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16화 (116/200)
  • # 116

    Chapter 29. 치명적인 명령 (4)

    “머저리 같은 놈들! 모두 성안으로 들어간다!”

    주소용은 상대의 결정에 이를 갈아붙이고는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기사대전에 완패하고서도 끝까지 싸울 것을 명령하다니, 이건 정말이지 멍청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나온다면 뜨거운 맛을 보여 주겠어!’

    주소용은 성문을 통과하면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서릿발 같은 살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드드드드…… 쿵!

    아미파의 기사들이 성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창살로 이루어진 성문이 내려갔다.

    의미 없는 살육전을 예고하는 북소리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

    남궁세가의 분노 어린 발악은 그저 아미파의 영지성 앞을 시체들로 뒤덮는 결과만 낳았다. 남궁세가의 병사들이 공성을 위해 달려들었지만 개죽음만이 그들을 맞이해 주었다.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공성전을 준비한 아미파였다. 남궁세가의 공성용 병기들은 아미파가 준비한 발리스타(거대한 크로스보우)와 캐터펄트(작은 투석기)에 의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성문을 파괴하기 위해 캣(Cat : 지붕 달린 이동 장치)을 끌고 왔지만, 성 위에서 던지는 돌과 불붙은 기름통에 맞아 허무하게 파괴되었다. 최후에는 공성용 사다리까지 동원되었지만 적극적인 자살에 불과할 뿐이었다.

    남궁세가의 기사가 내린 치명적인 자살 명령은 그렇게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우스운 건, 정작 최후의 명령을 내린 기사는 도주했다는 점이다. 병사들에게는 싸우라고 명령해 놓고서 말이다.

    명령을 내린 남궁세가의 기사는 최정예 기사단인 피어 드래곤 기사단의 단장이자 남궁기정의 장남인 남궁성환이었다. 모든 병력을 잃고 돌아갔지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아미파의 여론은 남궁세가까지 진격하자는 쪽으로 기울었지만 주소용은 말렸다. 남궁세가가 정도련 소속이었기에 아미파만으로 일을 벌이기가 어려웠던 까닭이다.

    그 문제로 아미파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만나기만 하면 앞으로의 일을 떠들어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 안 돌아가냐?”

    “조금 더 있어 달라잖아. 팽선웅 백작님도 대기하라는데 별수 있어?”

    정천우는 약을 달이면서 한마디 툭 내던졌다.

    제럴드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명령이 떨어진 이상 마음대로 움직일 순 없는 일이다. 그래서 소일거리로 부족한 단약을 제조하고 있었다.

    샤벨타이거 기사단은 인근 야산을 뒤져 헤따이 열매와 뿌리를 캐 와 단약을 보충하는 중이다. 기사들도 단약의 도움을 받았던 까닭에 정천우의 명령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뭐, 단장의 명령을 애초부터 거부할 수 없긴 했지만 말이다.

    “천우 경, 그래도 이렇게 시간만 보내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다른 기사들도 지루해하고 있어요. 보세요.”

    보다 못한 제인이 나서서 다른 기사들을 가리켰다. 빈둥거리던 기사들은 제인이 나서자 눈을 빛내며 정천우를 쳐다보았다.

    지난 며칠 동안 한 일이라곤 야산에 올라 헤따이 열매와 뿌리를 캔 것이 고작이다. 차라리 화끈하게 싸우는 게 낫지 지루하게 시간만 보내는 건 좀이 쑤셔 미칠 것 같았다.

    정천우와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소문난 제인이라면 뭔가 괜찮은 결과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사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정천우는 단약을 휘젓던 주걱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쳐다보는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의 기대 어린 눈빛에 그의 입술 한쪽 끝이 말려 올라갔다.

    “그렇군요. 다들 심심한가 봅니다. 하긴 좀 구를 때가 되긴 했죠. 제 훈련이 그리운 모양입니다.”

    정천우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꺾으며 몸을 푸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제럴드부터 몸서리를 쳤다.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봐! 계속 늘어져 있을 거야? 대련 어때?”

    “그, 그게 좋겠군. 오늘은 긴장해야 할 거야! 가지!”

    “슈, 슈라! 오랜만에 삼재진을 수련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기다렸던 바일세! 지난번 전투에서 약간 부자연스러웠거든.”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은 누가 봐도 어색한 대화를 나누며 슬금슬금 자리를 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시로 지은 샤벨타이거 기사단의 막사가 텅 비었다.

    그 모습에 제인이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보셨죠? 다들 바쁩니다. 제럴드, 심심하면 개인 수련 시켜 줄까?”

    “아하하하…… 생각해 보니까 나도 할 일이 있었는데 그걸 깜빡했잖아? 잭슨 녀석이 어디 있더라? 하던 거 계속해라. 알았지?”

    제럴드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왼 손바닥을 오른 주먹으로 내려쳤다. 그러고는 정천우와 눈도 마주치지 않게 일부러 고개를 돌리면서 자리를 빠져나갔다.

    “어째서…….”

    제인은 순식간에 기사들이 사라지는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끝을 흐렸다.

    정천우는 당황해하는 제인의 모습이 귀여워 한마디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닫았다. 주미혜가 다가오는 모습을 발견한 까닭이다.

    “천우 경, 안녕하셨어요?”

    “보시다시피 심심해 죽을 지경입니다. 그나저나 상처는 괜찮으십니까?”

    붕대를 감은 주미혜를 팔을 가리키며 정천우가 물었다.

    며칠 전 기사대전을 벌이면서 얻은 상처다. 단약을 먹고 마나가 늘었다지만 남궁세가의 기사단장들은 너무나 강했다. 게다가 남궁세가의 기사단장들은 죄다 마공을 사용한 탓에 그녀로서는 버겁기도 했다.

    “염려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요. 아! 제인 마법사님, 안녕하셨어요?”

    “네, 주미혜 경도 안녕하셨어요? 지난번엔 죄송했어요.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제인은 지난번 무당파의 영지에서 자신이 한 행동을 사과했다.

    정천우에게 꼬리 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알고는 사과도 하지 않고 도망쳤었다. 게다가 남편이 남궁세가의 음모에 휘말려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서 더 미안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주미혜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해 다녔다.

    하지만 이렇게 제대로 마주하고 보니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괜찮아요. 복수해 줬으니, 그이도 저 위에서 기분이 풀렸을 거예요.”

    주미혜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왠지 그 모습이 더 처연해 보여 제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려는 기미가 보이자 정천우가 말을 돌리려고 나섰다.

    “하하하! 칙칙한 얘기는 그만두시고, 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 겁니까?”

    “영주님께서 찾으세요. 보상 문제도 있고, 무림맹에서 찾아온 손님이 있어서요.”

    “무림맹에서요? 그게 누굽니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극비거든요. 가 보면 알게 되실 거예요.”

    주미혜는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서 주변을 살피는 모습을 보였다. 누군가 듣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도 난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시죠. 제인 마법사님, 타지 않게 부탁드려요.”

    정천우는 단약을 졸이는 솥을 가리키며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제인은 그의 행동이 장난이라는 걸 알면서도 얼굴을 붉혔다. 그가 입술까지 오물거리면서 윙크한 탓이다. 무당파 영지에서의 진하고 깊었던 키스가 떠올라 제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네, 네…… 제가 잘 보고 있을게요.”

    제인은 얼굴도 들지 못하고 솥 안의 주걱을 들고 졸아붙기 시작한 진액을 천천히 휘저었다.

    그러는 사이, 정천우는 주미혜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주미혜를 따라 안내된 곳은 역시나 영주 집무실이었다.

    영주 집무실에는 익숙한 얼굴의 중년 사내와 젊은 사내가 있었다. 주소용과 편안하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에서 정천우는 젊은 사내 역시 작위가 높다는 걸 대충은 눈치챌 수 있었다.

    젊은 사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나의 기운이 보통을 넘어서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중년 사내…… 그러니까 정영호보다도 훨씬 더 짙은 마나를 몸에서 발산하고 있었다.

    “하북팽가의 정천우가 영주님을 뵙습니다.”

    정천우는 가슴에 오른 주먹을 대고 격식에 맞춰 인사를 올렸다.

    “이 친구가 바로 그 전설의 계승자인가?”

    “누구……신지…….”

    정천우는 엉뚱하게도 젊은 사내가 자신의 인사를 받으면서 말을 걸자 고개를 갸웃하며 작은 목소리로 주미혜에게 물었다.

    “무림맹주님이세요.”

    “아! 그 검왕(劍王)이시라는 정진석 공작님?”

    “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진석 공작님.”

    정천우는 주미혜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한 번 군례를 올렸다.

    동대륙 최고의 강자라는 사람이다. 과연 실제로 보니 보통을 넘어서는 실력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긴장하지는 않았다.

    동대륙의 기사들과 자신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공을 숨길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 자신의 경지라면 무림맹주를 상대하는 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상대는 자신의 경지를 알지 못할 게 뻔하다. 동대륙의 가사들과 자신은 다르니까.

    정진석 공작은 정천우의 예상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의아해하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곁에 선 정영호를 바라보며 ‘정말 네가 말한 젊은 친구가 이 사람이 맞아?’라고 묻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정영호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진석 공작은 그래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천우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반갑네! 내가 현재 무림맹주를 맡은 정진석 공작일세.”

    “영광입니……다, 공작님!”

    정천우는 정진석 공작의 손을 잡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자신의 손을 꽉 움켜잡았기 때문이었다. 마나까지 사용해 손을 잡으니 마치 쇠 집게로 손이 조여지는 느낌이었다.

    정천우는 오성의 내공을 사용하고서야 겨우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 봐라? 그럼 어디!’

    정진석 공작은 속으로 놀라면서 다시금 마나를 일으켰다. 이번에는 좀 더 강하게 압박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천우를 어쩌지 못했다.

    대비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미 상대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 버린 이상 전혀 위협이 되질 않았다. 오히려 잔잔하게 미소까지 내비치면서 정진석 공작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쯤하시지요, 정진석 공작님.”

    정천우가 구성의 내공으로 손에 가해지는 힘을 해소하면서 말했다.

    정진석 공작의 얼굴이 대번에 변하고 말았다.

    거의 전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말은커녕 숨조차 함부로 갈아 마시기 조심스러울 만큼 힘을 쏟았다. 그런데 새파랗게 어린 눈앞의 애송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까지 하고 있다.

    정진석으로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이었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정진석 공작은 정천우의 손을 놓아주고는 놀라워했다.

    자신의 나이가 벌써 예순다섯 살이다. 오랜 수련 끝에 마나의 축복을 받아 젊어지기까지 했다.

    몸에 쌓은 마나만 놓고 보면 자신을 따를 자가 없을 거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일종의 자부심이다.

    정천우와 대결 아닌 대결을 펼치고 나니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무림맹에 신흥 강자가 생겨났다는 것은 축하할 만한 일이다. 정도련의 강자를 상대할 사람이 늘어났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아온 정천우가 자신과 비등한 마나를 쌓았다는 것에 대한 질투다.

    “자네! 나와 대련해 보지 않겠나?”

    “사양하겠습니다.”

    “어째서인가? 남들은 나와 대련해 보고 싶어서 안달을 부리는데?”

    “대련하게 되면 둘 중의 한 사람은 크게 다칠 것 같아서입니다. 물론 다칠 사람은…….”

    정천우는 침음을 흘리면서 말끝을 흐렸다. 대답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정진석 공작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정천우가 자신의 얼굴을 흘끔거리는 것을 보니,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 줄 어렴풋이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같은 강자와 싸우면 다치게 될 것이 두려운 모양이라 생각한 것이다.

    “살살 해 줄 테니 한번 겨뤄 보세! 그대와 같은 뛰어난 기사와 싸워 보는 것도 내겐 신선한 자극이거든!”

    “하지만…….”

    “어허! 이건 명령일세!”

    “……알겠습니다.”

    정천우는 공손하게 대답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키지 않았지만 동대륙 최고의 작위를 가진 자가 내리는 명령이다. 못하겠다고 버텨 봐야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이다.

    역천검의 손잡이를 더듬은 정천우가 쓰게 웃었다.

    ‘하여간 수컷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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