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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108화 (108/200)
  • # 108

    Chapter 27. 주미혜 (3)

    “네, 보기 좋네요.”

    “에……?”

    앙칼진 표정으로 쏘아붙였던 제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멍하게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정천우에게 꼬리 치던 여자의 반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싱거웠으니까 말이다.

    “그 기분 알아요.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주미혜가 왼손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결혼……하셨어요?”

    “한 달 전에요. 보고 싶은 거 참는 중이에요. 전 강해지고 싶거든요.”

    “…….”

    주미혜가 방긋 웃으며 말하자 제인은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저기…….”

    “아악!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정천우가 말을 걸어오자 제인이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부여잡으면서 괴로워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주미혜의 반응으로 보아 오해라는 게 분명하다. 무안하고 쑥스러워 정천우의 얼굴을 쳐다보기 두려웠다.

    “제인 마법사님?”

    “모, 몰라요! 아악! 안 들려요!”

    제인은 정천우의 목소리가 다시 자신의 뒤통수를 울리며 들려오자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얼굴을 가리며 정천우를 지나쳐 도망치듯 뛰어가 버렸다.

    “이게 무슨…….”

    얼굴을 가린 채 뛰어가는 제인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천우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달려와 안기더니, 황홀하도록 깊고 깊은 키스를 퍼붓고는 바람처럼 도망쳤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인식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순진하기도 하고요. 두 분, 참 잘 어울려요.”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자신과 정천우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서 질투했던 모양이다.

    자신 역시 남편과 결혼하기 전까지 딴 여자가 접근하기만 해도 화를 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자신의 모습과 멀어져 가는 제인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미혜가 입을 가리고는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이거 참…….”

    정천우는 주미혜가 웃음을 터트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에 난처하기만 했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그녀 앞에서 제인과 진한 키스를 나눈 것을 떠올린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흥분해서 제인의 행동에 호응해 버리고 말았다. 지나고 보니 민망하고 쑥스러운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주미혜가 자신을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짓는 것만은 참아 내기가 어려웠다. 뭐라도 말해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입을 열었다.

    “강해지고 싶다고 하셨죠?”

    “네, 강해지고 싶어요. 우리 아미파는 기사들이 여자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렇다고 남자 기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 영지의 남자들은 이상할 정도로 검술에 재능이 없거든요. 그래서 여자들이 강해지지 않으면 버티기가 어려워요.”

    “좋습니다. 그럼 먼저 육합권을 수련하도록 하십시오.”

    “육합권이요?”

    “네, 강해지는 비밀은 거기에 있습니다. 육합권은 간단한 체조니까, 저희 수련기사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서 하시면 됩니다. 육합권에 익숙해지고 난 다음에 다시 얘기하는 걸로 하죠.”

    “……알았어요.”

    “그럼 전 이만.”

    정천우는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는 급하게 자리를 떴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같이 있기가 창피했으니까.

    ***

    무당파 영주 집무실.

    팽선웅 백작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진 가운데, 하북팽가의 수뇌부들이 회의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주군의 안색이 좋지 않으니 수뇌부 사람들 역시 마음이 무거웠다. 무슨 일로 저렇게 침묵하는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모든 수뇌부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팽선웅 백작의 입이 열렸다.

    “오늘 이렇게 모이라고 한 것은 무림맹에서 하북팽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전해 온 소식 때문이오.”

    “드디어!”

    “오오!”

    “무림맹에서 이제야 하북팽가를 인정하는 모양입니다.”

    팽선웅 백작이 입을 열기가 무섭게 수뇌부 사람들이 저마다 탄성을 발하며 떠들어 댔다.

    무림맹에서는 그동안 하북팽가에 거의 소식을 전하지 않았었다. 무당파에 가로막혀 협조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하북팽가의 전력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던 탓도 있다.

    사실은 하북팽가의 전력을 우습게 생각했던 게 가장 큰 이유다. 하북팽가가 반드시 필요했다면 무당파에 압박을 넣어서라도 도움을 구했을 것이다. 하북팽가의 전력이 지나갈 수 있게 길을 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이제껏 병력을 요청하지 않았다. 하북팽가의 인물이 무림맹의 기사단에 배치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다.

    굳이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무림맹에서 하북팽가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렇다는 것은 이제야 무림맹이 하북팽가를 인정했다는 말과 같다. 있으나 마나 한 영지로 취급받던 설움이 한순간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조용히 하시오! 그렇게 좋아할 만한 소식은 아니니 진정들 하시오. 정도련(正道聯)이 마교 세력과 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을 전해 왔소. 예전부터 조금씩 우려하던 문제였지만 이번엔 심각한 모양이오.”

    팽선웅 백작은 한층 더 무거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속이 타는지 옆에 놓인 물을 한 잔 마시고서야 다음 말을 이어 갔다.

    “정도련이 어떤 놈들인지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오. 지난번에 천우 경을 통해 확인되었지만, 인근에 위치한 화산파 놈들도 마교와 관련 있다는 걸 알 거요.”

    “설마 우리더러 화산파를 공격해 달라는 건…….”

    팽우룡이 불안한 눈빛으로 팽선웅 백작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상처가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의 안색은 아직도 핏기가 부족한 상태였다. 그런 혈색을 한 채로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이니 수뇌부들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명목상이지만 하북팽가 최고의 기사가 저런 상태다. 지금 화산파와 싸우라 하면 고민이 커질 수밖에 없다.

    화산파는 동대륙의 중견급 영지다. 예전의 하북팽가라면 싸우기보다는 피할 생각부터 해야 했을 영지다. 지금도 싸우라면 싸워야겠지만 버거운 상대다.

    수뇌부 사람들은 불안한 얼굴로 팽선웅 백작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행스럽게도 그건 아니오. 하지만 대비해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소. 무림맹의 요청…… 정확히 말하자면 아미파의 요청이오. 현재 손님으로 있는 주미혜 경을 속히 아미파로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소.”

    “……?”

    실컷 분위기를 잡아 놓고는 기껏 한다는 얘기가 주미혜의 호위 문제였다는 것에 수뇌부 사람들은 김샌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궁세가에서 무력시위를 하는 중이라고 하오. 아직 병력을 집중하지 못한 상태라 조용히 처리하려고 하는 것 같소.”

    “남궁세가의 무력시위와 관련해서 주미혜 경이 필요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팽만리가 의문을 드러냈다.

    남궁세가의 무력시위와 주미혜 사이에서 연관성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째서 남궁세가의 무력시위를 무마하는 데 그녀가 필요한 것인지 이유가 알고 싶었다.

    “남궁세가의 영주인 남궁기정 후작이 주미혜 경을 탐낸다고 하오. 삼 개월 전쯤에 청혼했다는데 그걸 거절당해 앙심을 품고 공격해 왔다는 것이오.”

    “단순히 호위 문제라면 그다지 걱정할 것은 없다고 봅니다. 주미혜 경 또한 실력 있는 기사라 호위를 많이 붙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수수 경,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네. 남궁세가 놈들이 이동하는 도중에 기습해 온다면 어쩌겠나? 지난번 화산파 놈과 같은 마교도라면?”

    팽선웅 백작의 말을 듣는 순간, 팽수수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마교의 기사는 끔찍하다. 아무리 자신의 실력이 늘었다고 해도 그렇다. 마교의 기사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괜찮네. 나는 주미혜 경의 호위로 샤벨타이거 기사단과 정천우 경을 보낼 생각일세. 통신을 담당할 마법사로는 제인 마법사로 정했다네. 천우 경, 그대는 내 뜻을 받아 주겠는가?”

    팽선웅 백작은 반드시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듯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정천우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왜 또 난데? 사람이 그렇게도 없나?’

    “꼭 제가 가야만 합니까?”

    “자네만 한 적임자가 없어서 그런 것이니 이해하게. 우룡 경을 보냈으면 좋겠지만, 알다시피 몸이 아직 완쾌되지 않아서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팽선웅 백작은 난처한 얼굴로 정천우에게 거절하지 말아 달라는 듯한 분위기를 팍팍 뿜어냈다.

    “후…… 알겠습니다.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정천우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군례를 올렸다. 새끼들이 꼭 귀찮은 일은 자기한테 떠넘긴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미파에 가면 비급을 볼 수 있을 테니 자네한테도 그리 손해인 것만은 아닐 거야.”

    “아…… 감사합니다, 영주님.”

    정천우는 그제야 얼굴을 펴고는 진심을 담은 군례를 올렸다.

    그가 수긍하는 모습을 확인한 팽선웅 백작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풀어졌다. 현재 하북팽가는 해야 할 일이 많다. 호위 임무에 다른 기사들이 투입되면 여러 곳에서 문제가 생긴다.

    수뇌부급 기사들은 한정되어 있는데 무당파와 하북팽가를 합치면서 해야 할 일이 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천우가 호위 임무를 맡아 준다면 모든 게 해결된다. 기사 양성 임무를 끝낸 정천우라면 당분간은 할 일이 별로 없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덤으로 7서클의 대마법사와 용맹한 드워프가 호위에 끼게 된다. 생색내기 좋은 구성이라 아미파에서도 하북팽가를 다시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일이 마무리된 것에 기뻐하며 팽선웅 백작은 회의를 이어 나갔다. 물론 겉으로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유지한 상태였다.

    ***

    “씨발! 내가 왜 인간 계집 따위의 호위를 해야 하는 건데?”

    “귀병신! 그만 투덜대라, 귀에 딱지 앉겠다.”

    “그렇잖아! 인간 놈한테 엮인 것도 서러운데 엉뚱한 계집까지 호위해 줘야 하냐?”

    인간 따위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도 개망신이다. 이제는 다른 인간을 보호해 주기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샤칼은 인상을 벅벅 긁으면서 마차에 기대어 투덜거렸다.

    “진짜 더러워서 내가! 대체 왜 이러고 살아야 하는데?”

    “저, 저기…… 귀병신아…….”

    “왜! 넌 짜증 나지 않아?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인간이 성격 툭툭 건드리는데 아주 돌아 버리겠다.”

    “야, 야! 뒤, 뒤!”

    헤이먼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샤칼을 말렸다. 슬슬 뒷걸음질을 치는 헤이먼의 행동에서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욕설을 토해 내던 샤칼이 파르르 떨었다.

    샤칼이 천천히 몸을 돌리자,

    거기에는 사신이 있었다.

    “뭐, 이 새꺄?”

    “그, 그게…….”

    살벌한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정천우에게 손사래를 치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요즘 교육이 뜸했지? 붕어냐? 닭대가리야? 얼마나 쥐어 터져야 정신 차릴래? 그래, 오늘 기분도 그런데 좀 맞자, 망할 자식아!”

    “자, 잠깐만요! 잠깐! 어, 어! ФБЙЭбДЁ…… 브, 블링크!”

    검집을 손에 쥐고 다가오는 정천우에게 손사래를 치던 샤칼은 급하게 주문을 외우며 마법을 발휘했다.

    “후와! 뒈질 뻔…….”

    휭, 휭, 휭!

    빡!

    “커헉!”

    안도하던 샤칼은 정천우가 던진 검집에 맞아 눈에서 불이 번쩍거렸다.

    ‘씨, 씨발! 텔레포트를 쓸걸…….’

    아득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샤칼이 뒤늦게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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