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99화 (99/200)
  • # 99

    Chapter 25. 화산파의 사절단 (3)

    “구, 구린내? 이런 미친놈이! 내가 사절로서 하북팽가에 방문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가! 이런 모욕이라니! 하북팽가의 영주시여! 어찌 이런 무식한 자로 하여금 제게 모욕을 주십니까!”

    사란트 림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정작 팽선웅 백작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턱을 괴고 있을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얼굴은 통쾌하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정천우의 막말에 사란트 림이 당황하는 모습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팽선웅 백작을 향해 사란트 림이 항의하려고 했으나 정천우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만 징징대고 대답이나 해!”

    “보면 모르는가? 내가 화산파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찌 사절단으로 파견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란트 림은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독기 어린 눈으로 정천우를 노려보았다.

    동네 양아치 같은 놈이 끼어들더니, 자신의 체면을 땅바닥에 패대기치는 지금의 상황이 기분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사란트 림의 감정 따윈 관심 없다는 듯 정천우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 그런데 어째서 지저분한 마교 놈들의 기운을 품고 있는 거지?”

    “뭣이? 어디서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인가!”

    사란트 림은 기괴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의 손은 슬그머니 자신의 로브 자락을 들추며 품속을 뒤지고 있었다.

    ‘저 자식! 왠지 모르겠지만, 찜찜해.’

    사란트 림은 손에 잡힌 마법 스크롤을 더듬으며 눈매를 좁혔다.

    원래는 팽선웅 백작을 도발하고 이동 마법이 새겨진 스크롤을 사용해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개망나니 같은 놈이 툭 튀어나와 염장을 질렀다.

    문제는 놈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긴다는 점이었다.

    허튼수작을 부리려 한다면 곧바로 마법 스크롤을 사용하겠다고 다짐하는 사란트 림이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있는데 느그적거리면서 걸어오던 정천우의 모습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엇!”

    사란트 림이 사라진 정천우를 찾기 위해 당혹성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퍼버벅!

    “커헉! 이, 이런!”

    등이 화끈거리며 몸이 뻣뻣하게 굳는 느낌에 사란트 림이 비명을 질렀다. 손에 쥔 마법 스크롤을 사용할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더 이상한 일은 자신이 마법에 당했다는 것이다. 5서클 대인 마법까지 막아 내는 대마법 주문이 새겨진 목걸이를 착용했는데도 말이다. 몸을 마비시키는 페럴라이즈(Paralyse)는 4서클의 마법인데, 어째서 자신이 마법에 당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상황이었기에 사란트 림은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어서 마법을 풀지 못할까! 다른 영지의 사절을 이런 식으로 핍박하다니! 하북팽가는 영지에 찾아온 손님을 이렇게밖에 대접하지 못하는가!”

    사란트 림은 뻣뻣하게 굳은 상태로 발악하듯 고함을 질러 댔다.

    하북팽가를 도발하고서도 충분히 빠져나올 자신이 있었기에 마음껏 비웃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그의 예상을 빗나가도 한참이나 빗나갔다. 이래서는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장담하기도 어려울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시끄러워, 인마!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손님 대접은 네놈이 진짜 화산파 놈일 때 얘기지.”

    “그, 그게 무슨 헛소리냐!”

    “너 마교 놈이잖아. 마교 놈이 화산파 새끼인 척하는 거 진짜 병신스럽거든?”

    “개소리 하지 마라!”

    “개소린지 아닌지는 확인해 보면 알겠지. 스티에르 신관님? 좀 나와 보시죠.”

    정천우는 팽선웅 백작의 뒤에 늘어선 수뇌부를 향해 말했다.

    스티에르 신관 역시 하북팽가의 수뇌부 중의 하나다. 신전에 소속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하북팽가의 일에 깊숙이 관계된 사람이었다.

    스티에르 신관은 어정쩡한 얼굴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계단을 내려왔다.

    수뇌부라고는 하지만 부상자를 치료하는 역할 외에는 딱히 하는 일이 없어, 늘 뒤치다꺼리나 하는 신세였다. 중요한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무력이 없으니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까닭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

    마침내 정천우의 곁에 도착한 스티에르 신관은 어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째서 날 부른 거요?”

    “이 인간한테 그 뭐라더라…… 아! ‘축복의 기도’라는 걸 해 주시겠습니까? 마교 놈의 정체가 드러날 겁니다.”

    “축복의 기도요? 해 드리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것으로는 딱히 천우 경이 생각하는 결과를 얻어 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만…….”

    스티에르 신관은 곤란한 표정을 드러내며 말끝을 흐렸다.

    축복의 기도라는 건 말 그대로 상대에게 작은 축복을 내리는 정도의 효과밖에 없다. 신성력이 상대에게 스며들기는 해도, 그것은 심신을 안정시키는 정도다.

    기본적인 기도문이기에 마족의 기운을 제압하는 효과는 거의 기대하기가 어렵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저항하면 아무런 효과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자신 없어 하는 것인데, 정작 정천우는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러자 사란트 림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았는데 겨우 축복의 기도 따위로 정체를 밝히겠다니 우스웠다. 막 나가는 줄 알았던 정천우가 같잖은 짓을 하려 하자 사란트 림은 화산파라는 자신의 뒷배경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사란트 림의 간덩이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흥! 멍청한 놈! 내가 정말 마교도라 생각하나? 정말이지 한심한 작자로군!”

    기껏 생각해 낸 것이 ‘축복의 기도’라는 것을 안 사란트 림은 거드름까지 피우며 비웃음을 던졌다. 그깟 ‘축복의 기도’ 따위는 마나를 끌어올려 저항하면 그뿐이었다.

    ‘멍청한 놈! 마나 구속 장비도 없이 내 정체를 밝히겠다고? 하긴, 마나 구속 장비를 가져와 봐야 몸속의 마나까지는 어쩔 수 없겠지만…….’

    사란트 림은 속으로 정천우의 멍청함에 쾌재를 불렀다. 그러고는 의식을 집중해 전신에 흩어져 있는 마나를 일깨웠다.

    “……마, 마나가 움직이지 않아?”

    사란트 림은 당황한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몸속에 쌓은 마나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의식을 집중해도 소용없었다. 자신의 손과 발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던 마나가 굳어 버린 듯이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질 않았다.

    “고귀하고도 자비로우신 분이시여! 여기 그대의 어린 양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이 어린 양에게 한 줄기 구원의 빛을 내리사, 밝은 하늘을 보여 주소서. 그리하여 그의 영혼을 구원하시고 영생의…….”

    “아, 안 돼! 멈춰! 멈…… 크아악!”

    다급한 목소리로 고함치던 사란트 림이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그러나 스티에르 신관의 기도문은 멈추지 않았다. 가지런히 모은 두 손에서는 신성한 빛이 일어났고, 그의 목소리는 천상에서 들려오는 듯 웅장하고도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스티에르 신관의 주변이 점차 밝아지면서 신성력을 띤 빛이 흘러나와 사란트 림에게로 쏟아져 들어갔다.

    “으으으…… 으가! 괴, 괴로워! 커흑! 컥! 이, 이럴 순 없어! 이건 말도 안 돼! 크아악! 커헉!”

    사란트 림은 신성력을 뒤집어쓰는 순간, 격하게 비명을 질렀다.

    마혈을 제압당해 꼼짝 못하는 상태였음에도 그의 전신은 경련을 일으키며 진동을 일으켰다. 얼굴에 혈관이 도드라지고 제멋대로 꿈틀대고 있었다. 마치 수만 마리의 지렁이가 그의 전신에서 꿈틀거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정천우가 마혈을 비롯한 대부분의 혈도를 봉쇄한 탓에 마나가 이동하는 통로가 모조리 막힌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신성력이 몸속으로 침투하고 있으니 사란트 림의 마나가 신성력에 잠식당하면서 마나를 잃어 가는 중이었다.

    “……의 이름으로 축복하나이다.”

    스티에르 신관은 기도문을 끝내면서 입을 헤벌렸다.

    자신의 기도문으로 상대가 저렇게 괴로워하다니 의아하기만 했다. 축복의 기도문은 그저 피로 회복 정도의 효과를 내는 수준이기에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찢어질 듯 눈을 크게 떴다. 사란트 림의 코와 입, 그리고 양쪽 귀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기운의 정체는 마족의 기운이었다.

    사란트 림을 둘러싼 신성력과 검은색 연기가 뒤섞이면서 스파크를 만들어 냈다. 신성력에 닿은 마족의 기운이 정화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덕분에 신성력이 사라지지 않고 더욱 농도가 강해졌다. 불길한 마족의 기운을 접한 순간, 신성력이 사라지지 않고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마족의 기운을 잡아먹으면서 신성력이 덩치를 불려 갔다.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사란트 림의 주변은 강렬한 빛으로 휩싸여 갔다.

    “끄아악! 으아악! 아악! 크허헉…… 크헉! 우와악!”

    신성한 빛 속에서 사란트 림의 비명이 처절하게 이어졌다. 폐부를 쥐어짜는 괴로운 비명에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지어진 그레이트 홀(Great hall)이 온통 비명으로 가득 찼다.

    지켜보는 하북팽가의 수뇌부는 처참한 비명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누구도 신성력에 휩싸인 사란트 림에게서 눈을 떼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사란트 림의 호위를 위해 함께 온 호위기사 역시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주시했다.

    잦아드는 비명과 함께 신성력 또한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신성한 빛이 사라진 뒤에 나타난 것은 코와 입으로 검붉은 피를 토해 내는 사란트 림의 망가진 모습이었다.

    그제야 정천우가 사란트 림에게 다가가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파바밧! 쿠당탕…….

    점혈한 것이 풀리기가 무섭게 사란트 림이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마나가…… 내 마나가…… 으아아아! 가만두지 않겠다!”

    사란트 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천우에게 검을 휘두르려고 바스타드 소드를 빼 들었다.

    하지만 정천우의 대응은 너무나 간결했다. 달려드는 사란트 림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서면서 무릎을 차올렸다.

    퍽! 탱그랑…….

    “허욱!”

    내장을 토해 낼 것만 같은 표정으로 사란트 림이 바스타드 소드를 놓치며 다시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크흐흐…… 나의 힘이…… 나의 힘이…….”

    사란트 림은 얻어맞은 충격보다 다른 것에 더 괴로워했다.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껄렁한 기사 놈에게 무기를 들고 대항했음에도 맥없이 얻어맞은 게 충격이었다. 심지어 상대는 마나조차 사용하지 않은 움직임으로 자신을 공격했다.

    전신에 충만했던 마나가 일순간에 사라진 것을 실감하는 순간, 주책맞게도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몸속을 가득 채우던 마나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제길! 제길! 이 원한은 결코 잊지 않을…….”

    사란트 림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눈으로 정천우를 노려보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품속을 빠져나온 사란트 림의 손에는 복잡한 수식이 적힌 마법 스크롤이 들려 있었다.

    정천우를 노려보며 마법스크롤을 찢으려는 찰나!

    쉬익! 츠걱!

    “……것이다!”

    저주에 가득 찬 눈으로 정천우를 노려보던 사란트 림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마법 스크롤을 찢으려는데 뭔가 이상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더욱 이상한 것은 자신에게 막말을 해 대던 정천우가 어느새 역천검을 뽑았다가 검집에 집어넣는 중이라는 거다.

    “이게 무슨…….”

    사란트 림은 마법 스크롤을 찢으려 애를 쓰다가 자신의 두 팔뚝에 붉은색 실금이 생겨나는 희한한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느껴지는 고통.

    툭!

    “……!”

    사란트 림은 자신의 두 팔이 맥없이 떨어지는 황당한 일을 경험해야 했다. 고통이 밀려옴에도 비현실적인 지금의 상황에 그저 멍하니 입을 쩍 벌렸다.

    잘려 나간 두 팔의 절단면에서 때를 같이해 피가 솟구쳤다. 피 분수가 솟구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뒤늦게 참을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 사란트 림을 휘감았다.

    “끄어억! 내 팔! 내 파알! 으아아아…….”

    그제야 사란트 림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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