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91화 (91/200)
  • # 91

    Chapter 23. 풍요 속의 빈곤 (4)

    ***

    두 영지 중에서 하나가 사라져야 끝날 것처럼 벌어졌던 전투는 싱겁게 막을 내렸다.

    정천우가 장천근의 머리를 들고 나타난 순간, 무당파 병사들의 사기는 곤두박질쳤다. 하북팽가의 기사들까지 합세해 장천근의 죽음을 알려 댔던 것이다.

    끝까지 저항하던 무당파의 기사들마저 무기를 던지고 투항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더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다. 시즈 타워를 목책에 붙여 놓고 바락바락 기어오르던 병사들도 무기를 집어 던지고 항복해 왔다.

    이번 전쟁으로 하북팽가는 상당한 피해를 당했지만 다양한 공성 병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성과라면 성과지만 입맛이 쓴 전리품이었다.

    전투가 싱겁게 끝난 바람에 가장 바빠진 사람은 영주인 팽선웅 백작이었다.

    “무장을 해제하고 수용소를 건설하라! 적 기사들은 한곳에 모아 감시하고, 피해 상황을 보고하라!”

    팽선웅 백작은 팽씨 성을 부여받은 기사들에게 엄중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비록 승리하긴 했지만 마음이 무거워진 팽선웅 백작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천우 경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구나.’

    팽선웅 백작은 한쪽에서 샤벨타이거 기사단을 이끌고 전쟁 포로들을 관리하는 정천우를 바라보았다.

    만약 장천근 후작의 목을 들고 오는 게 조금 더 늦었더라면 애꿎은 생명이 얼마나 많이 사라졌을 것인가. 다행스럽게도 제때에 적장의 목을 베어 와 소모전으로 치닫기 전에 전투를 멈출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정천우는 팽선웅 백작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적병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분류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내 흥미를 잃었다. 굳이 자신이 나서서 할 일이 아니었다.

    “하스론!”

    “옛, 단장님!”

    “네가 책임지고 분류 작업을 마무리한다. 나는 따로 일이 있어 가 봐야 한다.”

    “염려 말고 다녀오십시오. 일 처리가 끝나고 계속 이 자리에 대기하겠습니다.”

    “오래 걸릴 일은 아니니까 그런 걱정은 필요 없다. 무슨 일이 생기면 목책으로 오도록.”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단장님!”

    하스론은 절도 있게 군례를 올렸다.

    정천우가 이번 전투에서 보여 준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거의 일인 기사단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특히 전투 막바지에 보여 주었던 활약은 하스론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었다.

    “그럼 수고해 줘.”

    정천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는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린 순간, 그의 얼굴은 전혀 다르게 변해 있었다. 이를 꽉 물고 목책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 망할 새끼들을 가만히 놔두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슈발리에와 싸우던 도중,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덮쳤던 마법을 말이다.

    그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내공이 회복된 것 말고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뭐, 사실대로 말하자면 약간은 도움이 되긴 했다. 평소보다 더욱 위력적인 무공을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마법이 자신의 주변에서 폭발한 것이 좋은 의도가 아니었으리란 것쯤은 안다. 자신을 노리고 그처럼 무지막지한 마법을 사용할 놈이 누군지 뻔하다. 전투가 무사히 끝났으니 이제 응징의 시간이 온 것이다.

    “아쭈? 저것들 봐라?”

    정천우의 한쪽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허둥대면서 목책 밑으로 내려오는 샤칼과 헤이먼을 발견한 그는 내공을 끌어올려 경공을 발휘했다.

    파바박!

    내공이 담긴 두 다리로 바닥을 차며 빠르게 질주했다. 순간적으로 흙먼지가 일어나 길게 늘어질 만큼 엄청난 속도였다. 말이 전력 질주할 때의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보였다.

    “이 자식들! 거기 안 서?”

    “히익!”

    “자, 잠까안!”

    정천우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는 모습에 도망치려던 샤칼과 헤이먼이 뜨악한 얼굴로 사색이 되었다.

    그게 실수였다.

    고막을 두들기는 고함에 잠시 지체한 사이, 정천우의 몸은 어느새 하늘을 날아오르고 있었다.

    “б, бЦфЛ…… 실드!”

    “우와악!”

    샤칼은 당황한 얼굴로 급하게 실드 마법을 펼쳤다. 헤이먼 역시 부랴부랴 전투 도끼를 뽑아 들고 마나 쉐도우를 만들어 냈다.

    그런 두 사람에게 정천우의 역천검이 내리꽂혔다.

    펑! 콰앙!

    역천검에 맺힌 뇌전의 마나 쉐도우가 거의 동시다 싶은 순간에 샤칼의 실드와 헤이먼의 전투 도끼를 내리쳤다.

    “컥! 이, 이게 무슨…….”

    “커억! 이런 미친 위력은…….”

    샤칼과 헤이먼은 공격을 막아 내는 데 성공했으나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미친 위력이었다.

    아니, 위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정천우의 마나 쉐도우는 샤칼의 실드를 어이없이 부숴 놓았다. 헤이먼의 전투 도끼에 어렸던 마나 쉐도우 역시 단번에 파괴해 놓았다.

    “이 새끼들이 튀어? 개자식들아, 일부러 그랬지?”

    정천우가 인상을 구기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샤칼과 헤이먼은 대답할 상태가 아니었다. 샤칼은 가슴을 움켜쥐며 제자리에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어 대기 바빴다. 그의 귀 뒤에 그려진 룬어가 빛을 내고 있었다.

    헤이먼 역시 머리를 움켜쥐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모두가 정천우의 공격을 막아 내면서 엉뚱한 마음을 먹었기에 생겨난 고통이었다.

    “이것들 봐라? 지금 반항하는 거지? 내가 묻는 말에 대답 안 해?”

    정천우는 버럭 화를 내며 무릎을 꿇고 괴로워하는 샤칼을 가슴팍을 발로 걷어찼다.

    “일, 일부러 그런 게…… 크아악! 아, 아니…… 으윽! 으아악! 크으으…….”

    샤칼은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발광을 해 댔다. 심장을 옥죄어 오는 고통을 참아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실드 마법을 사용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곧바로 공격 마법을 사용하려 한 것이 고통의 원인이었다.

    마나의 맹세를 한 맹약자를 공격하려는 순간에 고통이 치밀었다. 그 때문에 실드 마법이 박살 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살기 위한 본능이었지만 ‘마나의 맹세’는 그런 상황을 전혀 이해해 주지 않았다.

    헤이먼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천우의 공격을 막아 내는 순간, 몸에 익은 습관대로 전투 도끼를 되돌려 후려치려 했다. 바로 그때, 머리가 빠개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바로 ‘수호의 펜던트’를 착용한 맹약자를 건드린 효과였다.

    “이것 봐라? 잘못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거지? 이 새끼들, 오늘 잘 걸렸어.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한 따까리 하려고 했는데 알아서 매를 버는구나, 매를 벌어.”

    정천우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샤칼과 헤이먼을 내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감히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몰랐으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마법에 직격당한 당시 정천우는 보았다. 목책 위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샤칼과 헤이먼을 말이다.

    “확실히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들은 어설프게 건드리면 기어올라서 안 된다니까? 개자식들! 오늘 곡소리 나게 한번 맞아 보자.”

    정천우는 역천검을 땅바닥에 꽂아 놓고 검집을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풀었다.

    제대로 두들겨 패기 전에 몸을 덥히는 것이다.

    “컥! 잘못…… 으아악! 잘못했어! 잘못했다구! 크아아아악!”

    “크헉! 다시는, 다시는 딴마음 먹지 않…… 으아악!”

    정천우가 다가오려고 하자 샤칼과 헤이먼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정천우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아주 혼꾸멍을 내줄 생각이었다.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말이다.

    “난 너희 같은 놈들을 잘 알아. 주둥이로는 잘못했다고 빌면서 뒤로는 호박씨 까는 놈들이야. 난 뒤통수 근질거리는 거 죽도록 싫어하는 놈이거든.”

    정천우가 으스스한 미소를 지으며 바닥을 뒹구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아예 반쯤 죽일 작정을 했는지, 그의 손에 들린 검집에 마나 쉐도우가 어리고 있었다. 검날에 맺혔을 때처럼 날카로운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무시무시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끄아악! 하, 한 번만 봐다오. 한 번만…… 커헉!”

    샤칼이 눈물 콧물 다 짜내면서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정천우의 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빠르게 움직였다.

    마나 쉐도우를 머금은 검집이 샤칼의 머리통을 호쾌하게 강타했다.

    빡!

    “크악! 봐달라고 했잖아, 개 씨바…… 끄아아악! 으아아악!”

    얻어맞은 충격이 심장을 옥죄는 고통을 상회하는 순간, 샤칼이 버럭 고함을 지르다가 이내 비명을 지르며 경련을 일으켰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살기를 일으키자마자 더욱 엄청난 고통이 심장을 쥐어짰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악순환이었다.

    맞는 고통에 살기를 품으면 심장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그렇다고 살기를 죽일 수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정천우가 워낙 야무지게 두들겨 패니 절로 일어나는 살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으으으…… 차라리 날 죽여…… 죽이라고, 개…… 커헉! 끄아아아…….”

    샤칼이 독기를 내뿜으면서 씹어뱉듯이 정천우에게 말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살기를 품는 바람에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내가 너냐? 죽이긴 왜 죽여? 그냥 좀 맞으면 돼. 충성을 맹세하고는 뒤에서 개 같은 짓거리를 해? 넌 새꺄, 그냥 아가리 닥치고 맞아. 맞다 보면 ‘아!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후회하게 될 거야. 그때쯤 됐다고 판단되면 끝내 주지.”

    정천우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계속해서 샤칼의 몸뚱이를 검집으로 두들겨 팼다.

    샤칼은 몇 번이고 까무러쳤다가 정신이 들기를 반복했다. 지옥 같은 시간이 끝나길 간절히 기도했지만 정천우의 무정한 손길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는, 다시는 미친 짓…… 미친 짓 안 하겠……습니다.”

    “그럼 또 하려고 그랬냐?”

    엉망으로 망가진 샤칼이 용서를 구하자 정천우는 그의 턱을 붙들고 검집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박 터지는 소리가 나도록 시원하게 머리통을 후려쳤다.

    그제야 샤칼은 시원하게 기절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자, 한 놈은 교육이 끝났고…… 이젠 난쟁이 놈 차례인가?”

    정천우는 고개가 꺾인 샤칼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는 몸을 돌렸다.

    “히끅!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엉뚱한 생각 하지 않겠습니다.”

    헤이먼은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때로는 맞는 놈보다 지켜보는 놈이 더 괴로운 경우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다.

    샤칼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두들겨 맞는 모습을 코앞에서 지켜본 헤이먼이다. 자신의 차례라는 듯 정천우가 피 묻은 검집을 들고 다가오자 불알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자신도 저렇게 맞았다가는 죽을 것 같았다.

    “알아, 잘못한 거 알아! 다 저 귀때기 이상한 놈 때문이잖아? 네가 그 마법이란 걸 썼겠냐? 다 저 새끼가 했겠지!”

    정천우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헤이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마, 맞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 자식 혼자서 벌인 일입니다.”

    헤이먼은 잘하면 얻어맞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책임을 샤칼에게 떠넘겼다. 이미 의식을 잃었으니 정천우가 또 손댈 리는 없겠다는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래, 네가 마법사도 아닌데 그 개 같은 마법이 나한테 발사된 건 네 책임이 아니지.”

    “맹세코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헤이먼은 죽었다가 살아난 얼굴로 정천우에게 매달렸다. 그러자 정천우의 얼굴에 싱그러운 미소가 맺혔다.

    “안다고 했잖아. 그런데 말이다…… 왜 안 말렸어? 왜 안 말렸어! 죽어, 이 새꺄! 죽어!”

    정천우는 곧바로 표정을 바꾸며 검집으로 헤이먼의 면상을 후려 갈겼다.

    “컥! 이 썅노무…… 끄어억! 으아아악!”

    헤이먼은 열이 뻗쳐 버럭 고함을 지르다가 이내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괴로워했다. 살기를 품은 순간, 수호의 팬던트에 걸린 맹약이 발동했다.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샤칼과 헤이먼은 똑같은 놈들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헤이먼의 교육은 샤칼과 마찬가지로 거의 한 시간이나 걸렸다. 사이좋게 기절한 두 놈을 나란히 눕힌 정천우는 역천검을 검집에 꽂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젠장, 부하들이 생기면 뭐하나. 새끼들이 참…….”

    정천우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두들겨 패 놓은 샤칼과 헤이먼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충성을 맹세한 놈들이 걸핏하면 암습이나 해 대니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능력 좋은 부하들이 이 모양이어서야, 이건 빛 좋은 개살구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딱 지금 정천우의 상황과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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