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11화 (111/200)
  • # 111

    Chapter 28. 아미파의 위기 (3)

    “쏴라! 돌을 던져라! 기름통을 떨어뜨려! 불화살! 불화살!”

    망루 위에선 난리가 났다.

    적이 물러날 기미가 보이자 더욱 확실하게 아군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성벽 아래는 화염으로 뒤덮여 사람들의 비명과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쇠창살로 만들어진 문이 닫히고 적들이 물러난 뒤에야 망루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아미파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힘겹게 숨을 헐떡였다. 승리의 함성을 지를 힘조차 없는지, 그저 적을 물리쳤다는 것에 만족하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 게 고작이었다.

    짧다면 짧은 전투였다. 그러나 아미파의 영지 성 앞은 엉망이었다.

    7서클 마법 락 스톰이 쓸고 간 자리는 흉물스럽게 파여 있었다. 회오리에 휩쓸려 분쇄된 인간의 육신과 피가 사방에 흩어진 상태다. 기름통과 화염 마법으로 인하여 곳곳에서 불이 활활 타올랐다.

    남궁세가의 병력은 도저히 진영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하기야 인간의 피와 육신이 흩어져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곳에서 잠을 잘 만큼 비위가 좋지는 않을 것이다.

    진영을 수습해 뒤로 자리를 옮기느라 남궁세가 병력이 꼬물거리는 게 정천우의 눈에 들어왔다.

    ‘한 방만 더 먹이면 끝내주겠는데?’

    정천우는 아까 샤칼이 사용했던 7서클 마법을 사용하면 더욱 큰 피해를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천우가 샤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샤칼이 그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고개를 짤짤 흔들었다.

    “주인님, 무리입니다. 7서클 마법은 일주일에 한 번이 한계입니다.”

    샤칼은 불쌍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7서클 마법은 자신의 마나를 한계까지 사용한다. 단순히 마나를 한계까지 사용하는 게 아니라 정신력도 마찬가지라서 후유증으로 두통을 유발한다.

    마나를 모두 회복했다고 해도 정신력이 받쳐 주지 못하면 7서클 마법을 연달아 사용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보통의 마법사들은 자신의 수준보다 한두 단계 떨어지는 마법을 여러 번 사용하는 걸 더 선호하는 편이다.

    샤칼이 무리해서 7서클의 마법을 사용한 것은 큰 거 한 방 터트리고 쉴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설마 아미파의 영지 성으로 들어가 마법을 또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정천우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샤칼을 향해 입맛을 다셨다. 고위 마법사라기에 뭐든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별로였다.

    “쳇! 그까짓 거 한 번 했다고 그 꼴이라니…… 마법이란 거 참 별로네.”

    “이익!”

    샤칼은 자신의 실력을 의심받자 욱하는 마음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7서클 마스터면 서대륙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몸이다. 5서클 마법사도 귀한 동대륙에서 자신 정도면 최고의 대우를 받아도 시원치 않다.

    그런데 이런 개무시라니…….

    하지만 정천우의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이 샤칼의 자부심을 단번에 뭉갰다. 반항해 봐야 되돌아오는 건 구타밖에 없으니 덤벼 봐야 손해다.

    ‘어휴…… 똑똑한 내가 참는다, 참아!’

    샤칼은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주먹에 힘을 풀었다.

    “그 주먹은 뭐야? 잘하면 치겠다?”

    “헤헤헤…… 제가 어떻게 주인님한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지 몸 상태를 점검한 것뿐입니다. 하지만 어렵겠습니다. 마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아서 7서클 마법은 어렵습니다. 그냥 자잘한 걸로 계속 공격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래, 그렇게라도 하면 놈들의 수를 줄일 수 있겠지. 저쪽에 애들 모여 있는 거 보이지? 거길 집중 공격해!”

    “예썰! ЁФБЙ…… 파이어 웨이브(Fire Wave)!”

    샤칼은 부글부글 끓는 분노를 감추며 차분하게 마법을 사용했다. 마나와 정신력을 고려해 3서클의 마법 중에서 그나마 다수의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좌표를 지정해 사용한 탓에 남궁세가 병력이 밀집된 곳에서 불의 파도가 생겨났다.

    “좋아! 저거면 상당한 피해를…… 에계?”

    기쁜 얼굴로 밑을 내려다보던 정천우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불의 파도가 기세 좋게 앞으로 나가다가 ‘피시식’ 하고 꺼졌다. 기대했던 정천우로서는 허탈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게…… 저쪽에도 마법사가 있는 모양입니다.”

    “아깐 못 막았잖아?”

    “그거야 제가 사용한 것이 7서클 마법이라 저놈들이 막을 수 있는 수준의 마법이 아닙니다.”

    샤칼은 자신의 능력을 알아달라는 듯이 고개를 약간 치켜들며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정천우의 얼굴은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까는 효과가 있었는데 지금은 효과가 없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지금은?”

    “이번 마법은 3서클의 마법이라 저쪽에 3서클 마법사 정도만 있어도 어렵긴 하지만 막을 수 있습니다.”

    “뭘 망설여? 더 강한 걸로 해 봐.”

    “그, 그게…… 지금은 제 상태가 좀…….”

    “쳇! 별 볼 일 없네, 마법이란 거.”

    정천우가 혀를 차며 등을 돌렸다.

    어차피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없다. 커다란 피해를 줄 수 있는 마법이 무용지물이 되었으니까.

    “제, 제길! 7서클 마법사를 똥 취급하다니! 미친 거 아니야?”

    샤칼은 망루 밑으로 내려가는 정천우를 바라보며 툴툴거렸다. 그러자 계단을 내려가던 정천우가 발걸음을 멈추고 등을 돌렸다.

    “인마! 다 들려!”

    “쳇!”

    샤칼은 ‘쓸데없이 귀만 밝아!’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

    “그대가 이번 호위의 책임자라고 들었어요.”

    “맞습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천우는 중년으로 보이는 여인에게 약식으로 군례를 올렸다.

    여인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평소에도 다른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던 사람 특유의 분위기였다. 영지에서 제법 높은 위치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반가워요. 저는 아미파의 영주 주소용 후작이에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정천우입니다. 샤벨타이거 기사단을 이끌고 있습니다.”

    정천우는 상대가 아미파의 영주라는 사실에 이번엔 조금 더 정중하게 군례를 올렸다.

    주소용은 그런 정천우가 마음에 들었는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성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건 아미파였다. 그러나 정천우가 기름통을 던져 화염 공격을 해 주지 않았다면 퇴각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는 기사단장.

    웬만한 기사들도 한 번 집어 던지면 근육이 쑤실 만한 무게의 기름통이다. 그런 걸 정확한 위치에 너무나 쉽게 던졌다.

    게다가 엄청난 위력을 보여 준 7서클의 락 스톰 마법.

    태어나서 처음 보는 고서클의 마법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7서클 마스터가 호위대에 있다는 의미다.

    다른 영지보다 약체로 취급받는 곳에서 이처럼 엄청난 전력을 지원했다는 것은…….

    “하북팽가의 호의를 잊지 않겠어요. 우리 아미파는 오늘 이후로 하북팽가가 도움을 요청하면 무조건 돕기로 하겠어요. 이건 저 주소용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어요.”

    “감사합니다, 주소용 후작님.”

    ‘차라리 돈을 줘! 쓸데없는 짓거리하지 말고!’

    정천우는 속마음과 다르게 정중히 인사했다. 하북팽가를 돕든지 말든지 그거야 아미파의 마음일 뿐이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주소용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지금 우리 아미파는 위험에 처해 있어요. 그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남궁세가의 병력은 이제 얼마 안 남았지 않습니까? 저런 상태라면 지금 아미파의 모든 병력을 이끌고 나가기만 해도 궤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맞아요. 하지만 저들은 남궁세가 병력의 일부에 불과해요. 선발대라고 보면 되죠. 지금 저들을 치러 나가면 즉시 도망칠 게 분명해요.”

    주소용은 사뭇 진지한 어조로 대답하며 정천우를 쳐다보았다. 도움이 절실하다는 분위기가 얼굴에 그대로 묻어났다.

    자신이 이끄는 샤벨타이거 기사단이라고 해 봐야 106명에 불과하다. 아직 확인은 하지 않았지만 적진을 뚫고 나오면서 희생자가 생겼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전체적으로 놓고 봤을 때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째서 주소용이 자신에게 이렇듯 절실하게 얘기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정천우에게 주소용은 마저 뒷말을 이었다.

    “그대와 함께 있는 7서클의 대마법사님께서 도와만 주신다면 남궁세가와 싸우는 게 그다지 힘들 것 같지는 않아요. 그래서 부탁하는 거랍니다. 대마법사님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실 수 있게 말씀 좀 잘해 주세요.”

    “아…….”

    정천우는 주소용이 자신보다 샤칼의 도움을 더 원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때마침 샤칼이 헥헥대면서 망루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정천우의 눈에 띄었다.

    “샤칼! 이리 와 봐!”

    정천우가 커다란 목소리로 샤칼을 불렀다.

    그러자 샤칼은 언제 지쳐 있었느냐는 듯이 달려왔다. 늦으면 누가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있는 힘껏 달려와 정천우의 앞에 섰다.

    “부르셨습니까!”

    샤칼은 일부러 있는 힘껏 뛰어와 부동자세를 취했다.

    아까 망루 위에서 투덜거리며 욕한 걸 그가 들었기에 불안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다. 한 번 찍힌 상태에서 뭉그적거렸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이분은…….”

    주소용은 정천우가 왜 샤칼을 불렀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이 녀석이 아까 그 마법을 썼던 녀석입니다.”

    “……네?”

    주소용은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나 의심스러웠다. 대마법사쯤 되는 존재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으니까.

    그녀가 생각하는 대마법사란 로브를 입고서 근엄한 얼굴로 사람들을 상대하며 언제나 느긋하게 움직이는 존재들이었다. 강자의 여유라는 말이 어울리는 존재가 바로 대마법사였으니까 말이다.

    어디를 봐도 샤칼에게는 대마법사의 품격이라는 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 녀석이 대마법사입니다. 인마, 뭐라고 말 좀 해 봐!”

    “마, 맞습니다. 제가 7서클 마법사 샤칼입니다.”

    “…….”

    주소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7서클 대마법사라는 말을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어느 누가 7서클 마법을 구사하는 대마법사에게 ‘녀석’이라든지 ‘인마’라든지 하는 호칭으로 부른다는 말인가!

    “자식아! 주소용 후작님께서 못 미더워하시잖아! 하여간 뭘 해도 어리바리하니까 누가 널 대마법사로 알겠냐?”

    “주, 주인님, 저 대마법사 맞습니다. 매일 주인님이 구박만 하니까 그렇죠. 누가 절 이렇게 만들었는지 모르십니까?”

    샤칼은 볼멘소리로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주소용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샤칼의 입에서 튀어나온 호칭 때문이다.

    정천우더러 ‘주인님’이라고 불렀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7서클의 대마법사가 뭐가 아쉬워서 노예를 자처한다는 말인가!

    주소용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눈앞의 정천우는 자신에게 대마법사를 소개해 줄 마음이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하북팽가에 대한 그녀의 전폭적인 지지 문제도 조금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샤칼에게선 전혀 대마법사다운 느낌을 받을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주소용은 마음이 상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내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다.

    “ЦфЖбДЁЙПБЫ…… 기가 라이트닝!”

    콰과광! 콰광!

    정천우의 구박에 울컥한 샤칼이 6서클의 마법인 기가 라이트닝을 허공에 발사했다.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과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기분 나빠 하며 입맛을 다시던 주소용은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나 다음에 일어난 일은 그녀를 더욱 얼이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정천우의 주먹이 샤칼의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다.

    빡!

    “아악! 왜 때립니까!”

    “이 새끼가! 너 반항하는 거지! 놀랐잖아! 일부러 그런 거 맞지!”

    “에이, 쒸! 대마법사라니까 안 믿은 저 인간 여자가 문제 아닙니까!”

    샤칼은 뒤통수를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볼멘소리를 했다. 주소용은 두 사람의 황당한 행동에 그저 입만 뻐끔거렸다.

    ‘대체 이 사람들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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