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90화 (90/200)
  • # 90

    Chapter 23. 풍요 속의 빈곤 (3)

    ***

    “다들 좀 쉬었나!”

    “예, 단장님!”

    “좋아! 놈들을 해치우고, 도망치는 영주 놈의 목을 챙긴다. 모두 말에 올라타라!”

    정천우는 내공을 회복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제 준비가 끝났다.

    자신이 회복할 때까지 아무 짓도 안 하고 기다려 준 놈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 주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가장 확실하게!

    두개골을 열어서 뇌에 직접!

    “끼랴아!”

    전투마의 배를 걷어찬 정천우가 역천검이 끼워진 창을 높이 들고 선두에 나섰다.

    하스론을 비롯한 나머지 3명은 그의 뒤에서 창을 단단히 쥐고서 방패를 낀 왼손으로는 말고삐를 잡았다. 격돌의 순간이 찾아오면 정천우의 뒤에서 빠져나와 3명이 한 조를 이루어 적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마주 달려온다! 충격에 대비해!”

    “밀리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막아 냅니다!”

    하스론과 레밍턴이 우렁차게 대답하며 방패를 앞세웠다.

    공격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스론이 생각할 것은 오로지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뿐이다. 공격은 슈라에게 맡기고, 두 사람은 오직 방어만 염두에 둔다.

    그게 마상 전투를 위한 삼재진이다.

    양옆의 공격과 전면을 방어하고 슈라가 중앙에서 오직 한 놈만 공격한다.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그만큼 안전하다. 광범위한 피해를 주기보다는 범위가 작더라도 확실한 피해를 강요하는 전술이었다.

    “크와아압!”

    8명으로 이루어진 무당파의 기사들이 괴성을 지르면서 삼각형을 이루었다.

    선두의 장맹천이 할베르트를 내밀어 정천우를 노렸다. 창날 가득 맺힌 푸른색 마나 쉐도우가 시리도록 빛을 뿜어냈다.

    “흥!”

    정천우는 코웃음을 치면서 창을 한 손에 들었다.

    동대륙 기사들의 정통적인 싸움을 받아 줄 마음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상대를 겨누는 대신에 오히려 창을 늘어뜨렸다. 상대의 할베르트가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에야 정천우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노란빛을 발하는 역천검이 솟아올랐다.

    마치 용암이 터지듯 눈부신 빛이었다.

    쾅!

    마나 쉐도우를 담은 두 개의 무기가 부딪치는 순간 요란한 폭음이 터졌다.

    정천우의 느린 대응에 승리를 예감하던 장맹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우두둑!

    역천검에 맞선 할베르트의 창대가 갑옷을 우그러뜨리며 장맹천의 갈비뼈를 부러뜨렸다. 힘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겨드랑이에 단단히 고정한 게 패착이었다.

    고통에 괴로워할 사이도 없었다. 정천우는 강력한 공격을 하고서도 여유가 남았다. 창과 창이 맞부딪치고, 말이 스쳐 가는 그 짧은 순간에 한 번 더 창을 휘둘렀다.

    정천우는 장맹천에 대한 공격을 완료하기 무섭게 창을 마구 휘저었다. 그를 공격하려던 할베르트 세 자루가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그러는 사이, 뒤를 따르던 하스론과 레밍턴은 방패를 들어 곧장 찔러 오는 할베르트를 튕겨 냈다.

    콰광!

    마나 쉐도우를 담은 할베르트가 방패와 부딪치는 순간 파열음과 불꽃을 토했다.

    그 한 번의 공격으로 끝나지 않았다. 적 기사의 숫자가 많았다.

    삼재진을 익히면서 방어법을 철저히 익힌 덕을 톡톡히 보았다. 손목이 욱신거렸지만 두 차례의 공격을 무사히 방어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하스론과 레밍턴의 사이에서 말을 몰던 슈라가 머리 위로 팔을 치켜들며 아래쪽으로 창을 내리꽂았다. 그리고는 꽂혔다 싶은 순간 손을 놓아 팔목이 다치는 걸 방지했다.

    “반전하라! 반전하라!”

    장맹천이 고함을 지르며 말 머리를 돌렸다.

    영주가 위험하다.

    2명의 기사를 붙여 두긴 했지만 예상외로 적이 강력했다. 첫 격돌에서 한두 놈은 저세상으로 보내든지,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낙마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그렇게 배치했다.

    하지만 계획이 틀어졌다.

    오히려 피해는 자신들이 입었다. 대열을 이루던 기사 하나가 적의 창에 맞아 갑옷째 꿰뚫렸다.

    장맹천은 급선회를 하면서 영주에게 달려갔다. 영주를 구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급선회하는 그는 말과 함께 쓰러질 듯 몸이 기울어져 있었다.

    나머지 기사들도 쓰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급선회하면서 방향을 틀어 나갔다.

    기사들은 자신의 상관인 장맹천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뒤를 따라 방향을 틀어 가던 기사들은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맹천의 목 주변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의아함을 느낄 사이도 없이 장맹천의 몸에서 머리통이 맥없이 떨어져 나왔다.

    버젓이 자신들에게 명령까지 내렸던 장맹천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몸에서 머리가 분리되었다.

    눈이 잘못된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방향을 틀고 나서 말이 자세를 회복하기가 무섭게 장맹천의 몸이 힘없이 굴러떨어졌다.

    콰작! 콰자작! 콰작!

    뒤따르던 기사들이 어떻게 피할 사이도 없었다. 머리를 잃은 장맹천의 몸뚱이는 전투마에 의해 짓밟혀 끔찍한 형상이 되고 말았다.

    정천우의 빠른 공격에 자신의 목이 베인 것도 모르고 장맹천이 움직인 결과가 이것이었다. 그러다가 말이 달리면서 발생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늦게 목이 떨어진 거였다.

    기사들은 뜻밖의 상황에 분노와 슬픔이 묻어 나오는 얼굴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으아아아! 주, 죽여 버릴 테다!”

    “영주님을 지켜라!”

    상관의 시신을 짓밟은 기사들은 슬픔을 느낄 사이도 없이 더욱 질주했다.

    장맹천을 잃은 것만 해도 미쳐 버릴 판이었다. 주군까지 놈들에게 당하게 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정천우는 허둥대며 도주하는 영주를 추격하고 있었다.

    애초에 처음 격돌한 장맹천과 재격돌할 생각조차 없었다. 일단 붉은색과 푸른색 깃털로 장식된 투구를 쓴 장천근의 목을 따는 걸 최대의 과제로 삼고 있었다.

    정천우가 말을 몰면서 창을 들었다. 역천검에 마나 쉐도우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흔들렸다.

    목표는 비대한 몸집의 장천근이었다.

    파우웅!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역천검이 장착된 창이 정천우의 손을 떠났다. 그러고는 재빨리 손을 뒤로 더듬어 여분의 창을 꺼내 들었다. 스톰 기사단의 말이었기에 그의 손에 들린 것은 할베르트였다.

    “끄아아악!”

    역천검이 장천근의 갑옷을 꿰뚫었다. 듣기 싫은 비명과 함께 장천근이 말에서 떨어졌다.

    “영주니임!”

    “젠장! 젠장!”

    영주를 호위하며 도주하던 2명의 기사가 비명을 지르면서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죽음을 불렀다. 정천우와 3명의 기사는 그들이 멈칫하는 사이 창을 휘둘렀다.

    파캉! 콰직! 콰지직!

    등을 보인 상대에게 굳이 삼재진의 수법을 활용할 필요가 없었다.

    정천우가 그들을 지나치며 할베르트로 머리통을 후려쳤고, 하스론 일행이 세 개의 창으로 나머지 기사를 난도질해 놓았다.

    정천우에게 당한 기사는 머리가 통째로 뜯겨 나갔고, 합공을 받은 기사는 갑옷 사이로 피를 쏟아 내며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반전한다!”

    크게 소리친 정천우가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방향을 바꿨다. 목표를 제거한 상태라 무리한 방향 전환 대신에 반경이 커지더라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방향을 틀었다.

    “놈들을 해치운다!”

    “옛, 단장님!”

    부하들의 우렁찬 기합성에 만족한 정천우가 할베르트를 쳐들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달려오는 6명의 기사들을 마주하도록 방향 전환이 끝났다. 정천우는 뇌전의 기운을 할베르트에 주입하면서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뇌전의…… 샤벨타이거…….”

    “역시…….”

    “정신 차려! 지금 감탄할 때야?”

    슈라는 자신의 동료 둘이 정천우의 몸에서 피어난 뇌전의 샤벨타이거에 감탄하자 버럭 고함을 질러 정신을 일깨웠다.

    그러나 슈라 역시 정천우의 등을 쳐다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추격에 나서 오랜 전투로 지친 상태였다. 자신은 마나 쉐도우를 겨우겨우 형성하는 정도의 수준이다.

    그런데 정천우는 선명한 마나 쉐도우를 만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전신으로 마나를 퍼뜨리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냥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주군을 잃은 무당파의 기사들이 상처 입은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은 괴성을 지르며 접근하고 있었다.

    창대를 단단히 움켜쥐고 레밍턴과 하스론의 방패 사이에서 목표를 설정했다.

    삼인방이 그렇게 격돌에 대비하는 사이, 정천우는 크게 호흡을 들이마셨다. 적과 맞닥뜨릴 시간을 가늠하던 그의 팔이 빠르게 움직였다.

    “차압!”

    우렁찬 기합성과 함께 정천우의 손에 들린 할베르트가 빠르게 움직였다.

    파바박!

    할베르트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노란색 빛의 궤적을 세 개나 만들었다. 빛의 궤적에 걸린 무당파의 기사들은 무기에 이어 갑옷까지 갈라졌다.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의 첫 번째 초식 맹호수참(猛虎手斬).

    도법의 초식을 할베르트로 펼친 것이다.

    찰나다 싶은 순간에 세 번의 공격이 무당파의 기사들을 휘몰아쳤다. 무당파의 기사들은 정천우의 빠른 움직임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들의 기량을 한참이나 상회하는 정교하고도 빠른 공격에 적 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적 기사단과 엇갈려 지나치는 순간, 정천우는 말안장을 박차고 비룡번신(飛龍飜身)의 수법으로 몸을 뒤집었다. 목이 잘려 말에서 떨어지는 기사의 자리에 착지하고는 곧바로 할베르트를 휘둘렀다.

    콰직! 콰드득!

    마나 쉐도우를 담은 두 번의 베기 공격에 격돌에서 살아남았던 2명의 기사가 변변한 반항도 못 해 보고 목숨을 잃었다.

    “후우…… 그거 좀 움직였다고 힘드네.”

    정천우가 말고삐를 잡아당기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시체가 된 기사들을 싣고 앞에서 달리는 말들과 점차 거리가 벌어지더니 이내 완전히 멈춰 섰다. 말 머리를 돌려 장천근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스론 일행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면서 장천근의 등에 박힌 역천검의 창대를 잡아 힘껏 뽑았다. 갑옷이 갈리는 듣기 싫은 쇳소리와 함께 검날이 뽑혀 나왔다.

    정천우는 말에서 내려 장천근의 투구를 벗겨 내고 시체의 목을 내려쳤다.

    서걱!

    두터운 지방질과 함께 장천근이 목이 베어졌다. 피가 주르르 흘러나와 땅바닥을 적셨다.

    정천우는 붉은색과 푸른색 깃털로 장식된 투구를 잘린 머리에 씌우고는 역천검에 꽂았다.

    “단장님! 약간의 문제가…….”

    “문제? 무슨 문제?”

    정천우는 이제 적장의 수급을 들고 가 아직 한창 싸우고 있을 적 병사들에게 항복을 권할 참이었다. 그런데 하스론이 제법 심각해 보이는 얼굴로 말끝을 흐리자 왜 그러는지 궁금증이 생겨났다.

    “원래 귀족들은 귀족법에 의거해 생명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래? 뭐, 이미 죽어 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죽은 놈을 되살릴 수는 없잖아?”

    “하지만…… 귀족의 머리를 창에 꿰어 가는 건 좀…….”

    하스론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귀족법의 보호를 받는 귀족을 죽인 것도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그런데 수급을 창에 꿰어서 가지고 간다면 문제는 더욱 커질 것이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 전쟁은 이 새끼가 일으켰잖아? 그런데 이놈들은 생명을 보호받는다고? 웃기지 말라고 그래! 전쟁은 목숨 걸고 하는 거야!”

    정천우는 콧방귀를 뀌며 말에 올라탔다.

    하지만 당당하게 말했던 것과 달리 은근슬쩍 장천근의 수급을 역천검에서 뽑아 말안장에 걸었다.

    “돌아간다!”

    “예, 단장님!”

    정천우가 아무렇지 않은 척 크게 소리치고는 앞장서서 말을 몰았다.

    3명의 기사들이 크게 대답하고는 뒤를 따랐다. 그들의 입가에는 가느다란 미소가 맺혀 있었다. 뜻을 굽히지 않을 것 같더니 슬그머니 의견을 들어주는 모습이 재밌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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