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07화 (107/200)
  • # 107

    Chapter 27. 주미혜 (2)

    ***

    [분위기가 바뀌었구나.]

    “공작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제야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수정구 안에 나타난 사내를 향해 정영호가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무언가 깨달은 게 있는 모양이지? 보기 좋다.]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제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다 공작님 덕분입니다.”

    [하하하! 언젠가는 자네도 느끼게 될 일이었으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게.]

    수정구 너머로 사내가 호탕하게 웃으며 흡족해했다.

    마법 통신으로도 상대의 기세를 느낄 수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오랜 세월 함께 지내 온 둘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전설의 계승자가 변수가 될 것입니다.”

    [맹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만큼?]

    “그럴 수도 있습니다.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그거야 시험해 보면 알 일이지. 자네가 그런 판단을 내릴 정도의 인물이라…… 나이가 어떻게 되던가?]

    “기껏해야 스물 안팎이었습니다. 결투를 신청해서 제가 패했습니다.”

    [자네가? 그런데 얼굴은 무척 편해 보이는군. 혹시 그 친구와 결투하면서 깨달음을 얻은 것인가?]

    수정구 속의 사내가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네, 공작님께서 왜 그때 저를 질책하셨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네한테 깨달음을 준 젊은이라…… 일단 빨리 돌아오게. 그가 정말 맹의 계획에 필요한 인물인지 검토해 보세.]

    “알겠습니다. 그럼 서둘러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세.]

    말을 마치기 무섭게 수정구의 영상이 끊어졌다.

    “저 칼 같은 성격은 정말 적응하기가 힘들다니까.”

    정영호는 수정구를 쳐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라도 하려고 했지만 상대가 이미 통신을 끊은 뒤였다.

    “그 친구한테…… 조금은 가혹하려나?”

    정영호는 수정구를 품속에 챙기며 중얼거렸다.

    ***

    “전 남겠어요.”

    주미혜가 빙그레 웃으며 짧게 말했다.

    승전 축하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타는데, 주미혜가 돌아가길 거부하며 정천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살짝 얼굴만 확인하는 정도였기에 사람들은 주미혜의 시선이 누구를 향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다.

    ‘저 계집애가?’

    제인은 주미혜를 욕하며 아랫입술을 윗니로 깨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자신은 보았다. 주미혜의 시선이 정천우에게 갔다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지난번 결투도 따지고 보면 저 계집애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물론 제인의 질투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본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이 마음에 둔 정천우를 쳐다보는 주미혜가 싫었다. 더 싫은 건 왠지 자신보다 주미혜가 더 아름다워 보인다는 점이다.

    “미혜 경은 어째서 남겠다는 것이오?”

    정영호는 기이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북팽가에 그녀가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자 주미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곳의 기사들이 어떻게 검술을 수련하는지 보고 싶어서요. 요즘 제 실력이 정체되어 있어요. 하북팽가의 기사가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배우고 싶어요.”

    “그렇다면 아미파를 지날 때 주소용 후작님께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소.”

    정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에 올랐다.

    그 뒤를 따라 공지대사가 마차에 한쪽 발을 올렸다. 아직도 부상이 낫지 않아 조금은 불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마차에 오르려던 공지대사는 고개를 돌려 정천우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너!”

    “왜!”

    정천우가 정색하며 말을 받았다.

    공지대사와는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만 남았기에 말투부터가 곱게 나오지 않았다. 곁에 팽선웅 백작이 있지 않았다면 욕설을 퍼부었을지도 몰랐다.

    공지대사와 정천우의 눈빛이 허공에서 뒤얽혔다.

    눈썹을 꿈틀거리던 공지대사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다음에는 술로 승부를 보자. 훌륭한 친구를 알게 되어 기쁘다.”

    말을 마친 공지대사는 창피했는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마차 안으로 쑥 들어갔다.

    “자식…… 난 비싼 술 아니면 안 마신다!”

    정천우가 피식 웃으면서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마차 밖으로 공지대사의 손이 쑥 튀어나와 검지와 엄지를 붙이면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슬쩍 손을 한 번 흔들어 준 정천우가 팽선웅 백작을 향해 몸을 돌렸다.

    “충! 그럼 이만 기사들을 분류하러 가 보겠습니다.”

    “항상 수고가 많다는 걸 알고 있다네. 조금만 더 고생해 주게. 자네한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것 잊지 않기를 바라네.”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천우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서대륙에 가는 게 그의 목적이었으니까.

    무당파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은 비급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무당파의 비급을 찾아 벽력대제가 남긴 글을 읽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만큼의 내용은 없었다. 키아벨리아스라는 놈이 서대륙의 ‘암흑 산맥’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아직 서대륙의 땅을 밟아 보지도 않았는데 암흑 산맥이 어디 있는지 따위는 중요치 않다. 일단 서대륙에 도착해서 고민해도 늦지 않을 일이니까.

    팽선웅 백작에게 인사하고는 그렇게 서대륙에 관한 고민에 빠져들며 걸었다.

    “응?”

    정천우는 생각에 잠기며 걷다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고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한 정천우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자신의 뒤를 주미혜가 따라오고 있었다.

    “어째서 제 뒤를 쫓는 겁니까?”

    “관심 있어서요.”

    “…….”

    순간적으로 주미혜가 진미령과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남자한테 대뜸 ‘관심 있다’고 말하는 그녀가 무척이나 당돌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눈빛을 보고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녀가 말하는 ‘관심’이란 게 어떤 종류의 것인지 대충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 팽선웅 백작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 보면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정체된 경지를 진보시킬 실마리를 찾는 것.

    정천우는 주미혜가 자신을 따라오는 이유를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괜히 가슴이 울렁거렸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래, 진 소저는 중원에 있어. 그냥 비슷하게 닮은 사람일 뿐이야.’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는 주미혜를 바라보면서 정천우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진미령과 닮은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진미령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정천우의 얼굴은 무표정하게 변했다. 불필요하게 감정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저와 수련기사들을 관찰하겠다는 뜻입니까?”

    “네, 이곳 수련기사들의 수준을 보고 놀랐어요. 어떻게 대부분의 수련기사가 익스퍼트급일 수가 있죠?”

    주미혜가 의문을 느낀 것은 그 점이다. 수련기사 중에는 익스퍼트급을 넘어서 베테랑급에 거의 근접한 인물까지 끼어 있으니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팽선웅 백작이 비밀을 엄수하라고 했기에 단약의 존재를 알 리 없으니 그녀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원래 하북팽가의 수준이 그 정도는 됩니다. 단지 자신의 힘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저는 힘을 깨달을 수 있도록 약간의 도움을 준 것에 불과합니다.”

    “저한테도 도움을 주실 수 있나요?”

    “…….”

    정천우는 얼굴을 붉히며 묻는 그녀에게서 다시 한 번 진미령의 흔적을 발견하곤 애써 감정을 추슬렀다.

    그러고는 주미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를 유추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을 줘 보시겠습니까?”

    “손……이요?”

    “네, 불편하시면 그만두십시오.”

    “아니, 아니에요. 여기…….”

    주미혜는 갑자기 왜 손을 달라는 것인지 의아했지만 순순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정천우는 그녀의 손목에 엄지를 대고서 내공을 불어넣었다.

    비록 동대륙의 사람들이 단전을 사용할 순 없다지만 내공이 흘러가는 길은 발달해 있다는 사실을 안다. 물론 육체를 단련한 기사와 마나를 수련하는 마법사들에게만 국한되긴 하지만 말이다.

    ‘역시나…….’

    정천우는 그녀의 몸속에 쌓인 불순한 마나를 감지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순한 마나가 정상적인 마나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었다.

    내공을 넣어 주미혜의 내부를 관찰하는 동안에 그녀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었다.

    “으음…… 앗! 죄송해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던 주미혜가 더욱 붉어진 얼굴로 사과했다.

    정천우에게 손목이 잡히는 순간, 기이한 느낌의 마나가 흘러들어 와 온몸을 누볐다. 처음에는 놀라움이었다. 다른 사람의 몸에 마나를 집어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정천우의 마나가 전신을 휘도는 순간 짜릿짜릿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마나가 주미혜의 회음혈(會陰穴)을 지나면서 묘한 자극을 준 것이다. 주미혜는 제대로 말조차 섞어 보지 못한 남자 앞에서 자신이 실수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천우는 그녀의 내부를 관찰하고는 딴생각에 빠졌다.

    ‘이걸 줘, 말아?’

    정천우는 주미혜가 상당한 수준의 마나를 간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키운 수련기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단련되었다. 굳이 하북팽가의 무인과 비교하자면 최소한 팽만리 정도의 수준은 넘는다. 육합권을 가르치고 단약을 먹인다면 베테랑급의 수준에 올라설 것이 확실했다.

    팽선웅 백작이 단약의 존재를 숨기라고 했지만 주미혜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자꾸 중원에 두고 온 진미령을 생각나게 하니까.

    정천우가 그렇게 고민하는 동안에 어디선가 ‘뽀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저 여우 같은 계집애!”

    정천우를 따라가려다가 주미혜가 따르는 모습에 살금살금 뒤를 쫓았던 제인이었다. 그녀는 정천우가 주미혜의 손을 잡는 모습에 눈이 반쯤 돌아갔다.

    자신이 찜한 남자가 다른 여자의 손을 잡는 건 그나마 참아 줄 만했다. 손 한 번 잡는다고 해서 뭔가 이상한 관계로 발전되는 것만은 아니니까 말이다.

    주미혜가 정천우에게 손을 잡히고서 얼굴을 붉힐 때부터 낌새가 수상했다. 게다가 이상야릇한 신음까지 흘리면서 정천우를 유혹하니 도저히 봐 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남자가 마음에 들어도 그렇지, 저런 식으로 천박한 행동까지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제인은 귀에서 연기가 흘러나올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가만히 놔둔다면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옷까지 벗을 기세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제인은 씩씩거리면서 일부러 발걸음 소리가 나도록 걸어갔다.

    “어? 제인 마법사님.”

    정천우가 다가오는 제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화색을 지었다.

    그녀 때문에 일이 꼬이긴 했지만 그녀에게 나쁜 감정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그녀에게 끌리는 중이라고 봐야 한다. 진미령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말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진다’는 말이 절실하게 와 닿는 중이었다. 그래서 정천우는 주미혜의 문제로 고민하던 중에 제인이 다가오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제인은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였다. 도끼눈을 뜨고 걸어온 그녀는 정천우에게 와락 안겨 들고는 다짜고짜 입맞춤했다.

    “읍! 으읍…….”

    갑작스러운 제인의 행동에 당황했던 정천우는 입술이 전하는 부드러움에 취하고 말았다.

    길고 긴 입맞춤을 끝낸 제인이 정천우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러고는 주미혜를 향해 고개를 획 돌렸다.

    “천우 경은 내 남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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