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04화 (10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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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26. 동대륙의 무공 (4)

    ***

    “제길…… 불안해.”

    사람이 찾지 않을 만한 성벽탑 위에 올라 호흡을 가다듬던 정천우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혼원벽력신공을 운용해 내상을 다스리기는 했다. 그러나 내일 정영호와 대결이 부담스러웠다.

    동대륙의 기사들이 중원의 무인들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이곳 세상의 기사들은 내공…… 그러니까 동대륙의 표현대로 하자면 마나를 다스리는 능력이 부족하다. 겉으로 느껴지는 마나의 기운이 중원의 이류 무인 수준이라고 했을 때, 실제로 싸워 보면 삼류 무인 수준을 겨우 벗어난 정도에 불과하다. 하북팽가의 기사들과 싸우면서 느꼈던 점이라 그건 확실하다.

    물론 무당파의 기사를 공격했을 때에도 그런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마교의 기사들은 조금 달랐지만 일반 기사들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자신보다 마나양이 많게 느껴져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던 정천우다.

    그런데 정영호는 조금 달랐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정영호만 한 기운을 풍기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에 불안감이 더 생겼다.

    이제껏 보았던 기사들은 이류 무인의 경지였다. 그러나 정영호는 일류 무인의 경지로 느껴지는 기운을 풍겼다.

    현재 자신의 내공 수준은 이제 갓 이류 정도의 수준.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게 찜찜하단 말이지…….’

    정천우는 그레이트 홀에서 느물거리면서 말하던 정영호를 떠올렸다.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서 정천우가 본 것은 짙은 살기였다. 대결을 내일로 미룬 것도 손님으로 초대받은 첫날부터 피를 보기 싫다는 이유밖에 없었을 수 있다.

    “니미…… 누가 순순히 당해 줄 줄 알아?”

    정천우가 느끼하게 미소 짓는 정영호를 떠올렸다.

    느긋하게 내일이 밝아 오길 기다린다는 건 너무나 찜찜하다. 그래서 독하게 마음먹고 성벽 탑에 올라온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수련하기 위해서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에 오호단문도나 혼원벽력도를 가다듬는다는 건 바보짓이다.

    놈의 무기를 쳐 내는 순간에 느낀 것은 힘의 차이다.

    상대가 몸을 날려 가속도가 붙은 상태라 유리한 점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걸 감안한다고 해도 상대의 내공이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준비해 왔다. 초식보다는 내공을 높이는 게 지금으로썬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딸칵!

    정천우는 챙겨 온 나무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단약이 가득 들어 있었다.

    원래는 조금씩 먹으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양을 늘려 가는 중이었기는 했지만 오늘은 단순히 양을 늘리는 게 아니다. 단시간에 효과를 볼 수 있도록 한꺼번에 많이 먹을 생각이었다.

    독 기운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배출하고 견디느냐가 관건이다.

    “망할 자식! 이 복수는 내일 뼈에 새겨 주마!”

    정천우는 품속에서 용봉패를 꺼냈다.

    처음 동대륙에 도착해 동굴에서 얻은 물건이었다. 내공을 수련할 때 지니고 있으면 더 많은 내공을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물건이었다.

    오늘의 목표는 40년 이상의 내공을 쌓는 거였다. 현재 정천우의 내공은 반 갑자(30년)가 조금 넘는다. 일류와 이류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는 게 40년 내공이다.

    꾸준한 수련으로 반 갑자의 내공을 넘겼지만 아직은 이류의 경지다. 이제 40년의 내공을 쌓고 소주천을 넘어 대주천을 이루면 명실상부한 일류급 무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비록 자의에 의한 게 아니라 타의에 의해 도전하는 일이지만 성공만 하면 중원에 돌아가서도 목에 힘 줄 정도의 수준이 되는 것이다.

    “이판사판이다!”

    정천우는 상자 안에 든 단약을 마구 입에 털어 넣었다.

    이것 때문에 저녁도 먹지 않았다. 저녁을 먹었다간 단약을 먹을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개자식! 내일 내 발아래에서 무릎 꿇고 빌게 만들어 줄 테다!’

    정천우가 독하게 마음을 먹고 단약을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목구멍에 넘기기가 무섭게 다시 한 주먹의 단약을 입에 넣었다.

    꾸역꾸역 단약을 먹은 정천우가 차분히 호흡을 가라앉히면서 혼원벽력신공에 따라 단전의 기운을 일으켰다.

    포만감이 느껴질 만큼 잔뜩 들어간 단약에서 기운이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단전에서 흘러나온 내공의 흐름에 이끌린 것이다.

    ‘됐어!’

    정천우는 내공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단약의 기운이 합류하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정천우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물들어 갔다. 그러고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단약에 포함된 독 기운이 일시에 일어나 고통이 밀려드는 것이다.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정천우가 이를 꽉 물었다. 견디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란 걸 알기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으드득!

    입조차 벌릴 수 없는 상황.

    대못으로 쿡쿡 찌르는 듯한 고통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독의 기운이 혈맥을 따라 돌면서 통증을 일으켰다.

    정천우가 해야 할 일은 독기를 모아 몸 밖으로 배출하는 것이다.

    적은 양의 단약을 복용했을 때는 문제가 없었다. 전신을 타고 도는 뇌전의 기운이 가벼운 독쯤은 자연스럽게 태워 버리니까.

    그러나 지금은 평소와 달리 엄청난 양의 단약을 섭취한 상태다. 독 기운의 크기부터가 달랐다.

    다른 기사들처럼 흘러나오는 기운을 대기 중으로 흩어 버리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정천우는 기운을 흡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독 기운이라고 할지라도 단전을 넓히는 용도로 사용한 뒤에 배출해야 한다. 그렇게 확장한 단전에 새로운 기운을 집어넣어야 내공의 양이 늘어난다.

    ‘괴, 괴로워!’

    정천우의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전신에서 땀이 흘러나오는 중이다.

    단약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점점 더 커졌다. 그럴수록 독 기운 역시 더욱 지독해졌다.

    당장에라도 까무러치고 싶은 걸 정천우가 겨우겨우 버텼다. 지금 정신을 놓는다면 제어하지 못한 독 기운이 폭주하면서 몸을 망치게 될 게 분명했다.

    우두둑…… 두둑…….

    정천우의 전신에서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미약하게 흘러나왔다. 고통을 참아 내느라 전신에 힘을 주는 탓이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과 달리 정천우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비어져 나오고 있었다.

    ‘되, 된다! 조금만 더!’

    정천우는 단약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기혈을 따라 돌면서 덩치를 불려 가는 데 희열을 느끼는 중이다. 독 기운 때문에 괴로웠지만 단전으로 되돌아오는 내공의 양이 많아지는 것에 기뻐했다.

    평소보다 내공을 운용하는 시간이 훨씬 길어졌다. 독 기운과 싸우면서 폭주하려는 기운까지 다독여야 했으니 무리도 아니다. 비 오듯 흘러내리던 땀은 그의 옷을 흠뻑 적셨다.

    십이주천(十二週天)을 행하고도 정천우의 운공은 멈추지 않았다. 한차례 운공을 끝마쳤음에도 독 기운과 단약에서 뿜어지는 내공을 다스려야만 했다.

    두 번째 십이주천을 시작하자 흠뻑 젖었던 그의 옷이 말라 가고 있었다. 그러고는 녹색의 연기 같은 기운이 전신의 모공을 통해 스멀스멀 흘러나와 대기 중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잔뜩 찌푸려져 있던 정천우의 미간이 펴지면서 점차 평온한 얼굴로 변해 갔다.

    ***

    정천우가 눈을 뜬 것은 아침이 훌쩍 지나서였다. 아니, 아침이라는 말을 꺼내는 게 실례다. 태양이 거의 하늘의 정중앙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어제 승전 파티에서 나와 성벽탑에 오른 게 밤 10시였다. 거의 12시간 이상을 내공 수련에 매달렸다는 뜻이다.

    “으아암…… 기분 좋은데?”

    정천우는 크게 기지개를 켜며 목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불안했던 시도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40년 내공을 얻었으며 대주천에 성공했다.

    소주천과 달리 대주천은 팔과 다리의 기혈을 개척하는 작업이다. 내공을 펼치고 거두는 작업이 빨라지고 육체의 감각이 더욱 발달한다. 이류와 일류를 나누는 경계라고 말하는 게 괜한 것이 아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활력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내공의 흐름이 대주천을 완성하기 전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그 뺀질뺀질한 면상을 뭉개 줄 일만 남은 건가? 크…… 그전에…… 먼저 좀 씻어야겠네?”

    정천우는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를 감지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독 기운이 몸 밖으로 배출되면서 심하게 냄새가 나고 있었다. 옆에 놓아두었던 역천검을 챙긴 그는 서둘러 성벽 탑을 내려갔다.

    12시 정각 대연무장.

    사람들이 몰려들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호리호리한 체구의 사내가 멋들어진 판금 갑옷를 입은 채 서 있었다.

    바로 철혈검 정영호 후작이다.

    대결을 위해서 10분 전에 미리 도착해 정천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구경하려고 온 사람의 대부분은 기사였다. 승전 파티장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입소문을 타면서 두 사람의 대결에 관심이 쏠렸다.

    어쩌면 하북팽가 최강의 기사일지도 모를 정천우와 무림맹의 두뇌이면서 강하기까지 한 정영호가 싸운다니 기대가 컸다.

    정영호 후작의 경우는 무림맹의 실력자 중에서 50위 안에 들어갈 정도로 강력한 기사였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정천우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하북팽가의 기사들이 궁금해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정천우가, 이제는 하북팽가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다. 정천우가 승리한다면 하북팽가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거라는 기대감에 기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동대륙의 약체로 무당파와 함께 거론되는 하북팽가다. 하북팽가의 기사가 무림맹의 정영호를 꺾는다면 평가가 달라질 것은 확실했다.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기사들은 정천우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멀리서 대연무장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사내를 발견하고는 기사들이 열광했다.

    “천우 경이다! 천우 경이 오셨다!”

    “휘이익! 승리하십시오!”

    “와아아아!”

    정천우가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기사들이 환호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무장 상태는 언제나와 똑같았다. 가죽 갑옷 위에 개량한 브리건딘 아머를 착용한 상태였다. 기사라기보다는 용병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점점 다가오는 정천우의 모습을 바라보는 정영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이거, 내가 악당이 된 기분이군.”

    정영호는 자신을 둘러싼 기사들을 둘러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타지에 와 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적진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전부 자신과 싸울 정천우를 부르짖고 있으니 입맛이 썼다.

    ‘그래도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긴 하니 그나마 다행인 건가?’

    정영호는 자신에게 주먹을 불끈 쥐며 파이팅을 외치는 공지대사를 발견하고서야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공지대사의 옆에서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손을 흔드는 주미혜가 있어 그의 얼굴이 조금 더 편안해졌다.

    최소한 자신을 응원하는 사람이 둘은 된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은 것이다.

    정영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 자신과 싸울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명분이 필요한 상황.

    사람들의 관심이 ‘전설의 계승자’에게 가는 걸 막아야 한다. 무림맹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야만 한다.

    이제야 겨우 하나로 뭉치기 시작한 단결력이 흔들리지 않게, ‘벽력대제의 후예’라는 쓸데없는 타이틀은 여기서 무너뜨려야 한다.

    그래야 무림맹이…… 아니, 동대륙이 진정한 자유를 꿈꿀 수 있을 테니까.

    당당하게 걸어오는 정천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정영호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정천우가 다가올수록 점차 굳어졌다. 마침내 정천우가 그의 앞에 섰을 때, 정영호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정영호가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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