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12화 (112/200)
  • # 112

    Chapter 28. 아미파의 위기 (4)

    ***

    “두 분께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영주 집무실로 정천우와 샤칼을 초대한 주소용이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눈으로 6서클 마법인 기가 라이트닝이 발현되는 모습을 보았으니 당연한 태도였다.

    동대륙에서 6서클 마법사는 구경도 못한다. 애초에 6서클 마법사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자신의 눈앞에서 6서클의 마법이 펼쳐지는 순간, 주소용은 감동하고 말았다. 이처럼 대단한 마법을 구사하는 대마법사가 자신의 편이라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그래서 주소용은 최대한 정중한 태도와 어조로 자신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중이다.

    “흥! 주인님이 아니었다면 너 따위는 상대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자식, 싸가지 없이!”

    주소용의 말에 콧방귀를 뀌는 샤칼의 멱살을 잡고서 정천우가 으르렁거렸다.

    “제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주인님뿐입니다. 다른 인간들은 제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만큼은 강요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샤칼은 정색하며 정천우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굳은 신념.

    절대로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의지를 대변하는 눈빛이었다.

    “저기…….”

    주소용은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싸움을 말리려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잡는 바람에 나서질 못했다.

    고개를 돌린 주소용은 헤이먼이라고 소개한 드워프가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집무실까지 일부러 불렀는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도움을 청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정천우와 샤칼이 날을 세우는 게 불안하기만 했다.

    주소용이 불안해하는 와중에도 정천우와 샤칼의 눈싸움은 멈추질 않았다.

    “자꾸 이럴 거야? 편하게 가자, 좀. 삐딱하게 나가서 좋을 거 없잖아.”

    “전 주인님 외의 인간에게 명령을 들을 생각이 없습니다.”

    “인마,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라고 하잖아.”

    “주인님이 절 곁에 두고서 명령을 내리시면 될 일입니다.”

    “나도 싸워야지! 샤벨타이거 기사단은 어쩌라고?”

    “반 토막이 부단장입니다. 저 녀석도 잘 싸우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소용 후작님의 부탁은 절대 들어줄 수 없다?”

    샤칼의 멱살을 쥔 채로 정천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샤칼이 눈을 피하지 않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자신은 샤벨타이거 기사단을 이끌어야 한다. 마기를 풀풀 날려 대는 남궁세가 기사단을 상대하려면 선봉에서 싸우는 사람이 강해야 한다.

    헤이먼이 강하긴 하지만 안심하고 맡기기엔 부족하다.

    그전이라면 자신보다 헤이먼이 더 강했으니 상관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헤이먼보다 훨씬 강하다.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성안으로 주미혜를 데려오느라 도망치듯 말을 달리면서 휘둘렀던 몇 번의 창질만으로는 성이 차질 않았다. 그런데 샤칼이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니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한다. 자신과 엮이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노예가 되었으니까.

    엘프 중에서도 귀하다는 하이엘프인 데다가 7서클 마법을 마스터한 대마법사다. 그런 존재가 한낱 인간 따위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 상황에서 다른 인간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게 자존심 상했을 것이다.

    “후우…… 내가 생각이 좀 모자랐다. 미안하다.”

    정천우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제 입장도 생각해 주십시오, 주인님.”

    “맞아! 넌 말로는 안 되는 새끼였다는 걸 내가 잠시 잊고 있었다.”

    “그렇…… 네? 어, 어어! 주, 주인님!”

    “괜찮아, 금방 끝날 거야.”

    정천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샤칼을 멱살을 잡고서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무지막지한 구타음이 들려왔다.

    퍽! 뻐벅! 빡!

    “으악! 주, 주인님! 그만, 그마안! 제가 잘못했습니다.”

    “괜찮아, 넌 잘못한 거 없어. 그냥 싸가지가 없을 뿐이야. 맞다 보면 다 고쳐질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퍼벅, 퍽! 빠바박!

    “더흑! 으억, 억…… 살려 주십쇼! 제발! 제발…….”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네 맷집은 내가 잘 알아. 죽지 않을 만큼만 할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아아악! ФБЙЭбД…… 치료! 그만, 그마안! 으허허헝!”

    “오! 치료 마법 사용하셨어요? 오늘 길게 가시려고 작정하셨나 보네? 계속 마법 쓰세요. 흐흐흐!”

    뻐버벅, 퍽!

    구타음과 비명에 불안해진 것은 집무실 안에 앉은 주소용과 헤이먼이었다.

    주소용은 대마법사를 저런 식으로 다뤄도 아무런 후환이 없을까 염려스러워서였고, 헤이먼은 샤칼의 비명이 꼭 남의 일 같지 않아서였다.

    “괘, 괜찮을까요?”

    “……뭐, 죽이진 않을 겁니다.”

    “…….”

    주소용은 헤이먼이 하는 말에 황당함을 감추지 않았다.

    ‘죽이진 않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헤이먼의 표정이 너무나 처연해 보였다. 밖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릴 때마다 움찔하는 헤이먼의 모습에 그녀는 더욱 놀라고 말았다.

    두려움을 모르는 드워프가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주소용은 정천우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괜찮은 수준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건드리면 위험한 사람’으로 말이다.

    덜컥!

    그녀가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긴 사이, 드디어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우성치면서 난리를 피웠던 것과는 달리 샤칼의 모습은 말끔했다. 아마도 치료 마법을 사용해 몸을 회복시킨 모양이었다. 그는 잔뜩 눈을 부릅뜨고서 주소용 후작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왜, 왜지? 왜 저런 눈으로 날 바라보는 거지?’

    주소용은 뜨끔한 얼굴로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상대는 7서클의 대마법사다.

    자신의 마나 쉐도우로는 대마법사가 펼치는 실드 마법을 뚫을 수 없을 게 뻔하다. 게다가 블링크와 같은 마법을 사용해 이동한다면 잡을 수조차 없을 것이다.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자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샤칼의 모습은 주소용에게 엄청난 중압감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제발 치명적인 마법만 사용하지 말아 주기를 속으로 바랐다.

    마침내 샤칼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주소용은 하마터면 소변을 지릴 뻔했다. 흉흉하기 짝이 없는 샤칼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는 순간,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으니까.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리는 샤칼의 모습에 주소용은 눈을 꼭 감고 말았다.

    “부디 저 하나로 끝…….”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예?”

    주소용은 마지막을 생각하면서 체념하며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뜻밖의 얘기였으니까 말이다.

    자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오른팔을 무릎에 대고서 고개를 숙인 샤칼의 모습.

    주소용은 하마터면 왈칵 눈물을 쏟아 낼 뻔했다. 죽음을 각오했었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주인님의 뜻에 따라 그대의 명령을 한시적으로 따를 것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리고 명령이라니, 당치도 않아요. 부디 노여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주소용은 샤칼의 행동이 폭력에 기인한 것임을 알기에 최대한 그의 기분을 맞춰 주었다.

    과연 예상대로 고개를 든 샤칼의 입가에 미소가 맺혀 있었다. 정천우에게야 죽도록 얻어터졌지만 주소용의 간곡한 부탁에 조금은 기분이 풀린 것이다.

    “화나지 않았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삐딱하기만 했던 샤칼의 입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천우에게 개 맞듯이 얻어맞다가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니 감격스러웠다.

    “감사합니다. 하북팽가의 도움을 아미파는 결코 잊지 않을 거예요.”

    주소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천우와 샤칼에게 최대한 정중한 몸짓으로 인사했다.

    7서클의 대마법사와 실력을 가늠하기 어려운 기사단장이 자신의 편이다. 정천우가 이끄는 익스퍼트급 기사들로 구성된 기사단이 있으니 이번 전쟁을 수월하게 극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작전 회의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저희가 구상한 작전을 추후에 알려 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정천우는 절도 있게 군례를 올리고는 샤칼과 헤이먼을 이끌고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주소용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아미파의 열세라고 생각했는데 저들의 합류로 인하여 전력이 상승했다.

    마법 전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동대륙의 영지다. 7서클의 대마법사를 보유했다는 것은 전략무기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엄청난 전력이었다.

    주소용은 상쾌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어깨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 보여 주었던 의기소침한 모습은 이미 하늘 밖으로 날아간 상태다.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은 절망감이 아니라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

    “대단해!”

    “남궁세가가 어째서 정도련의 이인자 자리를 차지하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정천우가 감탄하며 중얼거린 말을 잭슨이 맞장구치며 놀라워했다.

    일개 영지가 지닌 전력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못해도 2만 5천 명은 넘어 보이는 엄청난 병력이었다.

    하북팽가와 무당파를 모두 합쳐도 총병력이 1만 5천이 될까 말까다. 그런데 남궁세가는 단독으로도 두 영지를 합친 병력보다도 많았다.

    ‘아미파가 겁을 먹는 게 당연한 병력이야.’

    아미파가 어째서 주미혜를 급하게 불러들였는지 대충 짐작이 갈 만한 규모의 병력이었다.

    저런 대규모 병력을 지닌 남궁세가와 싸울 순 없었을 게 분명하다. 아마도 주미혜를 보여 주어 시간을 끌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결혼한 몸이라고 했는데…….”

    “네? 누가요?”

    “주 소저…… 아니, 주미혜 경은 이미 남편이 있는 몸이라고 들었거든. 그런데 아미파에서는 남궁세가가 싸움을 걸자마자 그녀부터 찾았어. 조금 이상하지 않아?”

    정천우는 여행하는 내내 궁금했던 의문을 다시 꺼냈다. 그래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것이지만 의문은 생각보다 빨리 해결되었다.

    “그이는 남궁세가의 손에 목숨을 잃었어요.”

    “주미혜 경…….”

    정천우는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잔뜩 붉어진 눈으로 남궁세가의 진영을 노려보는 주미혜가 어느새 그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그래서 강해지고 싶다고 한 겁니까?”

    “한 놈이라도 더 죽여서 그이의 넋을 위로하고 싶었어요.”

    “으음…….”

    정천우는 신음을 흘리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복수를 위해서 강해지고 싶었다는 여자다.

    중원에서는 복수가 당연한 일이다. 복수를 포기하면 인간 취급도 못 받을 정도다. 그녀의 눈에 깃든 강렬한 복수의 염원이 그대로 느껴졌다.

    팽선웅 백작의 당부가 있었지만 잠시 머릿속에서 지웠다.

    결혼한 지 한 달 되었다고 했다. 이것저것 날짜를 빼면 거의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정천우는 자신의 품속에 손을 넣었다.

    “육합권은 다 배우셨습니까?”

    “네, 그걸 배우면 강해진다고 했잖아요. 샤벨타이거 기사단의 기사단원이 수련하는 걸 보고서 모두 배웠어요. 제가 알던 육합권과 차이가 있긴 하더군요. 수련하고 나면 상쾌해지는 느낌이었죠.”

    “받아요.”

    정천우는 품속에서 꺼낸 단약 한 알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주미혜에게 ‘먹어 보면 안다.’라고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나머지는 그녀가 수련한 그동안의 성과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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