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93화 (93/200)
  • # 93

    Chapter 24. 세력 확장 (2)

    ***

    “대체 어디로 날 끌고 가려는 건가! 나는 자랑스러운 마교의 기사다! 모욕을 줄 바에는 차라리 죽여라!”

    “응! 그럴 거야.”

    포박된 채로 끌려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메칸에게 정천우가 감흥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뭐?”

    “차라리 죽여 달라며? 소원대로 해 줄 테니까 입 닥치고 걷기나 해.”

    정천우는 포박된 밧줄을 당기면서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강한 모습을 보이던 메칸은 정천우가 죽이겠다고 하자 복잡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마교를 위해서라면 죽음 따윈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죽음이 코앞에 닥쳐오니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천우 경, 그렇다고 대놓고 말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팽선웅 백작이 곁으로 다가와 나직한 목소리로 핀잔을 주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좀 솔직한 편이라서 말입니다.”

    “뭐, 죄송할 일은 아닐세. 휘유…… 많기는 많군.”

    팽선웅 백작이 광장에 모아 놓은 무당파의 포로들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전투가 생각보다 빨리 끝났지만 기사단의 궤멸과 장천근의 도주로 사기가 저하되면서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생존한 병사가 4천 명에 이르렀다. 120명에 달했던 무당파의 기사 중에서는 살아남은 자가 겨우 31명에 불과했다.

    메칸을 끌고 가는 이유는 팽수수의 계책 때문이었다.

    팽선웅 백작과 정천우가 사람의 키 높이 정도 되는 단상에 올라섰다. 뒤따르던 수뇌부들은 팽선웅 백작과 정천우의 뒤에 섰다.

    밧줄로 줄줄이 묶인 무당파의 병사와 기사들을 둘러보고는 팽선웅 백작이 헛기침하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무당파의 병사들과 기사들은 들어라! 나는 하북팽가의 영주 팽선웅 백작이다.”

    “우우우우…….”

    팽선웅 백작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포로들 사이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팽선웅 백작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은 동료를 학살한 ‘적’일 뿐이니까 말이다. 오히려 더욱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대들의 심정이 어떤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무당파에서 먼저 도발해 왔다. 그대들은 알고 있는가? 무당파에서 설치한 ‘마교의 디바인 마크’ 때문에 우리 영지에 대규모 몬스터 침공이 있었다.”

    “우우우우! 거짓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워라!”

    “개소리! 미친 소리 하지 마!”

    “씨부랄 놈이 어디서 사기를 쳐! 확…….”

    팽선웅 백작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병사들이 야유를 퍼부으며 부정의 말과 함께 욕설까지 내뱉었다.

    야유가 나오든 말든 팽선웅 백작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눈은 무당파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유와 욕을 해 대는 병사들과 달리, 기사들은 심란한 얼굴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조용! 그럼 그대들의 기사에게 묻겠다! 마교와 결탁한 사실을 인정하는가!”

    마나를 있는 대로 다 퍼부어 소리친 팽선웅 백작이 무당파 기사들을 바라보며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무당파의 기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무당의 기사들이여! 말하라! 마교와 결탁한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가!”

    팽선웅 백작은 재차 기사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무당파의 기사들은 시선을 피하기 급급할 뿐, 아무런 부정도 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제야 무당파의 병사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마교의 무리와 결탁한다는 것은 동대륙 전체를 배신하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성세를 누리던 동대륙이 사분오열된 것은 바로 마교 때문이었다.

    하북팽가와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할지라도 마교와 손을 잡는 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짓이다.

    “기사님들! 아니라고 속 시원하게 대답하십시오!”

    “우리 무당은 마교 따위와 결탁하지 않습니다!”

    “기사님들! 대답을!”

    “대답을!”

    보다 못한 무당파의 병사들이 자신의 상관인 기사들을 쳐다보며 간절한 목소리로 답변을 요구했다.

    하지만 무당파의 기사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쿵!

    광장을 울리는 커다란 소리에 시끄럽게 아우성치던 무당파의 병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팽선웅 백작이 마나를 담아 발을 구른 것이다.

    무당파의 병사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까처럼 팽선웅 백작에게 야유를 보낼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인정할 순 없었다. 자신들의 상관인 무당파의 기사들이 입을 열지 않았을 뿐, 마교와 결탁했다는 것을 시인한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이자는 마교의 기사다. 기억나는가!”

    팽선웅 백작은 마나 구속 마법이 걸린 밧줄로 꽁꽁 묶인 메칸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누구인지 당연히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마교의 기사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었다. 다른 영지에서 이번 영지전을 돕기 위해 지원 나온 기사단이라고 알고 있었다.

    무당파의 병사들은 평범해 보이는 메칸을 마교의 기사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우우우우! 믿을 수 없다!”

    “기사라는 것도 믿을 수 없다!”

    “그따위 쓰레기 같은 마교 놈들한테 우리 무당이 도움을 청했을 리가 없다!”

    무당파의 병사들은 이마에 핏대까지 세우면서 소리쳤다.

    진짜로 무당파가 마교와 손을 잡았다면 이제껏 살아온 자신들의 삶이 부정당하는 꼴이다.

    하북팽가와 벌인 전쟁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

    포로로 붙잡힌 지금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적장에게 야유를 퍼부을 수 있는 이유!

    그것은 무당파가 동대륙에서 공명정대하고도 유서 깊은 영지라는 자부심 때문이다.

    하지만 마교와 결탁했다는 팽선웅 백작의 주장이 진실이라면……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닥쳐라! 나는 위대한 대마신의 종! 감히 네깟 것들이 나의 존재를 무시하려 드는 것인가!”

    “…….”

    메칸은 마교를 욕하는 무당파의 병사들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고서도 메칸의 욕설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마교의 위대함을 찬양하며 동대륙 사람들을 깔아뭉개는 건 기본이었다.

    그의 말이 이어지면서 무당파의 병사들은 할 말을 잃었다.

    메칸의 입에서 줄줄이 쏟아지는 마교와 무당의 얘기.

    무당파의 병사들은 저게 사실이냐는 표정으로 자신들의 상관인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당파의 기사들은 입을 꾹 다물고 아예 눈까지 감아 버렸다.

    무언의 긍정.

    포로가 된 무당파의 병사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배신감에 입을 벌리며 황당해했다.

    그러는 사이, 팽선웅 백작의 입이 열렸다.

    “마교는 우리 동대륙 사람의 적이다. 이자가 마교의 기사라는 증거를 보여 주겠다. 천우 경!”

    “예, 영주님!”

    “그의 입을 벌려 주시오.”

    “알겠습니다.”

    정천우는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메칸의 곁으로 다가가 내공을 담은 손으로 혈도를 제압했다. 점혈을 위해 정천우가 필요했던 거였다.

    그의 손이 몇 차례 움직이자 메칸의 눈에 경련이 일어났다.

    “이, 이게,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메칸은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깨닫고 당황하고 말았다. 마법은 확실히 아닌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당해 보는 상황에 메칸의 정신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꿋꿋하게 마교인의 신념을 보여 주며 장렬히 산화할 생각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무슨 치욕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메칸의 눈이 독에 차올랐다.

    혀를 내밀고 씹으려는 순간!

    “자식, 그건 곤란하지.”

    정천우가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뒤통수에 손을 뻗어 재빨리 아문혈(啞門穴)을 봉쇄했다.

    “…….”

    혀를 물어 자결하려던 메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턱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움직일 수 있는 데라곤 눈이 고작이었다.

    메칸이 완벽하게 제압된 것을 확인한 팽선웅 백작은 품속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이것은 오늘 스티에르 신관께서 내게 주신 성수(聖水)다.”

    팽선웅 백작은 유리병에 든 물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마개를 열어 한 모금 마셨다. 유리병 내부의 성수가 반쯤 줄어든 모습을 무당파의 병사들에게 보여 주었다.

    팽선웅 백작은 성수가 반 정도 남은 유리병을 들고 메칸에게 다가갔다.

    “으으으…….”

    메칸의 눈이 공포로 얼룩졌다. 몸에서 잔경련이 일어날 만큼 필사적으로 움직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정천우가 마혈을 봉쇄한 탓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마교의 기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길 바란다.”

    팽선웅 백작은 공포에 질린 메칸의 입을 억지로 벌리고 유리병에 든 성수를 입에 들이부었다. 나머지 손으로는 메칸의 코를 막았다.

    메칸이 거부하려고 했지만 숨을 참을 수 없었기에 결국에는 유리병에 든 성수를 마시고 말았다.

    마나 구속 마법이 새겨진 밧줄로 묶인 상태였다. 마나를 움직일 수 없었던 메칸은 목구멍을 타고 들어온 성수에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크극! 큭…… 크룩…….”

    메칸의 얼굴이 고통으로 얼룩졌다.

    엄청난 경련이 그의 몸에서 일어났다. 흰자위를 드러내면서 입으로 거품이 흘러나왔다.

    투둑, 투두둑…….

    붉게 변한 얼굴에서 혈관이 도드라지게 튀어나오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목에서는 연속해서 듣기 거북한 신음을 내뱉었다.

    그렇게 괴로워하던 메칸의 몸에서 시커먼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마치 검은색의 수증기가 솟아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우우우…….”

    무당파의 병사들은 메칸의 괴기스러운 모습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침음을 흘렸다. 뭐가 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인간의 몸에서 시커먼 기운이 나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교의 기사들이 성수를 마시면 괴로워한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검은 기운을 흘리는 경우는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

    “마교의 사람들은 마계의 기운을 흡수해 무공을 사용한다고 들었다. 이자를 보라! 이것이 바로 마계의 기운이다. 무당파는 이런 놈들을 끌어들여 우리 하북팽가를 치려고 한 것이다!”

    “…….”

    팽선웅의 담담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무당파의 병사들과 기사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건 심각한 문제다.

    마교를 끌어들였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다른 영지의 공격을 받아도 할 말 없는 일이다. 어째서 영주인 장천근이 이토록 무모한 일을 계획했는지 원망스러운 생각만 들었다.

    단순히 메칸의 몸에서 검은색 기운이 새어 나온다고 해서 무당파의 병사들이 절망하는 게 아니다. 병사들인 자신보다 더 자세한 정보를 아는 기사들이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게 문제다.

    찔리는 게 없다면 이 모든 게 거짓이라고 길길이 날뛰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무당파의 기사들은 입을 다물고 남의 일인 것처럼 눈을 감고 있다.

    “제기랄…….”

    “기사님들! 뭐라고 말 좀 해 보시오! 저 개소리가 진짜 개소리라고 화 좀 내 보시오!”

    “씨발! 됐어! 우린 망했어! 이젠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무당파의 병사들이 기사들을 부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무당파의 기사들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상황을 살피던 팽선웅 백작이 다시 한 번 마나를 모아 발을 굴렀다.

    쿵!

    “내 말을 들어라!”

    팽선웅 백작이 눈에 힘을 주며 말하자 무당파의 병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쳐다보았다. 욕을 하며 비아냥거리던 아까와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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