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06화 (106/200)
  • # 106

    Chapter 27. 주미혜 (1)

    “진짜…… 곤륜의 검?”

    정영호는 멍한 얼굴로 정천우를 쳐다보았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곤륜의 검’이라는 말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의 정신적 지주이자 무림맹 최고의 실력자인 검왕(劍王) 정진석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자신이 서대륙의 마나 수련법을 통해 베테랑급의 기사가 되었을 때 들었던 말이다. 당시 정진석은 그에게 ‘곤륜의 검을 버렸구나!’라며 한탄했었다.

    하지만 정영호는 발끈했었다. 곤륜의 무공을 배울 때보다 훨씬 편하게 마나를 쌓을 수 있었고, 마나 쉐도우를 더 쉽게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발끈하는 자신의 모습에 고개를 가로젓던 정진석의 모습과 지금 정천우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곤륜의 검은 진중한 가운데에도 현묘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정영호 후작님의 검술은 그저 파괴력에 의존할 뿐이었습니다. 힘으로 밀고 나오는 상대는 더 강한 힘으로 눌러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그렇군.”

    정영호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 내며 탄성을 발했다. 어째서 정진석 공작이 안타까워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검술의 신묘함을 버리고 마나를 앞세운 파괴력에만 의존해 왔다. 검의 위력이 강해진 것은 확실하지만 검 자체에 대한 이해도는 떨어진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이제껏 마나를 앞세워 상대를 이겨 왔으니까 말이다.

    “이거, 자네 버릇을 고쳐 주려고 했는데 망신만 당한 셈이 되었어. 하하하!”

    “망신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오히려 한 수 배웠습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천우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덕분에 내공이 늘어났으니 어찌 보면 정영호와 대결한 게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40년 내공을 쌓는 데 오래 걸렸을 것이다. 40년 내공을 쌓은 데다가 대주천까지 완성했으니 이제는 내공을 더욱 빠르게 늘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어제처럼 정신이 아득해질 때까지 많은 양의 단약을 복용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정천우가 그런 생각으로 말했지만 정영호는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전력을 기울인 공격을 힘으로 찍어 누른 상대다. 어제 보여 준 실력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의미다.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었지만 정천우의 눈은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좀 민망하지만, 나도 이번 대결이 큰 도움이 되었다네. 하북팽가에 영웅이 났음을 인정해야겠어.”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정천우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워했다.

    정영호는 그런 정천우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악수한 뒤에도 손을 놓지 않고 정영호가 정천우의 손을 들어 올렸다.

    “와아아아! 하북팽가 만세! 천우 경 만세!”

    두 사람을 지켜보던 하북팽가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난리를 피웠다.

    약체로 평가받는 하북팽가다. 그런데 무림맹의 기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도 강자 순위 50위 안쪽의 기사를 상대로 말이다.

    하북팽가 기사들의 얼굴은 기쁨으로 물들었다. 거기에는 무당파에서 하북팽가로 전향한 기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매일같이 자신들을 혹독하게 굴리던 정천우의 실력이 이처럼 대단한 수준일 줄을 몰랐던 것이다.

    “제길…… 내일은 더 난리겠지?”

    “그렇겠지. 내일은 실력에 따라서 기사단 편성한다고 했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악착같이 팽씨 성을 받고 만다!”

    환호성이 대연무장을 뒤흔드는 가운데 정천우에게 교육받는 기사들은 저마다 수군거렸다. 자신들도 정천우처럼 무림맹의 기사들과 당당히 싸우는 날을 고대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느새 무당파 출신 기사들은 하북팽가와 천천히 동화되어 가는 중이었다. 겉으로는 투덜대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모든 하북팽가의 사람들이 감동한 것은 아니었다. 정천우의 승리에 우거지상을 하며 투덜거리는 두 존재가 있었다.

    “저 병신 같은 새끼는 이기지 못할 거면서 왜 싸우자고 깝죽댄 거야?”

    “귀병신아, 저 인간 실력 좋아. 아마 나랑 싸워도 크게 밀리지 않을걸?”

    헤이먼은 투덜거리는 샤칼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영호의 실력은 진짜였다. 만약 자신이 단약을 먹고 실력이 늘어나기 전이었다면 감히 덤빌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영호가 보여 주었던 막강한 마나 쉐도우를 막아 낸다는 건 지금 상태로도 쉬운 일이 아니다.

    “너와 싸워도?”

    “그래.”

    “저 자식이 강해졌다는 거냐?”

    샤칼은 놀란 얼굴로 정천우를 가리켰다.

    분명 어제만 해도 헤이먼보다 한참이나 부족한 실력이었다. 단지 ‘수호의 펜던트’로 얽힌 맹세 때문에 정천우를 어쩌지 못할 뿐이었다.

    그런데 헤이먼이 정영호조차도 자신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는 것은 헤이먼이 정천우와는 아예 상대가 안 된다는 의미다.

    샤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헤이먼에게 고개를 돌렸다.

    “맞아, 저 녀석 강해졌어. 그것도 아주 많이.”

    “말도 안 돼! 저 개자식이? 확 뒈져 버려야 할 저 망할 자식이? 그럼 어떻게 죽…… 커헉! 으윽…….”

    샤칼은 흥분해서 욕설을 터트리다가 가슴을 움켜쥐고서 괴로워했다.

    믿기지 않는 사실에 황당해하다가 그만 살심(殺心)을 드러내고 말았다. ‘마나의 맹세’가 발동하면서 심장을 둘러싼 마나 서클이 고통을 가했다.

    헤이먼은 그런 샤칼을 보면서 고개를 짤짤 흔들었다.

    “7서클 마스터란 놈이 왜 그렇게 생각이 짧냐? ‘마나의 맹세’를 또 잊은 거야? 마음 곱게 써라, 귀병신아.”

    헤이먼은 한심한 기색이 가득 묻어나는 음성으로 혀를 찼다. 그러나 샤칼은 심장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버티느라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

    “참 나…… 은근히 신경 쓰이네?”

    정천우가 입맛을 쩍 다시며 중얼거렸다.

    지금껏 훈련시켜 왔던 무당파 출신의 수련기사들의 실력을 확인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능력에 따라 하북팽가의 기사단에 배치할 생각이었다. 기사단에 배치할 인원을 선별해야 하는 자리에 달갑지 않은 손님이 지켜보고 있다는 게 정천우는 꺼림칙했다.

    “하하하! 난 신경 쓰지 마시게. 그저 자네가 키운다는 기사들의 모습을 보러 왔을 뿐이니까 말일세.”

    정영호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정천우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신경이 안 써지겠수?’

    정천우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정영호만 있다면 그래도 좀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반갑지 않은 사람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 그의 심사가 복잡한 것은 나머지 한 사람 때문이다.

    아미파의 주미혜.

    중원에 두고 온 진미령을 닮은 여자.

    그녀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기사들을 쳐다보는 모습이 신경 쓰였다. 자꾸 그녀를 몰래몰래 훔쳐보게 된다. 그래서 자꾸 수련기사들의 움직임을 놓친다는 게 문제다.

    “그것밖에 못하나!”

    정천우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수련기사들이 긴장하며 자세를 다시 잡았다. 이젠 정천우의 목소리가 조금만 높아져도 몸이 저절로 반응한다.

    몸에 힘을 주고 다시 롱소드를 움켜쥔 수련기사들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부터 더욱 긴장해야 할 때였다. 실수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으니까.

    분명한 건!

    저런 목소리일 때의 정천우에게 걸리는 순간 좋은 꼴 못 본다는 것이다.

    “천우 경, 박력 있으시네요.”

    “예? 예…….”

    주미혜가 살포시 웃으며 말하는 모습에 정천우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얼굴이 진미령과 더욱 닮아 보였다.

    “너, 너, 너! 열외!”

    정천우는 애써 주미혜에게서 관심을 끊으며 붉은색 몽둥이로 수련기사를 지목했다.

    지목받은 기사는 잔뜩 인상을 구기며 대열을 이탈했다.

    초기에 제외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 가지다. 곧바로 샤벨타이거 기사단에 소속된다는 뜻!

    지금은 하북팽가의 기사단 서열에 따라 기사들을 분류하는 중이고, 샤벨타이거는 가장 말단의 기사단이다. 제일 실력이 떨어지는 기사들이 배치되는 게 당연하다.

    문제는 샤벨타이거 기사단의 단장이 정천우라는 점이다. 저 끔찍한 인간을 단장으로 모시고 생활해야 한다는 게 그저 암담할 뿐이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 되어 열외된 기사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쪽에 열을 맞춰 앉았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앉아 있으면 정천우가 난리를 피워 대기 때문이다.

    ‘대단하잖아? 이게 정말 최약체로 평가받는 영지의 기사들이라고?’

    정영호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수련기사의 모습에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동작 하나하나에 힘이 넘쳤고, 마나를 사용하는 것이 너무나 익숙해 보인다. 이 정도면 무림맹의 정식기사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런 기사들이 얼마 전까지 수련기사라고 한다. 아니, 지금도 수련기사의 신분이다. 선별 작업이 끝나면 정식기사가 될 테지만 말이다.

    “오호단문도 준비!”

    “하앗!”

    정천우의 기합에 맞춰 수련기사들이 기수식을 잡았다. 모든 수련기사가 롱소드의 검 끝을 지면에 향했다. 무당파의 기사들이 하북팽가의 일반 병사나 배우는 기수식을 잡았다.

    배운 지 얼마 안 되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수련기사들의 자세는 나무랄 데 없이 안정적이었다.

    “일 초식 맹호수참(猛虎手斬)부터 칠 초식 노호출격(怒虎出擊)까지 펼친다. 틀리거나 자세가 흐트러진 놈들은 차례대로 빠진다. 검술은 언제까지라고?”

    “지쳐 쓰러져 죽을 때까지!”

    수련기사들은 악에 받친 목소리로 크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정천우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 마음에 든다! 그럼 시작!”

    “차앗!”

    우렁찬 기합과 함께 기사들이 오호단문도를 펼치기 시작했다.

    여러 명이 움직이고 있음에도 마치 한 사람이 펼치는 것처럼 동작이 일치하고 있었다.

    오호단문도를 세 번째로 반복할 때쯤부터 탈락자가 나왔다. 전력으로 마나 쉐도우를 사용하면서 오호단문도를 펼치는 것이기에 마나 고갈로 균형이 흐트러진 것이다.

    ‘정말 놀랍군! 누가 이런 기사들을 수련기사라고 할 수 있을까!’

    정영호는 수련기사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하기 바빴다.

    그것은 주미혜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련기사들이 보여 주는 경지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자신이 소속된 아미파에서도 저런 수준의 기사들은 많아야 100명 안팎의 수준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수련기사에 불과하다니, 놀랍기 짝이 없었다.

    “미혜 경은 어찌 생각하시오?”

    “놀라워요. 앞으로 하북팽가는 번성할 것 같네요.”

    주미혜는 자신이 느낀 점을 솔직하게 말했다. 겉으로 보이는 전력만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정식기사급 전력을 300이나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원래 하북팽가의 기사단까지 합치면 전력은 더욱 높아진다.

    정영호를 가볍게 제압한 정천우라는 기사단장을 생각하면 상승효과는 무시하지 못한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데다가 젊기까지 하니, 하북팽가가 번성할 것이라는 주미혜의 말은 당연한 일이다.

    엄지와 검지로 턱을 받친 채 기사들의 선별 과정을 지켜보는 정영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정천우라…… 벽력대제의 후예…… 전설의 계승자…….’

    정영호는 계획을 수정해야 하는 것은 아닐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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