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98화 (9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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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25. 화산파의 사절단 (2)

    ***

    “하북팽가의 영주시여. 안녕하십니까! 저는 화산파의 ‘사란트 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란트 림이라는 사내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의례적인 인사말을 꺼냈다.

    하지만 말의 내용과는 달리 말투가 무척이나 거만하고 사람의 기분을 긁었다. 마치 정중하게 사람을 약 올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례하오!”

    성질 급한 팽만리가 사란트 림의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앞으로 나서면서 눈을 부라렸다.

    사란트 림과 그를 호위하는 기사 2명이 팽만리를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마치 ‘네까짓 게 어쩔 거야?’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지금 날 그렇게 쳐다보는 것은 잘못을 시인하지 못하겠다는 뜻이오?”

    팽만리는 와락 인상을 구기며 허리춤에 걸린 세이버의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여차하면 무력행사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이 자식들은 대체 왜 온 거지?’

    사절단의 태도에 팽만리는 속으로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인지 이유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사절단이라는 이름으로 왔지만 어떤 목적의 사절단인지 정체가 불분명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북팽가를 도발하기 위해서 온 사절단이라면 충분히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보아도 좋았다.

    팽만리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사란트 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잘못? 잘못이라니요? 내가 지금 무언가 잘못했다는 겁니까?”

    “허! 우리 영주님께 무례하게 굴었지 않소!”

    “그대는 내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요?”

    사란트 림은 태연하게 말하며 따지듯이 말했다. 그의 입술 한쪽 끝이 슬쩍 말려 올라가 있었다.

    명백한 비웃음.

    하북팽가의 기사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팽만리는 그의 얼굴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검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단칼에 목을 베어 뜨거운 맛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잠자코 지켜보던 팽선웅 백작이 나섰기 때문이었다.

    “만리 경! 진정하시게! 지금은 화산파의 공식 입장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일세.”

    “끄응…… 알겠습니다, 영주님.”

    팽만리는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한 뼘가량 뽑았던 세이버를 검집에 밀어 넣고 억지로 분노를 삭였다.

    원래의 자리로 걸어가면서도 사란트 림을 노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한 번만 더 혓바닥을 잘못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위협적인 눈빛이었다.

    하지만 사란트 림은 콧방귀를 뀌며 비웃음으로 응수했다.

    “저, 개…….”

    “만리 경! 자중하게!”

    “……예, 영주님.”

    팽선웅 백작이 나직한 목소리로 주의 주자 발작하려던 팽만리가 불끈 말아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면서 겨우 대답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사란트 림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비웃는 기색이 역력한 그런 웃음이었다.

    “역시, 하북팽가의 기사들은 듣던 대로 성격이 불같군요. 밑에 두시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

    “그건 자네가 걱정해 줄 문제가 아니라고 보네. 그래, 화산파에서 그대를 사절로 보낸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 보게.”

    팽선웅 백작은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화산파는 마교와 연루되었을 확률이 높은 곳이다. 애초에 무림맹과 다른 노선을 걷는 집단이기도 하다. 무림맹과 쌍벽을 이루는 정도련(正道聯) 산하의 영지다.

    좋은 뜻으로 찾아왔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거만해 보이는 사란트 림의 태도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좋은 얘기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건 뻔하지만 궁금증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적지와 다름없는 이곳에 사절단을 보냈는지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자애롭고도 지혜로우신 임철중 백작님께서는 무당파를 돌려달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뭣이?”

    팽선웅 백작은 밑도 끝도 없는 사란트 림의 요구에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차라리 싸우자고 했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사란트 림의 말은 맡겨 놓은 물건을 달라는 것처럼 담담하고도 뻔뻔했다. 얄밉도록 침착했으며 당연한 요구를 한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팽선웅 백작의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답을 기다리는 모습은 당장에라도 목을 쳐 버리고 싶을 만큼 사람의 성질을 건드렸다.

    이를 으드득 갈아붙인 팽선웅 백작은 겨우 화를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대는 하북팽가에게서 무당파를 돌려받고 싶다고 한 게 맞소?”

    “그렇습니다. 무당파는 우리 화산파의 휘하로 들어오길 원했었습니다. 약속도 받아 낸 상태입니다. 그 증거로 화산파와 반목하는 무림맹 소속의 하북팽가를 함께 바치겠다면서 이번 영지전이 벌어진 것이지요. 아! 물론 저희는 하북팽가와 싸우길 원한 적은 없습니다.”

    “하북팽가와 싸우길 원하지 않았다?”

    팽선웅 백작은 기도 안 찬다는 듯 허탈하게 말했다.

    억지를 부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뻔히 들통 날 헛소리를 저렇게나 태연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사란트 림은 팽선웅 백작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에도 상관하지 않고 뻔뻔하게 맞장구를 쳐 왔다.

    “당연하지요. 하북팽가의 기사들이 얼마나 용맹한지는 동대륙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말렸습니다만 굳이 하북팽가를 치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길 것이라고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무당파가 하북팽가에 흡수당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점입가경(漸入佳境).

    사란트 림은 자신의 말에 심취해 다른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건 상관하지 않고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하북팽가의 수뇌부들이 인상을 벅벅 긁고 있는데도 그의 입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원래 오늘 날짜로 무당파가 화산파에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바뀌어 있으니, 부득이하게 팽선웅 백작님께 무당파의 양도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뺀질거리면서 말하는 사란트 림의 얼굴은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냉랭해지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한 사란트 림의 태도에 지켜보던 사람 중의 하나가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닥쳐라!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나불대지 마라! 누가 화산파 따위한테 무당파를 갖다 바치겠다고 했단 말이냐!”

    손대면 피가 묻어 나올 것처럼 얼굴을 붉힌 장학기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사란트 림을 향해 삿대질하는 그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학기가 분노를 토하는 대상인 사란트 림은 정작 태연하기만 했다.

    “훗! 하북팽가로 전향한 무당의 기사인 모양이군. 약속의 내용은 그대가 더 잘 알 텐데?”

    사란트 림은 장학기의 갑옷과 무기가 하북팽가의 기사와 다른 것을 발견하고는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

    “누가 마교 따위와 그런 허무맹랑한 약속을 하겠는가! 계속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그 더러운 주둥이를 찢어 놓고 말겠다!”

    “마교라니? 누가? 이건 화산파와 무당파 사이의 약속이자 거래였다. 나는 맹약에 따라 정당한 요구를 하고 있을 뿐이다!”

    사란트 림은 마교의 일은 모르는 것이라는 듯 의뭉을 떨었다.

    “흐음…… 학기 경, 일단 진정하게. 그대! 사란트 림이라고 했던가?”

    “그러합니다. 하북팽가의 영주시여.”

    사란트 림은 여전히 비웃음이 느껴지는 말투로 팽선웅 백작의 부름에 대답했다.

    “그대가 몸담은 화산파가 마교와 관련이 없다는 말을 믿어도 되겠는가?”

    “마교라니 당치도 않은 얘기입니다. 비록 무림맹과 가는 길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화산파는 엄연히 동대륙의 정통을 이은 영지입니다. 저 무당파의 기사는 우리 화산파에 오명을 씌워 영지를 내주지 않으려 수작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런가? 거참 이상한 일이로군. 화산파가 무당파에 지원해 주었다는 기사단은 마교의 기사들이었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교의 기사라니요? 저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저희는 마교와 관련이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무당파가 마교와 내통했을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사란트 림은 특유의 느물거리는 말투로 고개를 흔들었다. 여전히 비웃음이 가득 담긴 표정이었다.

    팽선웅 백작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다시 한 번 참아 내면서 호흡을 조절했다. 분명 화산파에서 마교와 내통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저렇게 뺀질거린다. 사절이 아니었다면 단숨에 목을 비틀어 죽이고 싶었다.

    팽선웅 백작이 겨우 화를 눌러 참으면서 사란트 림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데, 곁에서 호위를 서던 정천우가 슬그머니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정천우가 머리를 숙여 팽선웅 백작의 귀에 가까이 대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도록 내공을 사용해 막을 형성했다. 아직 내공이 일류 수준을 넘지 못하기에 거리를 좁혀 내공의 낭비를 막은 것이다.

    전음을 사용하면 좋겠지만 예의가 아니었기에 직접 다가가는 귀찮음을 감수하는 것이다.

    “영주님, 의심스러워서 그런데, 저 뺀질거리는 자식을 손 좀 봐줘도 되겠습니까?”

    “저들은 사절단이지 않은가.”

    팽선웅 백작은 복화술을 하듯 거의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서 말했다.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는 그저 정천우의 귓속말을 들어주기만 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저 녀석이 풍겨 대는 기운이 심상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팽선웅 백작은 정천우가 일부러 자신에게 다가와 부탁을 하는 것에 조금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는 무심한 듯 시키는 일만 하던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팽선웅 백작은 상체를 옆으로 움직여 정천우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사심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하기야, 이 친구가 도움을 주었으면 주었지, 내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았으니…….’

    “좋네, 허락할 테니 궁금한 점이 있으면 그대가 물어보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영주님.”

    장천우가 군례를 올리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얼굴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암암리에 내공을 끌어올리면서 힘을 모으는 중이었다. 계단을 내려가 사절단에게 다가가는 정천우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당신! 진짜 화산파의 사절이 맞아?”

    정천우는 다짜고짜 시비조로 사란트 림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사란트 림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품위 없이 지껄이는 정천우의 말과 건들거리는 걸음걸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주와 얘기를 하는데 방해꾼들이 너무 많은 것도 그를 짜증 나게 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자연히 사란트 림의 얼굴엔 불쾌한 감정이 잔뜩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대는 누구기에 감히 영주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끼어드는가!”

    “이봐! 싸가지 없는 거 다 뽀록 났으니까, 뻘 소리 하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당신 화산파 사람 맞아? 화산파 놈들이라면 고리타분한 말코 냄새가 나야 하는데 넌 구린내가 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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