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03화 (103/200)
  • # 103

    Chapter 26. 동대륙의 무공 (3)

    “미안하네.”

    “뭐가?”

    “난 자네가 공지대사 남작을 죽이려는 줄 알고 그것을 말리기 위해서 손을 썼을 뿐일세.”

    정영호 후작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면서 슬쩍 군례를 취했다.

    잔뜩 긴장했던 정천우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난 싸움을 끝내려 했을 뿐입니다. 저 친구한테 기회를 줬음에도 덤벼들어서 대응한 것이지, 죽일 의도는 없었습니다.”

    정천우는 역천검을 검집에 넣으면서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오해가 풀린 마당에 굳이 막 나갈 필요가 없어 말투를 바꿨다. 쓸데없이 험하게 말을 써서 불필요한 싸움이 일어나는 건 한 번으로 충분했다.

    “자네가 벽력대제의 후예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운 좋게 이 검을 만지고도 살아났을 뿐입니다.”

    정천우는 허리춤에 매달린 역천검을 손으로 툭 건드렸다.

    전설의 계승자, 벽력대제의 후예와 같은 말들은 그저 부담스러울 뿐이다. 그의 소망은 중원으로 돌아가는 게 전부다. 거창한 무언가를 바라는 게 아닌 만큼 불필요한 명성 따윈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정영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동대륙에는 지금 영웅이 필요하다. 누군가 구심점이 되어 동대륙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할 때였다. 강력한 서대륙의 힘에 맞서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그래야만 했다.

    ‘벽력대제…… 전설의 계승자라…….’

    정영호는 정천우를 찬찬히 살피며 속으로 주판알을 튕겼다. 적절한 시기에 적당한 명분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

    지금의 동대륙은 최고 전성기이면서 동시에 쇠퇴기다. 이해관계가 맞물려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지 않은 탓에 각 영지의 전력이 풍부하다. 그러나 풍부한 전력이 있다고 해도 전력 하나하나의 힘이 미약하다면 의미가 없는 일이다.

    당장 정영호 자신만 해도 서대륙의 마나 수련법을 가져와 지금의 경지를 개척했다.

    현재 곤륜파가 동대륙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무림맹의 위치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벽력대제가 남긴 무공들을 수련할 방법이 없으니 상대적으로 동대륙보다 마나 수련법이 발달한 서대륙의 것을 가져왔다. 다른 문파가 알면 문제의 소지가 있는 일이다.

    서대륙의 마나 수련법으로 수련한다는 것은 동대륙의 시조인 벽력대제의 뜻에 반(反)하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정천우를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던 정영호가 손가락으로 역천검을 가리켰다.

    “검을 좀 볼 수 있겠나?”

    “흠……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정천우는 잠시 갈등하더니 잭슨에게 다가가 세이버를 빌렸다. 그런 다음에야 정영호에게 다가왔다.

    “여기 있습니다.”

    “조심성이 많군.”

    “무기도 없이 정영호 후작님을 상대할 자신이 없다고 해 두겠습니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허탈한 웃음을 흘리는 정영호에게 정천우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역천검을 내밀었다.

    정영호가 역천검을 검집째 받아 들기가 무섭게 정천우가 두 걸음 물러났다. 그런 그의 모습에 정영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입가에는 한 줄기 미소가 걸렸다.

    ‘나이답지 않게 신중한 친구로군.’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하는 짓은 닳고 닳은 늙은 기사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생존 능력이 우수하다는 말이니 나쁘게 볼 건 아니었다.

    정영호는 오히려 자신을 경계하는 정천우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검을 뽑아 공격하려고 해도 두 걸음이라는 간격 때문에 기습적인 발검술은 사용할 수 없다. 자신과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고 있지 않다면 보일 수 없는 행동이다.

    은은하게 미소 지은 정영호가 역천검을 받아 들고 천천히 뽑았다.

    “으음…….”

    역천검의 상태를 확인한 정영호가 감탄성을 흘렸다.

    전력을 다한 공지대사의 공격을 수차례나 받아 낸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았다. 아무리 마나 쉐도우를 사용해 검날을 보호했다고 해도 이렇게 깨끗할 수는 없다. 벽력대제가 생전에 늘 지니고 다녔다는 역천검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내구력만큼은 보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정영호는 검날의 상태를 다 살펴보고는 역천검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순간 역천검에서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일어났다.

    “웃!”

    정영호는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짜릿한 감각에 얕은 신음을 흘렸다. 적당히 마나를 조절한 덕분에 역천검을 떨어뜨리는 추태는 면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약간의 고통이 있었지만 그래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역천검이 맞다.

    마나를 흘려 넣을 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긴 했지만 고서(古書)에 적혀 있었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룬어를 순간적으로 볼 수 있었다.

    스르릉…… 탁!

    “역천검이 확실하군. 받으시게.”

    정영호는 역천검을 검집에 넣어 정천우에게 내밀었다.

    상대의 행동을 주시하면서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던 정천우는 조심스럽게 역천검을 받아 들었다. 역천검을 허리춤에 착용하고서야 정천우가 살짝 긴장을 풀었다.

    그런 정천우의 행동을 살피면서 정영호가 가볍게 혀를 찼다.

    ‘벽력대제가 사용하던 역천검은 확실한데, 저래서야 전설의 계승자라고 주장하기엔 너무나 약하지 않은가.’

    정천우의 몸을 자세히 살펴본 정영호가 내린 결론은 그거였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벽력대제의 어마어마한 업적과 검술 능력을 눈앞의 어린 청년에게 바라는 건 무리라는 걸 안다.

    하지만 최소한이라는 게 있다. 적어도 벽력대제의 후예라면 자신보다는 더 높은 경지의 실력을 지니고 있어야 말이 된다. 그게 그를 고민하게 하는 이유다.

    구심점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이왕이면 ‘벽력대제의 후예’라는 명분을 앞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구심점으로 삼기에는 정천우의 능력이 너무나 보잘것없다는 게 문제다.

    ‘아쉽군.’

    다시 한 번 뭔가 놓친 게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정천우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역시 자신의 계획 안에 넣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했다.

    명분도 좋고 실력도 나쁘지 않다는 점은 동의하지만 구심점으로 삼기에는 함량 미달이다.

    하지만 그냥 포기하기에는 찜찜한 느낌이었다. 마치 큰일을 보고 뒤를 닦지 않은 그런 종류의 기분이었다.

    “조금만 더 실력이 좋았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싸움을 멈추라고 해서 멈췄고, 검을 보고 싶다고 해서 보여 줬다.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해 주었는데 마지막 말에 삐딱한 기색을 드러냈다.

    자꾸 기분 나쁘게 자신을 훑어보는 정영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정천우는 살짝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괴팍하고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키는 이 친구 때문이지.”

    정영호는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공지대사를 가리켰다.

    정천우가 골탕 먹일 생각으로 조금 과하게 손을 쓴 탓에 내상이 깊어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살아 있었다. 정천우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이를 가는 모습에선 인정할 수 없다는 오기가 느껴졌다.

    ‘자식이 매가 부족해. 좀 더 두들겨 버렸어야 했는데.’

    정천우는 입술을 씰룩이며 공지대사를 향해 살기를 드러냈다.

    실력 차이를 경험하고서도 저런 눈빛을 보인다는 건 매가 부족했다는 의미다. 어설프게 맞은 놈들이 항상 저런다. 귀찮은 건 질색인 정천우는 언제고 확실하게 손봐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으으으…….”

    정천우의 광포한 살기를 담은 눈빛에 공지대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많은 사람 앞에서 얻어맞은 게 화가 나고 수치스러웠을 뿐이다. 재수가 없어 얍삽한 수법에 당했다고 믿었다. 다시 붙으면 결코 그따위 꼼수에 당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래서 정천우를 죽일 듯이 노려봤는데, 점점 몸이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한기가 느껴지고 몸이 위축된다. 다른 기사들과 대련할 때는 느껴 보지 못했던 괴상한 감각이었다.

    “그만!”

    정영호가 앞을 가로막으며 정천우의 살기를 차단했다.

    소림파의 촉망받는 인재가 살기에 짓눌려 정신이 황폐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공지대사는 아직 흉험한 전장을 경험하지 못한 탓에 살기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런 사람에게 정천우의 비정상적인 살기는 치명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정천우는 귀찮다는 기색을 담아 물었다.

    이리저리 빙빙 말을 돌리는 건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게 바로 정천우다.

    “아무리 말썽을 피운다고 해도 일단 이 친구와는 정이 쌓여서 말일세. 이런 모욕을 당했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나도 자네가 아까 했던 말이 거슬리긴 했다네.”

    “싸우자는 겁니까?”

    정천우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아까 했던 말’이라는 건 제인에게 변명하느라 ‘웃기지도 않는 이상한 인간’이라고 했던 걸 말하는 게 분명하다.

    말실수 한 번 한 것으로 싸움질했는데, 또다시 그걸 핑계로 싸우겠다니 기가 막혔다. 대결을 치렀으면 그것으로 말실수를 넘어갈 줄 법도 한데 말이다.

    하지만 정영호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 품위 없이 말한다면 그렇게 되겠지.”

    “참 끈질기신 분들이군요. 사나이가 급하면 말실수도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건 자네 생각이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네. 승전 파티에 참가할 사람을 이 꼴로 만든 것도 그냥 넘어갈 순 없는 문제고 말이야.”

    “하아…… 좋습니다. 까짓것 붙읍시다. 웬만하면 그냥 넘어갈까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정천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잭슨에게 세이버를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허리춤에서 역천검을 뽑았다.

    고오오오…….

    역천검을 손에 쥐는 순간 기세가 돌변했다.

    정영호가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기에 처음부터 내공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그래야 할 만큼 정영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워, 워! 누가 지금 당장 싸우자고 했는가? 오늘은 승전을 기념하는 파티가 있는 날일세. 즐겨 보지도 못하고 죽는다면 억울하지 않겠나? 내일 12시에 싸우는 것으로 하지. 어떤가?”

    “……좋습니다. 그럼 내일 12시. 장소는 대연무장으로 하겠습니다.”

    “그러기로 하지. 난 이만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 봐야겠네. 공지대사 남작, 그대도 이제 일어나시게.”

    정영호는 약속을 잡기가 무섭게 공지대사를 부축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정천우는 황급히 군례를 올렸다. 자신에게 책망의 눈빛을 보내는 팽선웅 백작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불필요한 싸움을 벌였느냐고 말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정영호가 다가와 앉자 이내 표정을 바꾸고 정천우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정천우는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째서 하는 일마다 꼬이기만 하는 건지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천우 경……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아하하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쨌든 저 한눈 안 팔았습니다!”

    “……죄송해요.”

    제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질투심 때문에 정천우가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된 것 같아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저기…… 음…….”

    제인은 미안한 마음에 정천우에게 말을 걸려다가 이내 침음을 흘리며 입을 닫았다.

    그는 자신과 대화할 상황이 아니었다. 두 눈은 온통 중앙의 귀빈석에 향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영호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의 싸움을 생각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제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오늘은 정천우와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저 자식…….’

    정천우는 역천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피가 끓어올랐다. 그의 본능이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정영호의 미소 뒤에는 야수가 숨겨져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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