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17화 (117/200)
  • # 117

    Chapter 29. 치명적인 명령 (5)

    ***

    영주 성의 지하 수련장에 정천우가 몸을 흔들면서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원과 마찬가지로 이곳 동대륙에도 영주를 위한 개인 수련실이 따로 있었다. 영주의 생명은 곧 영지의 운명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100명 이상의 사람이 들어가 앉아도 될 만한 크기의 지하 수련장은 야외 수련장만큼이나 환경이 좋았다. 마법을 사용한 것인지 지하 특유의 퀴퀴한 냄새와 습기가 없어 수련하기 딱 좋은 장소다.

    ‘져 줘?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지만…….’

    정천우는 한껏 무게를 잡으면서 롱소드를 뽑는 정진석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상대는 동대륙 최고의 기사라는 검왕이다.

    중원에 비한다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실력이다. 절정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력으로 ‘최고’니 ‘검왕(劍王)’이니 하는 칭호를 가졌다는 게 우습다.

    물론 일류를 상회하는 실력이지만 정천우 역시 그 정도 능력은 된다. 정영호와 대결을 펼치기 직전에 대주천을 성공해 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당시와 지금은 또 다르다.

    그때부터 단약의 수를 늘려 내공을 수련해 왔다. 정영호와 대결할 때보다도 더 강해진 상태다.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내공을 증폭할 수 있는 능력의 유무다.

    정천우는 상승의 내공심법인 혼원벽력신공을 익혔다. 순간적으로 내공을 증폭할 수 있다. 마나를 몸에 가둬 두고 꺼내 쓰는 게 전부인 기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기를 지닌 셈이다.

    폭(爆)의 기법과 같은 중원의 내공 운용 능력은 동대륙의 우직한 기사들이 경험해 보지 못했다. 정천우가 지닌 최고의 무기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정진석 공작에게 져 줄까 말까 고민하는 것이 마냥 터무니없는 생각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정천우가 고민하는 사이, 정진석 공작은 롱소드를 한 손에 쥐고서 오연한 얼굴로 전신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준비를 마친 그는 롱소드를 들어 정천우를 가리켰다.

    “지금 자네의 표정!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군. 전력을 다하게! 그러지 않으면 내가 크게 화를 낼 걸세.”

    정진석은 눈썹을 치켜뜨며 경고를 보냈다.

    상대가 머뭇거리면서 고민하는 모습에 기분이 상한 것이다. 마치 자신을 한 수 아래로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감히…….’

    그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검왕의 칭호를 가지게 된 이후 이런 모욕은 처음이다. 서대륙의 이름난 강자라 해도 자신에게 저런 눈빛을 보내지 못한다. 그것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상대가 저런 고민을 하고 있으니,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있지만 허탈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진석 공작은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신이 제시한 문제를 해결한 인물이다. 아미파를 구원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그것을 무사히 끝마쳤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무림맹의 기사들을 잔뜩 준비했었다. 아미파의 승리로 끝났다는 소식에 안도하는 한편, 정천우라는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대규모 전쟁에서 과연 구심점이 되어 줄 수 있을지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자신을 얕잡아 보는 건 인정할 수 없다.

    정진석 공작은 롱소드에 마나를 잔뜩 밀어 넣었다.

    우우우웅…….

    롱소드가 진동을 일으키면서 발생한 진동음이 지하 수련실을 울렸다. 전력을 다해 싸움에 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박력 넘치는 그의 모습에 정천우가 쓰게 입맛을 다시고는 역천검을 천천히 들었다.

    “……후회하실 텐데요.”

    혼원벽력도의 기수식을 잡으면서 정천우가 눈매를 좁혔다.

    흡사 중원의 무인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정천우가 중원에 있었을 적에는 대련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대련이라는 건 진짜 실력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잔뜩 겉멋을 부려 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정천우에게 그걸 바라는 것은 무리다. 그는 오직 삶과 죽음을 가르는 처절한 싸움만 해 봤을 뿐이니까.

    전력을 다하라는 상대의 말은 그에게 실전으로 싸우라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입가에 닿을 듯 치켜든 역천검의 검날에서 싯누런 마나 쉐도우가 무서운 기세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정천우의 전신에서 광포한 살기가 일어났다. 동대륙의 기사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진한 살기였다.

    오직 생존을 목적으로 싸워 온 정천우의 기세는 치열한 삶의 무게까지 더해졌다.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필살(必殺)의 각오.

    “우욱!”

    정진석 공작은 정천우의 분위기가 돌변하자 나직하게 신음을 흘렸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짙은 살기였다. 이렇듯 흉흉한 살기는 전장에서나 경험할 수 있을 법한 기운이다. 정말 자신을 죽일 생각으로 작정하지 않는 이상 지금과 같은 살기를 뿜어낼 수는 없다.

    ‘날 죽이겠다는 뜻인가?’

    정진석 공작은 자세를 낮추면서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천우의 전신에서 풍기는 살기는 흉험하기 짝이 없었지만 눈빛이 달랐다. 자신을 죽이겠다는 눈빛은 아니다. 그저 최선을 다하겠다는 눈빛이었다.

    ‘대체 얼마나 처절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인가!’

    정진석 공작은 롱소드의 손잡이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면서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상대가 자신을 진짜로 죽일 의도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다지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안심하고 싸우기에는 풍겨 오는 살기가 너무나 흉포하고 지독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는 속으로 후회했다. 자신이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명령을 무를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자신의 명성과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가네!”

    정진석은 잔뜩 긴장한 음성으로 짧게 말했다.

    선공을 양보하겠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여유를 부리기에는 상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멋 부리다가 개망신을 당하느니, 상대를 인정하고 대련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그렇게 마음먹기가 무섭게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선제공격만이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상대가 불평할 틈도 주지 않는 빠른 행동력이었다.

    파바밧!

    정진석 공작의 몸이 쭈욱 늘어나면서 정천우를 향해 쇄도했다.

    바닥을 차고 나가는 그의 모습은 어째서 그가 검왕의 칭호를 얻을 수 있었는지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오오오!”

    “과연!”

    푸른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정진석 공작의 마나 쉐도우를 목격한 사람들은 감탄성을 터트렸다. 불타오르는 듯한 그의 마나 쉐도우는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할 만큼 위협적이고도 아름다웠다.

    그래서 아미파의 최고 실력자라는 주소용 후작조차 정진석 공작이 위기감을 느껴 선제공격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보다 월등한 능력의 정진석 공작을 감탄과 부러움이 섞인 눈으로 쳐다보는 게 전부였다.

    사람들이 타오르는 정진석 공작의 마나 쉐도우에 감탄하는 사이, 정천우는 전신의 근육을 바짝 조이고 있었다.

    돌진해 오는 상대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일격필살의 기세를 드러낸 정진석 공작의 모습은 절대로 패배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느껴졌다.

    으득!

    정천우가 이를 꽉 물었다.

    애초부터 잘못 생각했다. 자신과 실력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사람을 상대하면서 봐줄 생각을 하다니…….

    ‘부순다!’

    정천우가 크게 한 걸음 내디뎠다.

    입술 근처에 머물렀던 검자루는 어느새 하단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역천검의 검 끝이 지하 수련실의 바닥을 긁으며 길게 후벼 팠다.

    쿵!

    착지와 동시에 왼발로 지하 수련실의 바닥에 진각을 밟으면서 역천검을 아래에서 위로 그었다.

    바우웅!

    싯누런 빛을 뿌리며 파공음이 일어났다.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 제이초식, 벽력섬광(霹靂閃光)!

    첫 번째 초식과 연계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독자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초식이다.

    초식의 속성은 발도술(拔刀術).

    지면을 이용해 검집에서 뽑혀 나올 때의 마찰을 대신하는 수법이다. 지하 수련장의 바닥을 긁으면서 발생한 마찰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가속도를 얻는 방법이었다.

    환상처럼 그려지는 샛노란 반원.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푸른색의 반원과 마주치는 순간, 눈이 멀어 버릴 듯한 빛이 터졌다.

    콰과광!

    정진석의 마나 쉐도우와 정천우의 마나 쉐도우가 부딪치기가 무섭게 굉음이 일어나 지하 수련장을 뒤흔들었다.

    빛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격돌을 일으킨 두 사람의 몸이 충격을 받아 뒤로 물러났다.

    괴로워하는 정진석 공작과 달리 정천우는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충격에 밀려나던 몸을 천근추의 수법을 사용해 멈추고는 곧바로 정진석 공작을 쫓았다.

    “어헉!”

    정진석 공작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몸은 밀리는 상황인데 상대는 금세 균형을 회복하고 오히려 뒤를 쫓아왔다. 그의 상식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애써 두 다리에 마나를 집중시켜 자세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중원의 신법(身法)처럼 전문적이고도 체계적인 수법을 배우지 못한 정진석은 완전하게 자세를 잡을 수 없었다.

    “차아압!”

    정천우가 기합을 내지르며 역천검을 어지럽게 휘둘렀다.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 제삼초식, 무음벽력(無音霹靂)!

    역천검이 여러 개로 늘어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단지 착각만이 아니었다. 워낙 빠르게 휘두른 탓에 검이 여러 개로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정진석 공작이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롱소드를 마주 휘둘렀다.

    시퍼런 마나 쉐도우가 롱소드에 피어올랐다. 어지럽게 사방을 휘저으면서 정천우가 펼친 무음벽력의 초식을 겨우겨우 막아 갔다.

    신기한 것은 아무런 충돌음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음벽력의 초식은 주변의 소리까지 집어삼키는 효용이 있는 수법이다. 암습에 최적화된 초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상대가 볼 수 없는 등 뒤에서라면 막강한 위력을 선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면에서의 공격이었기에 정진석 공작이 겨우겨우 막아 낼 수는 있었다.

    ‘무,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이게 혼원벽력도라고?’

    정진석 공작은 가까스로 정천우의 공격을 받아 내고선 질린 얼굴로 물러났다.

    콰광! 콰과광! 쿠궁!

    무음벽력의 초식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굉음이 연달아 터졌다.

    초식의 효과에 의해 가두어졌던 충돌음이 뒤늦게 풀려나와 지하 수련장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의 귀를 괴롭혔다.

    “이게 어떻게…….”

    주소용은 자신의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눈을 껌뻑거렸다.

    정진석 공작이 누군가!

    동대륙에서 맞상대할 적수를 찾을 수 없다는 사람이다. 오죽했으면 기사들이 그를 ‘검왕(劍王)’이라 부르며 칭송하겠는가!

    동대륙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기사들이 우글거린다는 서대륙에서도 실력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바로 정진석 공작이다.

    당연히 정천우가 형편없이 밀릴 거라고 예상했는데, 오히려 정진석 공작이 밀리는 중이다.

    이 황당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주소용은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많이 놀란 사람은 정영호였다. 정천우가 강하다는 것쯤은 직접 싸워 봐서 안다. 하지만 자신이 우상으로 생각하는 정진석 공작에겐 어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쉽게 깨졌다.

    사람들을 경악시킨 당사자인 정천우는 주변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 하면 티 나지 않게 싸움을 끝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꼴을 보니 적당히 끝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정진석 공작의 눈에 깃든 감정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자괴감.

    경악.

    현 상황에 대한 부정.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결코 싸움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정천우는 아랫배에 힘을 주고 내공을 북돋웠다.

    그러고는……

    전음을 사용했다.

    [계속하실 겁니까?]

    순간, 정진석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마치,

    ‘마법도 할 줄 알아?’

    라고 묻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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