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09화 (109/200)
  • # 109

    Chapter 28. 아미파의 위기 (1)

    “이러고 살아야 하나…….”

    “그러게 욕을 해도 눈치 봐 가면서 했어야지.”

    “반 토막,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거냐?”

    “위로는 개뿔. 정신 좀 차리라는 말이다, 내 얘기는!”

    헤이먼이 입술을 실룩이며 툴툴거렸다.

    욕하다가 걸리는 바람에 자기까지 정천우에게 정신교육을 당할 뻔했다. 다행히 빨리 떠나자는 말 때문에 넘어갈 수 있었지만 아까의 상황을 되돌려 보면 섬뜩한 일이었다.

    모난 놈 옆에 있으면 함께 정을 맞는다더니, 자신의 처지가 딱 그 꼴이다. 그런데도 샤칼은 정신 못 차리고 투덜거리기만 한다.

    적당히 달래 주고 넘어가려고 했더니 샤칼의 눈에 짜증이 가득 묻어나 있었다. 헤이먼으로서는 가뜩이나 기분이 더러웠는데 샤칼이 불을 지른 격이다.

    억눌러 참으려던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기껏해야 50년이면 된다고 지껄인 건 너였어! 그런데 뭐 하는 짓이야? 50년 내내 두들겨 맞아야 정신 차릴래?”

    “저 자식 마스터가 되면?”

    “뭐?”

    “그렇잖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빌빌거리던 자식이었어. 그런데 점점 강해지잖아. 지금은 너보다도 더 강하다며? 저러다가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면? 그땐 어떡할 건데?”

    샤칼은 정천우를 가리키며 뚱한 얼굴로 툴툴댔다.

    짜증을 내던 헤이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샤칼의 시선을 따라 말을 타고 앞서 가는 정천우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다른 기사들과 별다를 거 없는 모습.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안다.

    다른 기사들보다 오히려 약해 보인다. 육체 밖으로 발산되는 마나를 통제할 수 있기에 남들에게는 평범하게 보인다.

    하지만 싸움에 돌입하면 다른 사람이 된다. 약하게만 보였던 마나는 몇 배나 증폭하면서 난폭해진다. 그런 일은 마스터의 경지를 개척해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수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샤칼의 우려를 헛소리라고 일축해 버리기엔 그동안 보여 주었던 정천우의 변화가 너무나 극심하다. 만약이지만, 정말 만약이지만 정천우가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다면 목숨이 두 배 이상 길어진다.

    그건 헤이먼이나 샤칼에게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음먹었던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을 정천우에게 복종하면서 살아야 할 테니까 말이다.

    “에이…… 내가 아무리 재수 없는 놈이라고 해도 그렇게 재수 없을라고.”

    “그런데 진짜 저 자식이 마스터가 되면?”

    불안한 표정으로 샤칼이 물었다. 정말로 정천우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불안감이 그의 얼굴에 잔뜩 묻어났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 인간의 수명이 최소한 200년으로 늘어난다. 육체가 대자연의 마나와 동화되어 끊임없이 활력을 불어넣기에 노화를 늦추는 것이다.

    샤칼은 생각만으로도 소름 끼친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기랄! 어쩌겠어? 팔자려니 하고 충성해야지.”

    “씨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진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게 더 끔찍하지.”

    “닥쳐! 나 순간 오싹했어!”

    샤칼은 헤이먼을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해 자살 충동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저런 괴팍한 인간 밑에서 200년을 지내야 한다면 그 전에 미쳐 버리나 않으면 다행이다.

    만약은 만약일 뿐, 아직 현실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샤칼은 애써 끔찍한 상상을 끊었다.

    두 사람이 절망스러운 상상에 빠져 있는 동안, 정천우는 눈을 번뜩이며 주변의 기운을 살피고 있었다. 팽선웅 백작이 호위하는 도중에 남궁세가에서 기습할 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지루한 이동만 계속 이어질 뿐, 기습의 전조는 없었다. 아무리 기감을 높여도 근방에서 이질적인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평온하다면 평온한 여행이었지만 들은 얘기가 있었던 정천우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아미파의 영지성이 보이는 위치에 도착하는 시점까지.

    “뭐 이렇게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아무 일도 없잖아!”

    “인마,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은 일이잖아. 왜 짜증을 내고 지랄이야?”

    옆에서 지켜보던 제럴드가 별 미친놈 다 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정천우가 얼마나 신중에 신중을 기했는지 제럴드로선 알 턱이 없었다. 그가 보기엔 정천우가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5일 동안 이동하는 내내 기감을 끌어올리며 이동해야만 했던 정천우로서는 허탈함을 넘어서 짜증이 솟았다. 밤에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주변을 살펴야만 했었으니까.

    “젠장…… 내가 미쳤지. 그냥 잠이나 푹 잘걸.”

    정천우가 허탈하게 웃으며 푸념했다.

    그제야 정천우의 눈을 본 제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럴드는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된 모습에 의구심이 들었다. 분명 불침번은 다른 사람이 섰는데 어째서 정천우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는지 이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의아한 생각을 접었다. 아미파에 거의 도착한 상태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제럴드의 귀에는 정천우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더럽게 많이 몰려왔네. 잠깐…… 주미혜 경은 유부녀라고 하지 않았나?”

    이미 결혼한 사람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는 게 의심스러웠다.

    정천우는 침음을 흘리면서 뒤쪽에 자리 잡은 주미혜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미파의 영지성 앞에 진을 친 남궁세가를 경멸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건가? 뭐…… 내가 알 바 아니지. 출발!”

    정천우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손을 높이 들었다. 샤벨타이거 기사단은 언덕을 내려와 질서정연하게 열을 맞추었다.

    대열의 중앙에는 주미혜가 한껏 긴장한 얼굴로 끼어 있었다.

    남궁세가의 병력이 진을 친 곳과 200여 미터 떨어진 지점에 다다랐을 때, 정천우가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우리는 하북팽가의 샤벨타이거 기사단이오! 아미파의 영지를 찾아왔으니, 그대들은 길을 터 주시오!”

    정천우가 사자후의 수법으로 크게 소리쳤다.

    원래라면 ‘비켜, 이 새끼들아!’라고 했겠지만 상대의 숫자가 만만치 않은 관계로 성질을 좀 죽였다.

    결정적으로, 남궁세가의 기사단 쪽에서 마기(魔氣)가 느껴졌다. 다행히 하나의 기사단 쪽에서만 마기가 흘러나왔다. 그렇다고는 해도 위험한 것만은 분명하다.

    저들과 싸우는 동안 나머지 기사단과 병력이 들이닥치면 106명으로 이루어진 샤벨타이거 기사단은 눈 녹듯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누구냐! 누가 감히 남궁세가의 사람들에게 길을 비키라 하는가!”

    정천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렁찬 고함이 남궁세가가 진을 친 곳에서 튀어나왔다.

    위풍당당(威風堂堂)!

    정천우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우람한 체구의 중년 사내가 튀어나와 소리쳤다.

    어깨가 떡 벌어졌으며, 팔과 다리가 길쭉길쭉하면서도 근육으로 뒤덮여 비정상적으로 길게 느껴지진 않았다. 중원으로 치면 전형적인 외공의 고수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몸에서 느껴지는 마기만 아니라면.

    “우리는 하북팽가의 사람들입니다. 아미파를 찾아왔으니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길을 열어 주시길 바랍니다.”

    정천우는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부탁했다.

    분명 마교와 엮인 놈일 게 뻔했지만 지금은 싸움을 벌이기보다 아미파와 합류하는 것이 훨씬 우선이었다.

    “하북팽가? 아미파가 겨우 하북팽가에 구원을 요청했다는 말이냐? 으하하하! 이거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로구나! 귀찮다, 귀찮아! 그냥 보내 줄 테니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라!”

    커다란 덩치의 사내는 목젖이 보일 만큼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저 개자식이?”

    정천우는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하북팽가를 욕해서가 아니다. 하북팽가를 욕했다고 해서 울컥할 정도로 의리가 깊은 것은 아니니까. 단지 사람을 깔아 보는 사내의 태도가 거슬릴 뿐이다.

    “천우야, 우리 그냥 뒤로 빠지는 게 안 나을까? 쪽수가 너무 많잖아.”

    “천우 형님, 저도 제럴드 형님 의견에 찬성입니다. 일단은 후퇴했다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럴드와 잭슨이 육칠천에 이르는 남궁세가의 병력에 기가 질려 눈살을 찌푸리며 정천우를 말렸다.

    저런 대병력을 상대로 106명의 기사…… 주미혜까지 합친다고 해도 107명의 기사가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배알 꼴린다고 달려들었다가는 자살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정천우는 옆에서 말리자 더 기분이 더러워졌다. 개무시를 당하고서 꼬리 말고 튀는 건 영 찜찜하다.

    “샤칼!”

    “예, 예! 주인님!”

    “네가 할 수 있는 제일 강한 마법이 뭐야? 한꺼번에 최대한 많은 놈을 골로 보낼 수 있는 걸로!”

    정천우가 일그러진 얼굴로 이를 갈면서 말하자 샤칼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긁적이며 자신이 아는 마법을 골똘히 생각했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샤칼과 달리 잭슨과 제럴드는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위험하다고 말리는데도 기어코 사고를 치려는 정천우에게 확 질려 버린 것이다.

    “음…… 저렇게 밀집해 있다면 락 스톰(Rock Storm)이 딱일 거 같기는 합니다.”

    “얼마나 강한데?”

    “반경 20미터 크기의 회오리가 칩니다. 회오리에는 돌덩이가 가득 들어서, 안에 있는 생명체는 돌덩이에 맞아 핏덩이가 될 겁니다.”

    “그거 마음에 드네. 준비해!”

    “네!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ЙЭЖФжБЙ…….”

    샤칼은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나를 끌어모으면서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야! 야! 이건 좀 아니잖아! 어쩌려고!”

    제럴드는 기겁한 얼굴로 정천우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기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돈을 잘 벌기 때문이다. 자살하기 위해서 기사가 된 것이 아니었기에 제럴드는 이런 미친 짓은 말리고 싶었다.

    “걱정하지 마! 마법 하나만 쏘고 우린 튄다! 새꺄! 우린 기사야! 그냥 튀는 건 쪽팔리잖아!”

    “이런, 제기…… 그냥 후퇴하는 거나 마법 쏘고 후퇴하는 거나 뭐가 달라? 기사단이 마법으로 공격하고 튀는 게 더 쪽팔린 거 아니야?”

    “자식이? 말을 해도 꼭 그렇게밖에 못해? 저 자식들 괴롭혀야 내 속이 시원해서 그런다. 닥치고 튈 준비나 해!”

    정천우가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제럴드의 입을 막았다.

    그러는 사이, 샤칼의 몸에서 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주변의 마나가 마구 요동을 치고 있었고, 샤칼은 힘겨운 표정으로 계속 주문을 이어 나갔다.

    “무슨 개 같은 짓거리를 하는 것이냐! 죽고 싶어 환장했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남궁세가의 사내가 크게 고함을 질렀다.

    곧바로 몇몇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꼬물거리며 앞으로 튀어나오는 게 눈에 띄었다. 샤칼이 준비하는 마법을 방어하기 위해서 마법사들이 앞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정천우는 사내가 뭐라 지껄이든 관심 없었다. 어차피 한 방 크게 먹이기로 마음먹었기에 후회 따윈 하지 않는다.

    남궁세가의 사내가 계속 뭐라 지껄이자 정천우가 배에 힘을 주었다.

    “닥쳐! 개자식이 어디서 이 몸한테 이래라저래라 염병하고 지랄이야?”

    정천우는 남궁세가의 사내를 향해 잔뜩 비아냥거리고는 샤칼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샤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의미였다.

    정천우가 턱짓으로 남궁세가가 있는 곳을 향해 까딱거리자 샤칼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마나가 일시에 튀어나왔다.

    “락 스톰(Rock Storm)!”

    우렁찬 고함이 샤칼의 입을 뚫고 튀어나왔다.

    쿠구구구구!

    샤칼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대량의 마나와 주변을 휘돌던 대자연의 기운이 만나면서 굉음이 흘러나왔다.

    “후퇴! 후퇴하라!”

    정천우가 때를 같이해 크게 소리쳤다. 샤벨타이거 기사단은 곧바로 정천우의 명령에 따라 말 머리를 돌렸다.

    샤칼의 마나와 대자연의 기운이 합쳐지면서 앞으로 뻗어 나갔다.

    드득! 콰드득!

    쿠구구구구!

    마나와 마나가 얽히면서 굉음이 더욱 커졌다. 뒤엉키는 마나가 일정한 방향성을 이루면서 점차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천천히 회오리치는 것 같았던 마나의 기류가 속도를 빨리하면서 땅속에 박혔던 돌덩이가 툭툭 튀어나와 회오리에 갇혔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덩치를 불려 남궁세가를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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