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05화 (105/200)
  • # 105

    Chapter 26. 동대륙의 무공 (5)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전신에서 풍기는 기운이 달라졌다. 어제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정규기사급의 마나를 보유한 정도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 모습은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최소한 정규기사단의 부단장 이상의 실력자로 느껴졌다.

    실제로 정천우는 하북팽가의 샤벨타이거 기사단의 단장이었지만 그로서는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전설의 계승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통신을 통해 들었지만 자세한 정보는 듣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힘을 숨기고 있었던 것인가!”

    달라진 정천우의 모습에 정영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하루 사이에 실력이 급증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런 경우는 거의 일어나기 힘들었으니까. 그렇다는 것은 일부러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실력을 숨기려면 자신보다 실력이 뛰어나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의 밖으로 내보인 실력은 그래도 자신보다 낮거나, 잘 쳐줘야 자신과 엇비슷한 정도였다.

    그런 실력으로 자신에게 정체를 숨길 만큼 밖으로 흘러나오는 마나를 절제할 수 있을 거라곤 믿기 어려웠다. 그래서 묻는 거지만 정천우는 대답 대신에 역천검을 뽑았다.

    챙!

    “말싸움하러 나왔습니까?”

    “……그렇지. 말싸움이나 하자고 나온 건 아니지.”

    정천우가 역천검을 뽑아 들자 정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싸울 때지, 한가하게 대화나 주고받을 때가 아니다. 주변에 늘어선 사람들이 둘의 대결을 기다리고 있다. 일단 정천우를 쓰러뜨린 다음에 궁금증을 해결하는 편이 빠르겠다고 생각했다.

    ‘이거 은근히 긴장되네.’

    정천우는 오호단문도의 자세를 잡으면서 역천검을 바닥에 늘어뜨렸다.

    일류 무인에 해당하는 기운을 풍기는 놈이다. 동대륙에 와서 처음 보는 강자다. 오죽하면 무리해 가면서 대주천을 이루려고 했겠는가!

    이제 제대로 된 동대륙의 무공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은근히 흥분되었다. 일류 무인 수준의 기운을 뿌려 대는 동대륙의 기사는 중원의 무공을 어떤 식으로 사용할지 기대되었다.

    중원에서 곤륜파라고 하면 무당파와 비견되는 거대 문파다. 그들의 무공은 도가(道家) 계열의 문파로 심후한 내공과 뛰어난 검법을 자랑한다.

    그래서인지 정영호의 무기는 화려하진 않지만 제대로 만들어진 게 느껴지는 롱소드였다.

    ‘방패?’

    정천우는 상대가 방패를 드는 걸 확인하고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곤륜파의 무공 중에서 방패를 사용하는 무공이 있었는지 예전에 주워들었던 기억까지 더듬었다. 그러나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방패를 들어 가슴을 가리고 롱소드를 앞으로 내민 모습은 무공의 초식이라기엔 조금 어색한 느낌이었다.

    정천우는 눈을 돌려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도 정영호가 방패를 든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

    “어딜 보는가! 나, 철혈검 정영호는 공지대사 남작을 대신해 그대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정영호가 마나를 섞어 크게 소리쳤다.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정당한 대결임을 알리려는 목적이었다.

    “나 정천우는 철혈검 정영호 후작의 대결을 받아들이는 바입니다.”

    정천우는 대결의 절차에 따라 정영호에게 대답하고는 살짝 고개를 숙여 주었다.

    정영호 역시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전신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상대가 공격을 준비하려고 힘을 모으자 정천우도 내공을 움직여 역천검에 집중했다.

    뇌전의 기운이 불쑥 일어나 역천검을 뒤덮었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마나 쉐도우가 형성되었다. 대주천을 이룬 효과가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어제까지의 정천우라면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대주천을 이룬 지금은 중간 과정이 생략된 것처럼 곧바로 마나 쉐도우가 만들어졌다.

    ‘저렇게 능숙하다니…….’

    정영호는 한 박자 늦게 마나 쉐도우를 만들어 내며 속으로 감탄했다.

    정천우가 마나 쉐도우를 만들어 내는 속도가 너무나 빨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신도 전력을 다해 마나 쉐도우를 만들 걸 하는 후회가 생겨날 정도다. 왠지 처음부터 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찜찜한 기분이 들어 입맛이 썼다.

    “간다!”

    찜찜한 기분을 털어 내기라도 하듯 정영호가 크게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방패가 열리면서 롱소드가 앞으로 쭉 뻗었다. 날카로운 기운을 간직한 마나 쉐도우가 정천우를 꿰뚫어 버릴 듯 파공음을 만들었다.

    정천우는 기수식을 잡기가 무섭게 찌르고 들어오는 롱소드를 쳐 냈다. 마나 쉐도우끼리 마주치면서 파공음과 함께 불똥이 튀었다.

    ‘큭! 저런 덩치로 이런 힘이라니!’

    강렬한 첫 일격에 손아귀가 저릿했다.

    호리호리한 체구에서 어떻게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의문을 느끼기도 전에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정영호가 롱소드를 좌우로 휘두르면서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캉! 카강! 캉!

    정천우는 연신 뒷걸음질을 치면서 롱소드를 쳐 냈다.

    모든 공격이 막히자 당황한 것은 정영호였다. 자신이 즐겨 쓰는 수법인 십 연속 공격이 모조리 막힐 줄은 몰랐다. 공격이 막혀서 놀랐던 것도 있지만 그럼에도 정천우의 자세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것에 더 놀랐다.

    “이야압!”

    정영호가 기합을 지르며 왼손을 크게 휘둘렀다.

    방패 끝에 맺힌 마나 쉐도우가 정천우의 몸통을 노렸다. 하지만 그런 공격은 정천우에겐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체를 숙이며 정영호의 다리를 공격했다.

    “어엇!”

    당혹성을 흘린 정영호가 뒤뚱거리면서 몸을 뒤로 뺐다.

    그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다리를 쓸어 오던 역천검이 순간적으로 방향을 바꾸더니 곧장 턱을 노리고 솟구쳤다. 대경한 정영호가 상체를 뒤로 숙이고는 공중제비를 돌았다. 판금 갑옷을 입고서도 그의 움직임은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아깐 좋았지? 어디까지 피할 수 있나 보자!’

    정천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연달아 네 번의 칼질을 해냈다. 하늘로 쳐든 팔을 움직여 찌르기 공격을 넣었다.

    공중제비를 도느라 자세가 흐트러졌던 정영호가 신음을 흘리며 방패를 들어 막았다. 정천우는 실망하지 않고 역천검을 휘둘러 방패를 두들겼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오호단문도 중에서 와호노성의 초식이었다.

    “차아!”

    와호노성의 초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천우가 쩌렁쩌렁한 기합을 터트렸다.

    정영호가 잔뜩 긴장해 방패를 들었다. 정천우가 보여 준 공격은 무섭도록 빨랐다. 반격할 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롱소드를 들어 막기보다 방패로 막을 생각을 했을까!

    “이런!”

    정영호는 자신의 눈앞에서 정천우가 사라지자 순간적으로 허둥댔다.

    쉬이익!

    “으헛!”

    정영호가 깜짝 놀라며 급하게 상체를 숙였다. 그러고는 방패를 들어 공격을 막았다.

    정면에서 공격할 듯 허초를 선보이고는 맹호측격(猛虎側擊)의 초식을 사용해 정천우가 옆에서 위협적인 검격을 날린 것이다. 조금만 늦게 눈치챘다면 그대로 승부가 갈렸을 공격이었다.

    자승자박(自繩自縛).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서 방패를 들었지만 오히려 방패 때문에 시야가 나빠진 게 지금과 같은 위험을 초래했다.

    문제는 정영호의 불행이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순한 공격이 아니었다. 역천검을 막아 내기가 무섭게 곧바로 엄청난 충격이 밀려들었다.

    쾅!

    우득!

    “큭!”

    왼쪽 팔꿈치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정천우가 역천검으로 방패를 후려치고는 곧바로 다리에 내공을 담아 걷어찬 것이다. 우악스러운 다리 힘을 한쪽 팔만으로 막아 내는 바람에 무리가 가고 말았다.

    그것 또한 방패가 시야를 가리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얄미운 놈!’

    정영호는 이를 뿌드득 갈아붙였다. 놀랍도록 실전적인 움직임이었다.

    정천우의 공격은 눈에 익었다. 하북팽가의 병사들이나 배운다는 오호단문도의 수법이었다. 그럼에도 정천우가 사용하자 차원이 다른 공격력을 발휘했다.

    초식에 얽매이지 않고 가장 효율적인 공격을 퍼붓는다. 이런 움직임은 배운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풍부한 실전 경험이 없다면 결코 이처럼 자연스럽게 공격을 이어 갈 수 없다.

    “이얏!”

    바우웅!

    비틀대며 물러나던 정영호가 비명과도 같은 기합을 지르며 왼팔을 휘둘렀다. 그의 팔에 걸렸던 방패가 뒤를 쫓던 정천우를 향해 맹렬하게 회전하며 날아갔다.

    “흥!”

    파캉!

    정천우는 아쉽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쫓던 것을 멈췄다.

    방패를 걷어 내느라 지체한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정영호의 기세가 바뀌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야 제대로 할 마음이 생겼습니까?”

    정천우가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물었다.

    그러자 정영호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롱소드를 들어 옆으로 뻗었다.

    “이거, 자네를 무시한 꼴이 되었군. 진짜 대결은 이제부터일세. 이번 공격…… 나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네. 내 손이 무정하다 욕하지 마시게.”

    정영호가 천천히 자세를 낮추면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경고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의 몸에서 거세게 마나의 파동이 일어났다. 정영호 주변의 기운이 마구 요동쳤다. 롱소드에 맺힌 마나 쉐도우가 더욱 증폭되었다.

    “그렇게 나오신다면야…….”

    정천우가 긴장하며 자세를 잡았다.

    정영호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번 공격이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주변의 기운이 정영호를 중심으로 회오리치는 듯했다.

    ‘내공을 높이지 않았다면 골로 갔겠네.’

    마른침을 삼킨 정천우가 역천검을 두 손으로 잡았다.

    상대가 전력을 기울이겠다고 선언한 이상 자신 역시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다리는 활을 쏘는 듯한 자세로 위치를 바꾸고 두 손에 잡은 역천검을 들어 올렸다. 검 끝은 전방을 향하며 정영호를 겨누었고, 검자루는 입술에 닿을 듯 말 듯한 위치에 고정시켰다.

    치지직! 파직, 파지직!

    그러자 싯누런 뇌전의 기운이 이제까지와 달리 거세게 스파크를 만들면서 마나 쉐도우를 만들었다.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

    내공이 늘어난 덕분에 혼원벽력도를 사용하는 데 무리가 없어졌다. 혼원벽력신공으로 생성된 내공이 혼원벽력도법의 내공운용법에 따라 전신을 돌았다.

    혼원벽력신공을 더욱 위력적으로 발휘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혼원벽력도법이다. 뇌전의 기운을 담은 심법과 도법이 만나서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먼저 갑니다!”

    상상 이상의 위력에 자신감이 붙은 정천우가 흥겨운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정천우의 몸이 쏘아진 화살처럼 정영호와의 공간을 순간적으로 지워 버렸다.

    “으아아압! 받아랏!”

    피를 토하는 듯한 기합성을 내지르며 정영호의 롱소드가 공간을 갈랐다. 시퍼런 빛을 내뿜는 마나 쉐도우가 달려오는 정천우를 휩쓸었다.

    때를 같이해 정천우가 두 손으로 감아 쥔 역천검을 휘둘렀다. 싯누런 뇌전의 기운을 담은 역천검에서 눈부신 빛이 일어났다.

    혼원벽력도 이초식 벽력섬광(霹靂閃光).

    푸른색 마나 쉐도우를 담고 유성처럼 쏟아지는 롱소드와 뇌전의 기운을 일으키는 역천검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콰과광!

    눈이 멀어 버릴 듯한 섬광이 번쩍 일어났다. 두 사람 모두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기에 폭발하듯 일어난 충돌음은 사람들의 고막을 괴롭혔다.

    마나 쉐도우가 폭발을 일으키면서 두 사람이 격돌한 장소에선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오오오…….”

    결과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한 번의 격돌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모습은 한 차례의 충돌을 일으킨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정천우는 의연하게 서 있었고, 정영호는 가슴을 움켜쥐며 한쪽 무릎을 꿇고 있다는 점이다.

    “대, 대단하다…… 쿨럭! 내, 내가 졌다.”

    “뭐, 운이 좋았습니다. 진짜 곤륜의 검이었다면 제가 이렇게 쉽게 이길 순 없었을 겁니다.”

    “……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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