부녀지간이었지만 공적인 자리였기에 예의를 다하는 것이다.

    ‘휘유…… 이제야 좀 살겠군.’

    정천우는 속으로 안도하며 미소 지었다.

    정진석 공작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를 받아 내는 건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다. 여차하면 기습하겠다는 듯 끊임없이 자신을 주시하는데 살이 떨릴 지경이었다. 뭐라도 핑계를 대고서 자리를 피하지 않는 이상 팽팽하게 당겨지는 긴장감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비록 자신의 실력이 높다고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약간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다.

    하루라도 빨리 강해지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겠다는 걸 통감하면서 정천우는 주미혜를 따라 자리를 벗어났다.

    “대단한 친구야.”

    정진석 공작은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천우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주소용 후작과 정영호 후작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정진석 공작을 따라 돌아갔다. 그들의 얼굴에도 정천우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듯한 기색이 녹아 있었다.

    어느 누가 있어, 겨우 스무 살의 나이에 동대륙 최고의 기사라는 검왕과 비등한 대련을 펼칠 수 있겠는가!

    아니, 나이를 떠나서 검왕을 한 순간이라도 곤란하게 할 수 있는 실력자가 있기나 할지 의문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전설의 후계자라는 상징적인 의미까지 지닌 사람이다. 단순히 대단하다고만 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 친구 나이 때 저는 공작님께 이제 막 검을 다루는 법이나 배웠는데 말입니다.”

    “그런 것도 있지만, 마음 씀씀이가 대단하다는 걸세.”

    “네?”

    정영호 후작은 정진석 공작의 의미심장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껌벅거렸다. 존경하는 정진석 공작이 의미 없는 말을 할 리가 없었기에 그는 진심으로 속뜻이 궁금했다.

    그러나 정진석 공작은 그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래서 더 가만히 둘 수 없지. 이제껏 내가 어떻게 무림맹을 이끌어 왔는데.’

    정진석 공작은 이제 완전히 지하 수련실을 빠져나가는 정천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꽉 다물었다.

    수많은 정적과 싸워 가면서 겨우겨우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무림맹은 이제 역대 최강의 전력을 보유했다. 모두가 자신의 공로다.

    정도련과의 일전(一戰).

    이제는 그것만을 남겨 둔 상황이다.

    자신의 힘으로 완성한 단결된 무림맹을 이끌고,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업적을 세우는 것만이 남았다.

    기껏 만들어 놓은 발판을 애송이에게 모조리 넘겨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림맹의 최고 정점에서 지내 왔던 그였다. 최후의 결전만을 남겨 두고서 모든 걸 남에게 넘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소용 후작.”

    “예, 맹주님!”

    “무림맹에서 아미파에게 한 가지를 부탁하려 하오.”

    정진석 공작은 짐짓 무게를 잡으면서 말했다.

    주소용 후작은 진중한 그의 어조에 몸가짐을 바로 하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무림맹의 공식적인 명령을 수행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만큼 무림맹에서 입김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면서 주소용 후작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명령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우리 무림맹은 곤륜파와 소림파의 전력을 총집결해 정도련을 칠 것이오. 그동안 아미파는 남궁세가의 영지를 접수하고 정도련의 뒤를 공격해 주시오. 하북팽가에도 화산파를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려 두었으니 뒤는 걱정하지 마시오.”

    “…….”

    주소용 후작은 뜻밖의 명령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건 아미파를 총력전에서 제외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명령이었다. 그러면서도 위험한 명령이다.

    잘못하면 정도련과 화산파의 협공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것도 남궁세가의 잔당과 싸우는 와중에 말이다.

    “남궁세가를 놔두고 화산파를 하북팽가와 양동 작전으로 전멸시킨 뒤에 남궁세가를 쳐도 좋소.”

    “맹주님, 감사합니다. 명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주소용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하북팽가와 양동 작전을 펼쳐 화산파를 치는 편이 훨씬 더 안전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차피 무림맹과 합류해 영광을 같이하지 못할 거라면 실리를 추구하는 게 훨씬 더 이득이었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무림맹의 명령이 그렇다는데야 따질 수도 없는 일이다.

    속으로 계산을 마친 주소용은 곧바로 허리를 굽혔다.

    “작전 회의를 위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럼…….”

    “그리하게. 저녁에 보기로 하지.”

    정진석 공작은 사람 좋은 미소로 화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소용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하 수련실을 빠져나갔다. 전쟁 준비는 철저하게 준비할수록 그만큼 안전해진다. 서둘러 준비해야 했기에 한시가 급했다.

    그녀가 지하 수련실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정영호 후작은 의문스러운 얼굴로 정진석 공작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화산파를 공격하라니, 어찌 된 일입니까?”

    “그게 모두를 위해서 좋은 일이야. 무림맹을 위해서도 그렇고 자네와 나를 위해서도 그렇고.”

    정진석 공작은 더는 말하기 싫다는 얼굴로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남겨진 정영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멀어져 가는 정진석 공작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런 명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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