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00화 (100/200)
  • # 100

    Chapter 25. 화산파의 사절단 (4)

    ***

    화산파에서 사절로 온 사란트 림이 마족의 기운을 마나처럼 사용하는 마교도라는 게 드러난 지 3일이 지났다.

    사란트 림을 호위하는 기사들은 마공을 익히지 않았고 화산파의 사람들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혐의가 있는 이상 심문은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얻은 정보가 상당했다.

    다만 호위기사들은 화산파의 정식기사 중 하나인 사란트 림이 마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고급 정보는 사란트 림을 통해 알아내야 했지만 마나와 두 팔을 잃은 그는 반쯤 정신줄을 놓았다.

    고문을 해 봐야 얻을 게 없었던 하북팽가의 기사들은 죽여 달라는 그의 부탁을 아주 흔쾌히 들어주었다. 어차피 살려 둘 생각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하북팽가 수뇌부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한 화산파의 사절단 문제가 해결되고, 드디어 본격적인 승전 파티가 열렸다.

    그레이트 홀에는 사람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고,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의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한 사람만 빼고는…….

    “윽…… 이게 사람이 입는 옷이냐?”

    정천우가 인상을 벅벅 쓰면서 투덜거렸다.

    “천우 형님, 원래 파티에선 이렇게 입는 거예요.”

    잭슨이 피식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승전을 축하하는 자리였기에 정천우는 잭슨과 제럴드를 추가로 데려왔다. 부단장인 헤이먼과 마법사인 샤칼은 한쪽 구석에 처박혀서 파티가 시작되기 무섭게 술만 퍼마시고 있었다.

    정천우가 투덜거린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몸에 짝 달라붙는 타이즈를 입어 불편했기 때문이다.

    특히…….

    “왜? 아예 벗고 다니라고 그러지? 이러다 좆 꼴리면 개망신이잖아!”

    “……그거, 꼴린 거 아니었어?”

    술을 홀짝거리던 제럴드가 놀란 얼굴로 정천우의 사타구니를 내려다보았다.

    불쑥 튀어나와 윤곽(?)이 드러나 있기에 뭔가 야한 상상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저런 무식한 크기가 평상시 모습(?)이라니, 제럴드는 기가 팍 죽었다.

    “새끼가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꼴리긴 누가 꼴려! 아, 진짜 꽉 끼어서 답답해 미치겠네.”

    “크크크…… 천우 형님, 좀 참아요. 원래 파티란 게 다 그런 거거든요. 이런 때 아니면 여자들이 언제 실(?)한 놈인지 아닌지 알겠습니까? 파티는 그냥 마음 편하게 즐기세요.”

    잭슨이 키득거리며 정천우에게 건배를 청했다. 못마땅한 얼굴로 잔을 부딪친 정천우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레이트 홀 내부를 둘러보았다.

    대부분이 힘 좀 쓴다 하는 사람들이었다. 아직 주변 영지의 손님들이 도착하지 않아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왜? 제인 마법사 기다리냐?”

    제럴드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정천우는 뜨끔한 얼굴로 헛기침하고는 손가락으로 턱을 긁었다.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무안했다.

    “내가 누굴 기다리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자식이, 요즘 훈련에서 열외시켜 줬더니 아주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른다? 다시 훈련 시작할까?”

    “치사한 새끼! 개인 훈련 하라고 해 놓고 쪼잔하게 그런 걸로 협박하냐? 다시 네놈 밑에서 훈련받느니 내가 더러워서 기사 때려치우고 만다!”

    제럴드는 입을 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정천우가 시키는 훈련을 했다가는 몸이 남아나지 않는다. 겨우 끔찍한 지옥에서 빠져나왔는데 다시 훈련에 복귀하라니…… 그건 때려죽인대도 싫었다.

    “까불고 있어!”

    “얍삽한 새끼! 어? 저 여자, 제인 마법사님 아냐?”

    인상을 벅벅 긁으며 투덜거리던 제럴드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식이, 제인 마법사님 처음 보냐? 새삼스럽게 지랄이…….”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제럴드에게 핀잔을 주며 고개를 돌리던 정천우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떡 벌렸다.

    제인은 허리를 강조한 드레스를 입었다. 가슴이 1/3쯤 드러내는 스타일이었고, 팔꿈치까지 감싸는 하얀색 실크 장갑을 꼈다. 머리는 평소와 달리 동글동글하게 말아서 틀어 올렸다. 잡티 하나 없는 가느다란 목선이 여성스러운 매력을 한껏 발산하고 있었다.

    “야, 야! 너 찾는 거 아니야?”

    “설마…….”

    제럴드가 정천우의 팔을 툭툭 치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천우는 멍한 얼굴로 대답하면서도 제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천우의 내심은 정말 제럴드의 말대로 제인이 자신을 찾는 것이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바보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제인을 쳐다보는데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그녀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순간, 제인이 배시시 웃으며 수줍게 손을 들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 아…….”

    정천우는 자신도 모르게 제인을 따라 손을 들어 헤벌쭉 웃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주변을 살피던 그녀의 행동이 멈췄다. 정말로 그녀가 자신을 찾아 헤맸다는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뿐사뿐 걸어오는 제인의 모습에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제인 마법사님…….”

    “……저 어때요? 이상하지 않아요?”

    “……아름다우십니다.”

    정천우는 현혹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제인이 얼굴을 붉히며 좀 더 가까이 다가오자 정천우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녀의 가슴에 저절로 눈이 갔다. 로브를 입고 있을 땐 보지 못했던 풍만함(?)이 정천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흠, 흠…….”

    “한 곡 추실래요?”

    “제가 춤을…….”

    ‘잠깐! 여기 춤이라고 해 봐야 무공에 비하면 장난 수준이잖아!’

    정천우는 이곳의 춤을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우스꽝스럽게 몸을 움직이는 모습에 질색했었다.

    그러나 거절을 하려고 생각해 보니, 제인의 풍만함(?)을 느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위대한 본능(?)의 힘이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입을 가까스로 멈춰 세웠다.

    “……춥니다! 꼭 추고 싶습니다.”

    정천우는 괴상하게 뒤틀리는 입술로 대답했다. 다행히도 제인은 자신이 먼저 춤을 신청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정천우는 제인의 손을 잡고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그레이트 홀 중앙으로 걸어갔다.

    젊은 남녀들이 홀 중앙에서 쌍쌍이 춤을 추고 있었다. 손을 잡고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하면서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즐기는 모습에 정천우의 가슴이 콩닥거렸다. 자신도 이제 저들 사이에서 제인과 춤을 추면서 스킨십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절로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평소에는 ‘우스꽝스러운 짓’이라 폄훼하던 춤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

    “잘 부탁해요.”

    “처음이라 서툴러도 이해해 주세요, 제인 마법사님.”

    정천우는 기대감에 젖어 살짝 붉어진 얼굴로 양해를 구했다. 제인 역시 그와 처음으로 춤을 춘다는 사실에 마음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1미터 정도의 공간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사람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서로에게 인사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긴장감을 억누르며 제인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갑자기 모든 음악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뭐, 뭐야?”

    정천우는 제인의 손을 잡으려다가 짜증 난 얼굴로 작게 투덜거렸다.

    재수 없게도 음악이 끝난 모양이었다. 정천우는 다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음악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음악은 다시 흘러나오지 않았다. 대신에 그레이트 홀의 문이 열리면서 시종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무림맹의 축하 사절이 도착했습니다. 철혈검(鐵血劍) 정영호 후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의 소개가 끝나자 호리호리한 체구의 사내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눈매가 매섭게 생겼으며 걸음걸이가 안정적이었다. 오랫동안 검을 수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림파의 질풍창(疾風槍) 공지대사 남작께서 찾아 주셨습니다.”

    한 자루의 창을 든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그레이트 홀 안으로 들어섰다.

    중원의 소림사 승려들처럼 머리를 밀고 계인이 찍혀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정반대였다.

    중원의 소림승은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공지대사는 험악한 인상에 자신의 무력을 과시하듯 어깨를 들썩이며 걸었다.

    게다가 공지대사라는 사람의 작위가 정천우는 우스웠다. 이미 ‘대사(大士)’라는 명칭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작위를 뒤에 쓴다. 정천우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아미파의 주미혜 여협께서 찾아 주셨습니다.”

    기가 막힌 얼굴로 그레이트 홀의 문을 쳐다보던 정천우는 뒤이어 등장한 미녀의 모습에 가볍게 충격을 받았다.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미령 소저…….’

    정천우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중원에 두고 온 진미령이었다. 아미파에서 왔다는 주미혜의 모습이 진미령을 꼭 닮았다.

    그러자 정천우를 지켜보던 제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우같이 생긴 여자가 등장하기 무섭게 정천우의 얼굴이 멍해지는 것을 보고는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흥!”

    ‘앗! 멍청한 자식!’

    정천우는 귓가에 들려오는 콧방귀 소리에 속으로 자신을 욕하며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앞에 선 제인의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다. 아까는 부끄러움에 홍조가 생긴 것이지만 지금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진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과 닮아서…….”

    “아는 사람이요? 왜요, 여자 친구 생각해요? 흥!”

    정천우가 미안한 얼굴로 변명했지만 그게 제인의 화를 더 돋우었다.

    자신을 앞에 두고서 다른 여자한테 한눈을 판 것도 화가 날 일이다. 그런데 한눈을 판 이유가 다른 여자가 생각나서란다. 제인의 얼굴에 짜증이 스며 나왔다.

    “그, 그게 아니라, 갑자기 음악이 사라져서, 그래서, 그래서…….”

    “칫! 됐거든요?”

    “제인 마법사님, 그렇게 화내지 마세요.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리시겠습니까?”

    정천우는 제인이 화내는 모습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쩔쩔맸다. 그러나 제인의 화는 쉽사리 풀릴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음악이 사라지면서 등장한 무림맹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었던 사람들은 정천우와 제인의 모습을 키득거리며 지켜보았다.

    두 사람의 사이가 야릇하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좀처럼 진도(?)를 못 나간다는 소문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였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어떻게 화해할지 흥미진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당사자인 정천우는 속이 타 미칠 지경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본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제인의 화를 풀기 위해 안간힘을 다 쓰고 있었다.

    “아까는 저보고 아름답다고 하더니, 다 거짓말이었던 거예요?”

    “진심입니다, 제인 마법사님. 정말 아름다우세요.”

    “그런데 한눈을 팔아요?”

    “한눈을 팔다뇨! 갑자기 웃기지도 않는 이상한 인간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이렇게 된 것뿐이잖아요. 음악만 안 끊겼어도 이런 일 없었을 겁니다.”

    정천우가 자신의 한숨을 푹 내쉬면서 답답한 마음을 나타냈다. 고개를 푹 숙이면서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뒷머리를 손으로 헝클어뜨렸다.

    어지간히도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처, 천우 경…….”

    “네, 제인 마법사님!”

    정천우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제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크, 큰일 났어요.”

    “뭐가요? 어? 분위기가 왜 이래?”

    밑도 끝도 없는 제인의 말에 정천우가 눈을 껌벅였다.

    뭔가 이상하다.

    주변이 너무나 조용했다.

    정천우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무슨…….”

    설마 하는 마음으로 정천우의 눈이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조금 전 그레이트 홀에 입장한 무림맹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들의 시선도 정천우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흥분해서 크게 말한 탓에 그의 목소리가 무림맹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 것이다.

    팽선웅 백작이 무림맹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그의 얼굴에 나타난 것은 당황스러움과 정천우에 대한 책망이었다.

    “아하하하…… 그, 그게 아니라…….”

    정천우는 뒤늦게 자신의 말실수를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소림파의 공지대사의 행동이 더 빨랐다. 공지대사는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후려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웃기지도 않는 인간이라고 했나?”

    공지대사는 반들반들하게 깎은 머리까지 붉게 물들이며 테이블에 기대 놓았던 창을 집어 들었다.

    “기사는 모욕을 참지 않는 법! 나 공지대사는 소림파의 명예를 위해 그대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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