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97화 (97/200)
  • # 97

    Chapter 25. 화산파의 사절단 (1)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거기! 미적대다간 다시 치료소로 보내 버리는 수가 있다!”

    정천우가 반들반들하고도 붉은 빛깔의 몽둥이를 쓰다듬으면서 살벌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지목받은 기사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음에도 지목받은 기사는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뒤로 누웠다. 붉은 빛깔의 몽둥이가 움찔하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원래는 보통의 몽둥이였다. 그러나 교육을 빙자한 구타가 이어지면서 피가 묻는 바람에 몽둥이의 색이 점차 붉은색을 띠게 되었다.

    거기에는 자신의 피도 한몫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지목받은 기사는 정천우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했다.

    그제야 정천우의 얼굴에 만족스러워하는 미소가 걸렸다. 물론 찰나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머리통은 잠시 다른 곳에 놔두고 왔다고 생각해라! 난 명령하고 네놈들은 그대로 움직인다. 잔머리 굴릴 생각하지 마라! 내가 제일 싫어하는 놈이 바로 잔머리 굴리는 놈이다. 하늘이 어떤가!”

    “파랗습니다.”

    “그래, 아직 참을 만한가 보구나! 저 하늘이 노랗게 보일 때까지 오늘은 신나게 구른다. 앞으로 취침!”

    정천우가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하늘을 보고 누웠던 기사들은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몸을 일으켜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웠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지난 훈련 기간에 뼈에 아로새길 만큼 충분히 경험했다.

    “그 상태에서 들어라! 저기 연무장 끝 우물이 목표다. 오리걸음으로 선착순 20명! 반칙하다 걸리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린다! 출발!”

    “와아아아아!”

    기사들이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오리걸음으로 부지런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목소리 봐라!”

    기사들의 목소리에 힘이 느껴지지 않자 정천우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순간, 기사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악을 썼다.

    “안 지겨우십니까?”

    샤칼이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샤벨타이거 기사단 소속이라 무당파 소속 수련기사를 훈련시키는 자리에 함께 있는 중이다. 무식한 구타와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훈련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질리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정천우는 수련기사를 괴롭히는 걸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욱 강도가 높아지기만 했다. 자신이 왜 이런 쓸데없는 수련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지 의문을 느끼는 중이다.

    헤이먼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실거리는 인간을 괴롭히면서 묘한 미소를 짓는 정천우가 두렵기까지 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다짐하게 되었다. 이 성질 더러운 인간에게 잘못 보이지 말자고…….

    “왜, 심심해? 너도 같이 굴러 보고 싶어?”

    “아, 아닙니다!”

    샤칼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 정천우가 장난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다.

    “자식, 놀라기는…… 저 녀석들은 조금 더 굴려야 해! 몸속에 잡스러운 마나를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어. 근육이 완전히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쥐어짜야 체질에 맞는 마나를 몸이 알아서 선택하게 될 거야.”

    “그런 걸 알아볼 수 있다는 겁니까?”

    잠시 당황하며 물러났던 샤칼은 신기한 얘기에 흥미를 느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주인으로 삼게 된 정천우는 신기한 능력을 지녔다. 일반 기사들은 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일들을 해낸다.

    재미있는 건 그렇다고 다른 일반 기사들보다 마나양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경이로울 정도의 힘과 속도를 낸다. 솔직히 ‘마나의 맹세’로 인한 주종관계가 아니었다면 해부해 보고 싶을 정도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샤칼의 모습에 정천우가 피식 웃었다. 아직도 샤칼의 저런 얼굴이 남자라는 게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

    “마나라는 건 미묘하게 특성이 다 달라. 몸부터 만들어 놓고 마나가 쌓이길 기다려야 하는데, 저놈들은 어설프게 수련했어.”

    “어설프게 수련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샤칼은 오리걸음으로 씩씩대며 걸어가는 건장한 체구의 수련기사들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보기에는 균형 잡힌 체형에 근육이 잘 발달한 사람들로 보였다. 그래서 더 의문이 생겨났다. 저런 육체가 어설프게 단련된 거라는 말이 너무나 이상했다.

    “글쎄…… 딱 잘라 뭐라고 꼬집어 말한 순 없는 문제라서 말이지. 그래, 이렇게 말하면 쉽겠네. 우리가 먹는 빵 있지?”

    “네.”

    “밀가루 반죽을 화덕에 넣고 불을 지피는데, 화력이 약해. 그러면 어떻게 되지?”

    “그냥 딱딱한 밀반죽 덩어리가 되겠죠.”

    “맞아. 그것과 똑같아. 저 녀석들은 화력이 부족해. 육체가 만들어지려면 한계를 넘는 수련을 해야 하는데, 힘들다고 자신과 타협한 거지. 그래서 육체가 발전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인 거야.”

    “흐음…… 뜻을 다 이해할 순 없지만, 대충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감 잡았습니다. 그럼 언제까지 저렇게 굴릴 겁니까?”

    “이제 거의 몸이 만들어져 가니까 며칠 내로 단약을 먹여야겠지. 내일부턴 육합권을 가르칠 생각이니까.”

    정천우는 대충 날짜를 셈하면서 단약 먹일 시기를 가늠했다. 조만간 육합권을 가르치고 잡스럽게 뒤섞인 마나를 정제할 생각이었다.

    하북팽가의 기사들이야 워낙 단련이 잘 되어 있어서 단약을 즉시 복용시켰었다. 하지만 무당파의 수련기사들은 수준이 그보다 한참 떨어졌다. 어째서 그동안 무당파가 하북팽가를 넘보지 못했는지 기사들의 수준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수련기사들의 기량이 높아진다면 부족한 기사전력을 단숨에 메워 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중이다.

    정천우와 샤칼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선착순으로 들어올 수련기사를 기다리는데, 연무장에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제인 마법사 같습니다.”

    “알아.”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주인님과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자식이…… 나도 알아.”

    정천우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손가락으로 긁적였다.

    “갈 테니까, 너희가 하스론과 같이 애들 좀 굴려.”

    반질반질한 붉은 빛깔의 몽둥이를 헤이먼에게 건네주며 정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이먼은 정천우에게 몽둥이를 넘겨받으면서 묘한 웃음을 지었다. 정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인을 향해 걸어가기가 무섭게 헤이먼의 얼굴이 돌변했다.

    “꼭 해 보고 싶었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크흐흐흐…….”

    “……변태냐?”

    몽둥이를 들고 기괴한 표정을 짓는 헤이먼의 모습에 샤칼이 끔찍하다는 듯 거리를 벌렸다.

    두 사람이 그렇게 노닥거리는 사이 정천우는 경공을 사용하듯 제인을 향해 빠른 속도로 접근했다.

    “제인 마법사님!”

    “천우 경, 오랜만이에요.”

    정천우가 달려 나와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자 제인 역시 환한 미소로 답해 주었다.

    붉은 입술을 꼬물거리는 제인의 밝은 얼굴에 정천우는 가슴에서 후끈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영지전이 벌어질 당시, 제인은 비장함과 애틋함이 뒤섞인 얼굴로 격정적인 키스를 정천우에게 해 주었다. 그때의 감촉을 잊을 수 없었던 정천우는 살짝 목이 타는 갈증을 느꼈다.

    문제는 그래서 조금은 껄끄러웠다. 중원의 여인과 달리 적극적으로 덤벼드는 제인이 약간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싫은 건 또 아니다. 오히려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도 생겼다. 제인을 발견하자마자 경공까지 발휘해 가며 뛰어왔을 정도니, 말 다했다.

    “일은 잘 돼 가시죠?”

    제인은 오던 길을 향해 몸을 돌리며 정천우에게 물었다. 편안하게 말을 걸고 있지만 속으로는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정천우와 만나는 것이기에 마음의 준비를 하려던 참이다. 그래서 점점 발걸음이 느려지고 있었다. 처음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정천우가 너무나도 일찍 나타나는 바람에 준비해 왔던 말을 잊어버렸다.

    조금은 더 세련되고 여성스럽게 말하고 싶었는데, 너무나도 무미건조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준비해 왔던 간지러운 말들을 꺼내기엔 늦어도 한참이나 늦었다.

    그래도 다시 다른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정천우의 반응이 너무나 빨랐다. 제인이 다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정천우가 입을 열었다.

    “물론이죠. 제인 마법사님은요?”

    ‘아! 젠장…… 이게 아니잖아!’

    정천우 역시 말을 꺼내 놓고 뜨악한 심정이 되어 속으로 욕설을 터트렸다. 반사적으로 대답해 놓고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근사하게 대답하면서 분위기를 잡고 싶었다. 그런데 이 망할 놈의 주둥이는 뭐가 그리 급한지 머리가 생각이란 걸 하기도 전에 말을 내뱉고 있었다.

    차라리 제인이 자신의 말을 못 듣고 지나치길 바랐지만 바람은 이루어질 턱이 없는 일이었다.

    “저야 늘 똑같아요. 일하고 마법 연구하고…… 무당파에 와서 조금 더 할 일이 많아진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어요.”

    “그래도 건강해 보여서 좋습니다.”

    “아…… 네…….”

    정천우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제인은 웃을 수 없었다.

    ‘뭐지? 건강해 보인다고? 살쪘다는 얘긴가? 하긴…… 요즘 생각 없이 많이 먹기는 했어. 어쩜 좋아…… 근데 딱히 살찐 느낌은 없었는데?’

    제인은 정천우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머리를 팽팽 굴렸다.

    로브 속으로 은근슬쩍 손을 넣어 자신의 뱃살을 더듬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뱃살이 많이 잡히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영지의 일을 본답시고 의자에만 앉아 있느라 운동 부족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인 마법사님?”

    “네, 네? 부르셨어요?”

    제인은 걸으면서 한참이나 딴생각에 빠져 있느라 정천우가 몇 번이나 부른 뒤에야 대답할 수 있었다.

    “……불렀죠.”

    “제게 뭐라고 하셨어요?”

    “……못 들으셨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다시 한 번 얘기해 주시겠어요?”

    “별 얘기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하하하…….”

    정천우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오늘따라 더 아름다워 보이십니다.’라고 말했다. 정말 큰마음 먹고 어렵게 꺼낸 얘기다.

    그런데 자신의 말에 제인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과 있으면서 딴생각이나 하고 있다. 그래서 서운했다.

    기껏 용기를 냈는데 무시당한 꼴이었으니까.

    “……제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요. 죄송해요. 천우 경을 영주님께서 찾으세요. 말씀드린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요.”

    제인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정천우를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팽선웅 백작에게 굳이 자신이 직접 정천우를 데려오겠다고 말해 놓고 이제껏 엉뚱한 얘기만 한 셈이다.

    “영주님께서 절 찾으신다는 겁니까? 어째서요? 또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겁니까?”

    “아니요. 일이 생겼다기보다는 승전 축하 파티 때문이에요. 그리고 오늘 화산파에서 사절단이 온다고 해서 영주님이 호위를 부탁하셨어요.”

    “아…… 그런 거였군요.”

    “네, 아무래도 우룡 경의 빈자리가 생각보다 커요.”

    “알겠습니다. 그럼 서둘러야겠군요. 영주님께서 기다리실 테니까요.”

    정천우는 애써 화제를 바꿨다.

    제인과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자꾸 엇나가는 느낌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무슨 얘기를 해도 어색할 것만 같았다. 차라리 다음 기회에 편안한 상태에서 대화하는 편이 나았다.

    정천우가 제인을 지나쳐 한 걸음 더 앞장서서 걸었다. 그러자 제인이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칫! 같이 걸으면 좀 좋아? 근데 아까 천우 경이 뭐라고 했던 거지? 뭐야…… 정말 오늘 나 왜 이러니?’

    제인은 아까 정천우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려고 애를 쓰며 인상을 찌푸렸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했던 건 생각난다. 하지만 그가 무슨 얘기를 했었던 것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진짜, 나 왜 이러는 건데? 그런데 정말 나 살찐 걸까?’

    “앗! 천우 경! 같이 가욧!”

    제인은 자신의 몸을 더듬다가 정천우가 멀찌감치 걸어가는 것을 깨닫고는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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