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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94화 (9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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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24. 세력 확장 (3)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팽선웅 백작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이제껏 유지하던 무표정에서 벗어나 측은해하는 기색을 풍기고 있었다.

    “무당파가 살아날 방법이 있다. 바로 하북팽가의 그늘 아래 하나로 뭉치는 것이다. 피해자인 우리가 무당파를 흡수한다면 누구도 무당파를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우우우우…….”

    무당파의 병사들은 나지막하게 야유를 보내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팽선웅 백작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무당파가 하북팽가와 합쳐진다면 마교와 합작으로 벌였던 일들을 무마시킬 수 있다. 피해자인 하북팽가가 무당파를 정복한 셈이 되기에 응징이 끝난 것이 된다.

    그러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태어나서부터 무기를 들고 전쟁을 벌이기 전까지 하북팽가라면 이를 갈던 무당파의 사람들이다. 하북팽가의 그늘 아래 하나로 뭉치자는 말은 모욕적이기까지 했다.

    “큭…… 원통하구나!”

    이제껏 침묵으로 일관하던 무당파의 기사 하나가 눈물을 흘리며 분노의 감정을 드러냈다.

    자랑스러운 무당파의 기사가 되었음을 얼마나 뿌듯해했던가!

    이제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이 되니 그저 참담한 기분이었다.

    그런 무당파 기사들을 바라보며 팽선웅 백작이 헛기침을 했다. 주의를 끌기 위해서다. 아까와는 달리 무당파의 포로들은 너무나 쉽게 집중해 주었다.

    “무당파도 그렇지만 우리 하북팽가는 이번 영지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 피해를 무당파가 보전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체적인 방위력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북팽가의 그늘 아래 무당파를 흡수하겠다고 했지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도와달라는 부탁이다.”

    팽선웅 백작은 그 말을 끝으로 무당파의 포로들을 둘러보며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포로들의 모습에 팽선웅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어쩌길 바라는가! 설마 너희 무당파의 그늘로 하북팽가가 들어가길 바라는 것인가!”

    무당파의 포로들이 아무런 말도 못하고 웅성거리기만 하자 팽선웅 백작이 미간을 좁히며 크게 소리쳤다.

    그럼에도 포로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말도 안 될 소리였다. 전쟁의 승자가 패자 밑으로 들어가는 법은 없다.

    도와달라고 말은 했지만 결국은 하북팽가가 무당파를 먹어 버리겠다는 소리다. 당연한 일이지만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에 싫은 것이다. 하북팽가에 흡수되면 노예와 같은 삶을 살게 될 테니까 말이다.

    쿵!

    팽선웅 백작이 또 한 번 발을 굴렀다. 그러고는 분노한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가 하북팽가의 밑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다면 더 이상 권하지 않겠다. 단! 우리는 승자의 권리로써 너희를 노예로 만들 것이다.”

    “으으으…….”

    “제길…….”

    포로들은 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다.

    승자가 패자를 노예로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눈치를 보느라 말할 기회를 놓친 게 조금 억울할 뿐이다.

    이런 결정은 병사들인 자신이 할 게 아니라 기사들이 해 줘야 한다. 그런데 찍소리도 못하고 있다. 병사들로서는 답답하기만 했다.

    “아직 내 얘기는 끝나지 않았다. 너희를 노예로 거두고, 우리는 영지전을 이대로 종결할 것이다.”

    팽선웅 백작은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포로들은 처음엔 팽선웅 백작의 말뜻을 파악하지 못했다.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전쟁이 끝났으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머리가 돌아가는 기사들은 달랐다.

    “말도 안 되오! 영지전을 이렇게 끝낼 순 없소!”

    이제껏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던 기사 중의 하나가 피를 토하는 듯한 고함을 질렀다.

    병사 출신의 포로들은 자신의 상관이 왜 저러나 싶었다. 무당파의 주전력이 궤멸된 상태에서 영지전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팔짱을 낀 채 포로들의 반응을 살피던 팽선웅 백작이 자신을 향해 소리친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인가?”

    “지금 무당파의 영지는 병력이 없는 상태요! 하북팽가가 지금 상태로 손을 뗀다면 무당파는 끝장이오! 차라리 점령해 주시오! 다른 영지에서 약탈을 시작한다면…… 크윽!”

    무당파의 기사는 말을 잇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입으로 무당파를 점령해 달라고 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영지전을 종결한다면, 병력이 없는 무당파가 앞으로 겪을 일은 너무나도 뻔했다.

    영지전이 지속되는 상황이라면 다른 영지들의 간섭이 없을 테지만 하북팽가에서 영지전이 종료되었다고 선포한다면…….

    그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병사들 역시 기사가 하는 말을 듣고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겨진 가족들이 그제야 걱정된 것이다. 포로가 된 병사들과 기사는 팽선웅 백작을 간절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팽선웅 백작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우리 하북팽가는 현재 무당파를 점령하러 갈 여력이 없다. 너희가 데려온 마교의 기사단 탓에 하북팽가의 기사단은 반 토막이 났다. 난 분명히 말했다. 도와달라고! 그러나 거절한 것은 바로 너희다.”

    팽선웅 백작은 냉정한 얼굴로 기사의 말을 묵살했다.

    그러자 포로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무당파의 영지에 남은 가족들이 무슨 봉변을 당할지 걱정되었다. 기사들에게 손가락질하면서 욕하는 무당파의 병사까지 나오고 있었다.

    “제길! 우리더러 대체 어쩌라는 거요! 기사님네들! 결정을 내리시오! 우리의 가족들을 다른 놈들이 짓밟는 걸 볼 거요?”

    “썅! 영지전은 너희 기사 놈들이 벌여 놓고, 왜 항상 우리 병사들만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건데? 내가 돈을 달랬어, 잘살게 해 달랬어? 난 그저 우리 마누라와 새끼랑 알콩달콩 살고 싶단 말이다!”

    “개 후레아들 놈의 새끼들! 이기면 지들이 다 처먹으려 드는 것들이, 깨지고 나니까 주둥이 꽉 닫고 있냐? 뭔가 말을 하라고! 이대로 있을 거야?”

    포로가 된 병사들은 분통을 터트리며 기사들을 욕했다.

    억울한 것이다!

    하북팽가를 싫어하는 것은 무당파의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싫다 해도 일반 병사가 전쟁을 벌일 생각을 하진 않는다. 그저 현실에 만족하며 살고 싶을 뿐이다.

    하북팽가와 전쟁을 벌이면서 동료들의 허무하고도 처참한 죽음을 너무 많이 보았다.

    이젠 지겹다!

    자신들이 희생당하는 것만 해도 억울한데 아무 죄 없는 가족들까지 고통을 받아야 한다면 참을 수 없었다.

    병사들이 아우성치면서 기사들을 욕했다. 무당파의 기사들은 그럴수록 더욱 머리가 밑으로 내려갔다. 팽선웅 백작에게 항의하던 기사는 다른 동료 기사들을 둘러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살아남은 기사 중에서 자신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 그래 봐야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오래 칼질했다는 정도였지만 말이다.

    누군가는 나서야 할 때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고향이…… 가족이…… 위험해질 테니까 말이다.

    결심을 굳힌 무당파의 기사는 팽선웅 백작이 서 있는 단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이제껏 욕을 하며 아우성치던 병사들의 소란이 천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다른 무당파 기사들은 그가 왜 저러는가 싶었다.

    “나는 무당파의 스톰 기사단 소속 장학기다! 우선 너희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알아주길 바란다! 마교를 끌어들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만약 협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화산파가 마교와 합심해 우리를 치러 왔을 것이다.”

    장학기는 마교와 협력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놀라운 얘기를 꺼냈다.

    무당파의 병사들은 뜻밖의 사실에 경악하면서도 오히려 침묵을 지켰다. 장학기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이다.

    놀라기는 하북팽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화산파까지 개입되었을 줄은 몰랐으니까 말이다.

    “사십 평생을 무당파의 기사로 살아왔다. 무당파의 기사로서 자부심이 있었고 자랑스러웠다. 비록 좋지 않은 일이 있었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무당파의 기사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비록 포박된 상태였지만 장학기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얘기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포로들은 저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껏 쉬쉬하고 있던 비밀을 털어놓아 준 것만으로도 병사들의 불만은 많이 희석되었다.

    언제나 군림하려고만 들던 다른 기사들과 달리, 진솔하게 말하는 장학기에게 인간적으로 끌렸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 무당파의 기사라는 자랑스러운 신분을 버리려 한다.”

    “우우우우…….”

    “안 됩니다! 우리는 무당의 사람입니다!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장학기의 폭탄 발언은 병사들은 물론, 시무룩하게 고개 숙이던 기사들까지 놀라게 하고 말았다.

    그러나 장학기의 얼굴에는 동요하는 기색이 드러나지 않았다. 묵묵히 소란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당! 그 무당파가 사라질 위기다! 영지? 무당파의 사람만 있으면 어디든 무당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무당파의 사람이 없으면 다 무슨 소용 있겠는가! 나는 오늘 무당파의 기사에서 물러나 하북팽가의 기사가 되겠다! 무당파를 위해! 그리고 나의 가족을 위해!”

    장학기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순간, 포로들의 아우성이 거짓말처럼 일제히 멈췄다. ‘가족을 위해’라는 말이 장학기의 입에서 튀어나온 직후의 일이다.

    가족!

    지금 이 자리에서 하북팽가에 귀의하지 않는다면 가족이 위험하다.

    무당파의 병사들과 기사들은 주먹을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장학기는 천천히 몸을 돌려 팽선웅 백작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가라앉혔다.

    철컹! 철커덩!

    금속 갑옷이 바닥에 부딪치면서 묵직한 충돌음을 일으켰다. 그 소리는 포로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여보! 제기랄!”

    그 광경을 지켜보던 포로 중의 하나가 아내를 떠올리며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은 병사의 행동은 순식간에 전염됐다.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듯 병사들이 무릎을 꿇으며 파도를 만들었다.

    “크흑…… 이대로 무당은 사라지는가! 아아…….”

    아직도 갈등하던 무당파의 기사들은 자신의 병사들이 앞을 다투어 무릎을 꿇는 광경을 보고는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기사들 역시 자신의 소중한 가족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무당파를 점령해 주십시오!”

    “점령해 주십시오!”

    장학기가 선창하듯 소리치기가 무섭게 포로들이 한목소리로 애원했다.

    무당파의 포로들이 모두 투항하자 팽선웅 백작이 목을 가다듬었다.

    “너희의 뜻, 고맙게 받겠다! 좋다! 당장 무당파를 점령하러 출정 준비를 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자발적인 의지를 존중해서 하북팽가와 무당파의 영지가 안정되면 다시 원래대로 돌려줄 것을 약속하겠다. 이것은 나 팽선웅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

    “하북팽가의 영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팽선웅 백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학기가 감동한 얼굴로 소리쳤다.

    뜻밖의 약속에 무당파의 나머지 기사들과 병사들이 당장에라도 울 듯한 얼굴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잔뜩 무게를 잡은 팽선웅 백작은 단상에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팽수수를 향해 엄지를 척 들어 보이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참 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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