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15화 (115/200)
  • # 115

    Chapter 29. 치명적인 명령 (3)

    아미파의 영주성을 뒤흔드는 함성과 함께 정천우를 위시한 아미파의 기사단이 한꺼번에 이동했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 불이 일어난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단순한 착각만은 아니었다. 한 덩어리로 뭉친 양측 기사단의 투지와 살기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뜨거운 불길보다도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격돌에 대비하라! 뒤처지지 마라!”

    정천우가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아직 백여 미터의 거리가 남았지만 기사단을 이끌고 오는 남궁기정의 모습이 그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갑옷의 어깨 부분이 날카롭게 잘려 있었다.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지만 그의 기세는 상처에도 아랑곳없었다. 오히려 더 난폭해진 것 같았다.

    이마에 혈관이 도드라질 만큼 분노하고 있었다.

    멀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무당파 영지에서 대결했던 정영호보다 훨씬 위험한 기운을 풍기고 있다는 점이다.

    “마공(魔功)!”

    정천우의 입에서 탄성처럼 신음이 흘러나왔다.

    놈의 전신에 흐르는 기운이 범상치가 않았다. 그 뒤를 따르는 기사들도 일제히 마기를 드러내며 포효하고 있었다.

    “마교의 무리다! 모두 정신 바짝 차려!”

    검은빛의 마나를 뿜어 대는 남궁기정과 기사단을 발견한 정천우가 내공을 담아 사자후의 수법을 사용했다.

    뒤를 따르던 기사들은 정천우의 경고성을 듣자마자 경악했다. 마교도일 거라는 의심은 있었지만 설마 진짜로 마교의 무공을 배웠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마교에 얽힌 수많은 흉측한 소문들…… 마공을 익힌 자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동대륙의 기사들을 유린했는지 역사가 증명한다. 서대륙으로 살아서 도망친 자들은 그야말로 극소수였다.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마공을 익힌 기사의 수는 20여 명. 역사서에 기록된 것처럼 그들의 전신에서는 검은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 진짜 마교의 기사들이야!”

    “제길! 이대로…… 이대로 끝이란 말인가!”

    아미파의 기사들은 절로 몸이 떨렸다.

    소문만 무성하던 마교의 기사를 자신들이 직접 상대할 줄은 정말 몰랐으니까 말이다. 아미파의 미래를 위해서 끝까지 싸우리라 하던 의지가 적에 대한 두려움에 밀려 약해져만 갔다.

    하지만 정천우를 따르는 샤벨타이거 기사단원은 달랐다. 그들은 아미파의 기사들이 어떤 심정이건 관심 없었다. 비록 적은 수지만 샤벨타이거 기사단은 마교의 기사와 싸웠던 경험이 있는 이들이다.

    가장 먼저 소리친 것은 역시나 하스론이었다.

    샤벨타이거 기사단의 구심점이 되는 정천우를 제외하면 가장 영향력 높은 인물이 바로 그다. 정천우가 상대에게 집중하느라 기사단원에게 명령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눈치껏 나섰다.

    “샤벨타이거의 기사들이여! 삼재진을 구성하라! 견뎌라! 견디면 천우 경이 알아서 해결해 주실 것이다!”

    “우와아아아! 삼재진을 구성하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레밍턴과 슈라가 하스론의 곁으로 다가와 두 개의 방패를 들고 삼각 대형을 만들었다.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은 이미 질릴 대로 해 왔던 진법이기에 선배 기사들이 진을 구성하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따라 했다.

    마교에 대한 두려움?

    그따위 것에 흔들릴 그들이 아니다.

    마교의 기사들보다 몇 배나 더 지독한 정천우가 앞에서 달리고 있다. 신입 기사들은 경험해 보지 못한 마교의 기사보다 정천우가 더 무서웠다.

    “싸우자! 죽이자! 죽이자!”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은 삼재진을 구성하기가 무섭게 한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입으로만 소리치고 있지만 한 사람 두 사람 따라서 소리치자 서서히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리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그것은 순식간에 주변을 물들였다. 두려워하던 아미파의 기사들도 용기백배하면서 다시 창을 움켜잡았다.

    ‘새끼들…….’

    정천우가 살기를 흘리는 와중에도 싱겁게 웃음을 터트렸다.

    적에게 집중하느라 잠시 정신줄을 놓았는데 부하들이 알아서 잘해 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온전히 남궁기정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해 준 부하들의 마음을 받은 정천우가 창대를 움켜쥐고서 상체를 일으켰다. 전투마에 가속도가 붙어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간질였다.

    전신을 시커먼 기운으로 물들인 남궁기정이 마주 달려왔다.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흉신악살을 보는 것만 같았다.

    정천우는 전신의 내공을 창날에 집중하면서 상대의 공격을 기다렸다.

    상대의 빈틈을 찾아 눈을 번뜩이며 정천우가 마음을 안정시켰다. 손가락 끝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창대를 힘껏 움켜쥔 상태였다.

    “크아아아!”

    격돌의 순간 남궁기정이 괴성을 지르면서 한껏 뒤로 젖혔던 오른팔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시커먼 기운을 가득 담은 랜스가 정천우를 꿰뚫을 기세로 빛살처럼 빠르게 파고들었다. 때를 같이해 정천우의 창날이 누런빛을 흘리며 일직선으로 쏘아진 랜스를 후려쳤다.

    쾅!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남궁기정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드러났다. 랜스를 타고 전해 오는 거대한 압력에 손목이 빠져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뒤이어 밀려드는 뇌전의 기운.

    근육이 오그라드는 느낌에 남궁기정이 이를 으드득 갈아붙였다.

    말을 타고 행하는 기사대전은 한순간에 생사를 결정짓는다. 잠깐의 머뭇거림도 허용하지 않는 찰나의 미학이다.

    랜스가 상대의 창에 얻어맞고 옆으로 밀려난다는 것을 머리가 깨닫기도 전에 팔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손아귀를 빠져나가려는 랜스를 억지로 잡아채 정천우를 향해 휘둘렀다. 찌르기를 목적으로 하는 랜스였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아미파는 위력이 강한 차징보다 상대의 무기를 걷어 내고 반격하는 걸 좋아한다. 후속 공격이 있을 거라는 걸 알기에 남궁기정의 대응은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정천우.

    랜스가 미처 방향을 바꾸기도 전에 그의 창날은 남궁기정의 목을 향해 뻗어 가고 있었다.

    서걱!

    창에 장착된 세이버가 절묘하게 갑옷과 투구 사이를 가르면서 목을 깔끔하게 잘랐다.

    남궁기정의 몸은 랜스를 휘두르려던 동작을 기억하며 팔을 휘둘렀지만 그저 허우적거리는 것에 불과했다.

    “으아아압!”

    정천우가 기합을 내질렀다.

    남궁기정을 목을 벤 것을 기뻐할 틈도 없었다. 창 자루를 쥐고서 주변을 난도질했다.

    오호단문도 맹호난방(猛虎亂方)의 초식.

    신체 주위에 쏟아지는 공격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오호단문도의 네 번째 초식이었다.

    터더덕! 터덩텅! 파바박!

    남궁기정의 죽음을 목격한 남궁세가의 기사들이 마기를 흘리면서 정천우를 향해 마구 랜스를 찔러 댔다. 그러나 정천우의 창은 기사들의 랜스를 모조리 걷어 내며 전진했다.

    “크악!”

    “이런 개…….”

    “커헉!”

    정천우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랜스가 튕겨 나간 남궁세가의 기사들은 뒤이은 샤벨타이거 소속 기사들과 아미파 소속 기사들의 손에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자세가 흐트러진 상태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정예기사들의 공격을 막아 내는 건 무리였다. 마기를 풀풀 풍기던 기사들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자 그 뒤는 너무나 쉬웠다.

    “으아압! 차아!”

    맹호난방의 초식을 펼치던 정천우가 공세로 전환하면서 남궁세가의 기사들은 날벼락을 맞았다.

    초식이라고 할 것도 없는 마구잡이 공격이었다. 파고드는 랜스를 손으로 붙잡아 던지기도 하고, 랜스째 남궁세가의 기사를 두 동강 내기도 했다.

    눈앞에 거치적거리는 것은 모조리 베어 내겠다는 기세로 정천우가 뚫고 나아갔다. 마치 적들이 알아서 길을 터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남궁세가의 기사들은 맥없이 쓰러졌다.

    “굉장해!”

    “믿을 수 없어!”

    그의 뒤를 쫓으면서 방패로 적의 공격을 방어하던 슈라와 레밍턴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낫으로 밀을 베어도 저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정천우가 스치고 지나가는 남궁세가의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신체의 일부를 내놓기 바빴다.

    그의 뒤에 선 주미혜와 주소용이 분전하고 있었지만 정천우에 비하면 그저 평범한 수준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정천우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쟁의 신과 같았다.

    적어도 슈라와 레밍턴이 보기에는 그랬다.

    “슈라! 레밍턴! 정신 차려! 똑바로 안 막아?”

    “이크!”

    “우욱!”

    하스론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이 방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남궁세가의 기사들이 가속도가 붙은 랜스로 방패를 마구 두들겨 댔다. 하스론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목숨을 잃었을 게 분명했다.

    “새끼들아! 싸우다 말고 뭔 병신 짓거리야!”

    “넌 저거 안 보이냐?”

    슈라는 정천우가 세이버가 장착된 창을 이쑤시개처럼 휘두르고 적을 도륙하는 걸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하스론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달려드는 적의 가슴팍을 창날로 후려쳤다.

    “원래 그런 인간이잖아! 뭘 새삼스럽게 놀라고 지랄이야! 똑바로 안 막아?”

    하스론이 버럭 화를 내고는 달려드는 새로운 적의 랜스를 창으로 쳐 냈다.

    슈라와 레밍턴은 ‘원래 그런 인간’이라는 하스론의 말을 듣고는 급격히 수긍하며 다시 전투에 집중했다.

    샤벨타이거의 기사들이 놀라워하며 싸움에 집중하는 사이, 정천우는 앞을 가로막는 기사들을 유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슴을 노리고 날아오는 세 개의 랜스를 한 번의 창질로 떨쳐 내고는 창을 수평으로 휘둘러 3명에게 사이좋게 치명상을 입혔다.

    “우와아아아! 뚫었다! 나를 따르라!”

    정천우가 피 칠갑을 한 채로 소리쳤다.

    마지막 3명의 기사를 해치우는 순간 앞이 뻥 뚫리면서 아미파의 영지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게 느껴졌던 격돌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

    뒤를 돌아보면서 정천우가 말을 달렸다.

    다행히 아군…… 정확히 말하면 샤벨타이거 기사단의 피해는 미미했다. 대신에 아미파 기사단은 재격돌하는 와중에 다시 삼분의 일이 줄어들었다. 이로써 아미파는 처음 전력의 반이 이번 전투로 사라진 셈이다.

    남궁세가의 피해는 더 심했다.

    800명에 달하던 기사 중에서 100여 명만이 간신히 말을 타고 재격돌을 끝맺었다.

    전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 반해 아미파의 기사들은 400명이 넘게 남았고, 샤벨타이거 기사단은 어림잡아 80명 이상 살아남았다. 이제 기사 전력으로는 남궁세가가 아미파를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게 되었다.

    정천우와 샤벨타이거 기사단원을 포함한 아미파의 기사들은 성문 주변에 모여 질서정연하게 다시 대열을 갖추었다. 부상당한 자와 신체의 일부를 잃은 이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당당하기만 했다.

    정도련에서 두 번째로 강한 남궁세가와 기사대전을 벌여서 상대에게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줬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이제 적들이 자신들의 모자람을 알고 물러나기만 하면 이번 전쟁은 아미파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피를 뒤집어쓴 아미파의 기사들은 전투마 위에 당당하게 허리를 세운 채 남궁세가의 진영을 바라보았다. 남궁세가 역시 살아남은 기사들이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대열이 만들어지는가 싶었던 남궁세가의 기사들 사이에서 통곡이 터져 나왔다.

    “으어어어! 영주님!”

    “영주님이 전사하셨다!”

    비통한 목소리가 아미파의 성문 앞에 울려 퍼졌다.

    얼마나 참담하게 소리치는지 아미파의 기사들도 순간적으로 가슴이 울컥할 정도였다.

    남궁세가 기사들의 흐느낌 한동안 이어졌다. 그때까지도 아미파의 기사들은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기다렸다. 적들의 결정을 들은 뒤에 행동을 결정해도 늦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흐느끼는 소리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자 마침내는 주소용이 앞으로 나섰다.

    “이번 전쟁은 우리 아미파의 승리다! 남궁세가의 기사들은 이제 우리의 영지에서 물러나길 바란다!”

    주소용은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출혈을 한 손으로 막으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순간 남궁세가에서 들려오던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그러고는 기사단에서 한 사람이 전투마를 탄 채로 몇 걸음 앞으로 나왔다.

    “닥쳐라! 우리 남궁세가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겠다! 우리 영주님의 목숨값은 네놈들 전부의 목숨으로 대신하겠다! 모두 진격하라!”

    “와아아아!”

    남궁세가의 병사들은 기다리기라도 했던 사람들처럼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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