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Chapter 22. 불길한 상상 (5)
원래는 날아드는 적을 몸으로라도 막아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엄청난 충격은 그의 몸을 너무나 쉽게 날려 버렸다. 일어설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탓에 그저 동료들을 응원하는 게 고작이었다.
살아남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포기했다. 단지 지휘관으로 보이는 정천우를 죽일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강한 적이 줄어들면 그만큼 마교의 동대륙 진출이 쉬워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저항 불능 상태로 만든 상대의 몸에서 금빛의 샤벨타이거가 만들어진 순간, 그의 바람은 허무하게 뭉개졌다.
“이, 이게 무슨…….”
기가 막힌 광경에 흑룡 기사단원은 입을 뻐끔거렸다.
마지막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한 동료가……
끝까지 남아 한 놈이라도 더 데려가겠다고 독기를 뿜어내던 부하가……
너무나 허무하게 죽었다.
겨우 빛이 한 번 번쩍였을 뿐인데!
반쯤 넋이 나간 흑룡 기사단원은 멍한 눈으로 다가오는 정천우를 바라보았다.
“이 자식, 뭐야? 겁먹었냐?”
정천우는 두 팔이 으스러진 채로 쓰러진 흑룡 기사단원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빨리 끝내려고 무리하게 내공을 남발했더니 단전이 뻐근한 느낌이었다.
혼원벽력신공의 장점인 빠른 내공 회복 능력이 전륜공의 장점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내공 고갈로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대로 망가뜨린 건 맞는데…….’
정천우는 일부러 더 과장되게 행동했다. 불길한 상상이 정천우를 무모하게 만들었다.
이놈들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이렇게 끔찍한 놈들이 가장 최말단 조직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마교는 그랬으니까.
중원에서 보았던 마교는 엄청난 규모를 가졌다.
오직 강함만을 추구하는 존재들이었다.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조차 기괴한 대법을 받으면 무인으로 탈바꿈해 대는 곳이다.
물론 그런 식으로 무인이 된다고 해서 고수급 반열에 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괴상한 대법을 원하는 일반인들이 복수하고 싶은 대상은 같은 일반인. 삼류의 무공 실력만으로도 복수를 이루는 데에는 충분했다. 대법을 받다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궁지에 몰려 최악의 선택을 하는 자들이다.
꿈도 희망도 미래도 없는…… 독기와 광기와 정신을 지배당하는 자들.
그런 인간들의 집합체가 바로 마교라는 곳이다.
눈앞에 숨을 헐떡이는 흑룡 기사단원을 떠보기 위해서 과감하게 행동했다. 이놈들도 중원의 마교도처럼 벼랑 끝에 내몰려 미련한 선택을 한 놈들은 아닌지 궁금해졌다.
정천우는 흑룡 기사단원의 자존심을 건드리기 위해서 피에 젖은 진흙투성이의 신발로 그의 볼을 툭툭 건드렸다.
자존심 높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게 기사라는 족속이다. 이런 식의 도발은 그들의 드높은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다.
‘꼴에 자존심은 살아 있다는 건가?’
정천우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인상을 벅벅 긁는 흑룡 기사단원의 모습은 몸만 성했다면 벌써 달려들고도 남았을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정상적인 인간의 반응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건 마치 섭혼술(일종의 최면술)에 당한 놈처럼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 자체가 무시되어 있다.
속으로는 불안했지만 속내를 감추며 정천우가 또다시 발끝으로 흑룡 기사단원의 볼을 톡톡 건드렸다.
“이젠 죽고 싶은 마음이 없는 모양이지? 뭐, 살려 달라면 살려 줄 수도 있다. 대신에 평생 노예로 살아야 할 거다. 그것도 나름 나쁘진 않을 거다. 하북팽가만큼 노예를 잘 대해 주는 곳도 없으니까.”
정천우는 비웃음을 흘리며 흑룡 기사단원을 약 올렸다. 쓰러진 놈이 이를 가는 소리가 그의 귀에까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개소리! 누가 네놈들 따위의 노예가 될 것 같으냐! 흥! 그래, 지금은 너희가 이겼다만 기다려라! 곧 우리 마교의 최정예가 이곳으로 넘어와 네놈들을 갈아 마실 것이다!”
“자식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우리 숫자가 얼만 줄 알아? 영지 안에는 지금 숫자보다 두 배나 많은 정예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다. 무당파와 마교가 연합한다고 우리가 겁먹을 줄 알았어? 흥!”
“그래, 마음껏 웃어라! 우습지도 않다, 우습지도 않아! 우리가 전부일 것 같아? 크하하하! 쿨럭, 쿨럭, 쿨럭…… 후욱, 후욱…… 촌구석에 처박혀 있으니 우리의 무서움을 모르는구나. 재미있는 사실 하나 알려 줄까?”
흑룡 기사단원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웃음을 터트리다가 피 거품을 흘리며 기침을 해 댔다. 그러고는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정천우를 향해 키득거렸다.
‘걸렸어!’
정천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신이 행한 불쾌한 유도신문에 걸려 정보를 내놓을 기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그저 조금 감정을 상하게 했을 뿐인데도 흑룡 기사단원의 입에서는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일부러 영지의 전력을 부풀려 말했는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기색을 드러낸다.
불안한 마음 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설렘 반으로 정천우가 몸을 낮췄다.
“뭐가 재미있는데?”
“크크큭! 안 가르쳐 준다, 이 개자식아!”
으적!
흑룡 기사단원은 키득거리다가 자신의 혀를 빼내어 힘껏 깨물었다.
가뜩이나 온몸에 창상(創傷, 칼에 다친 상처)을 입은 상태라 피를 많이 흘렸다. 그런 상황에서 혀를 깨물자 흑룡 기사단원의 얼굴에선 빠르게 생기가 빠져나갔다.
“궁그해 디져 바아. 키키킥…….”
흑룡 기사단원은 너덜거리는 혀를 움직여 끝끝내 정천우를 도발하고 웃음을 머금으며 숨을 거뒀다.
“뭐 이렇게 지독한 새끼가 다 있지? 그런 말은 내가 해야 어울리는 거야! 망할 새끼 같으니.”
정천우는 시체가 된 흑룡 기사단원에게 침을 뱉으며 일어났다.
놈의 말처럼 단지 이들만으로 끝이 아니라면 큰일이다.
‘아니, 이 인간들이?’
시체에서 눈을 뗀 정천우의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전투에 승리한 하북팽가 기사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끝까지 지독하게 저주를 내뱉으며 죽어 간 흑룡 기사단원에게 질리고 만 것이다.
“뭘 멍청하게 서 있어? 대열! 대열을 갖춰! 전쟁 다 끝났어? 놈들이 저기 있다! 정신들 차려!”
정천우가 악을 쓰며 손가락으로 영지의 반대편을 가리켰다.
라이온 기사단과 타이거 기사단이 무당파의 기사단과 한데 어우러져 혈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도와주지 않는다면 전투가 한없이 길어질 게 확실했다.
‘제길! 경험 없는 새끼들이 너무 많아!’
정천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샤벨타이거 기사단 소속 기사들은 급조해서 결성한 기사단 티를 팍팍 낸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쓰러져 구역질할 것 같은 얼굴의 기사까지 보인다. 정신없는 와중에야 몰랐겠지만 숨 돌릴 정도의 여유가 생기자 새삼 주변 상황을 인식한 모양이었다.
목숨이 오가는 싸움터에서 마음의 여유는 오히려 독이다. 딴생각이 들지 않도록 혹독하게 몰아치는 편이 훨씬 더 정신 건강에 이롭다. 비록 싸움이 끝난 뒤에는 괴로워하겠지만.
정천우는 바닥에 떨어진 하북팽가의 창을 주워들었다. 누군가의 죽음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이가 잔뜩 나간 세이버를 분리해서 버리고 역천검을 대신 장착했다. 그러고는 지쳐 숨을 헐떡이는 전투마에 몸을 실었다. 말 위에 올라탄 정천우는 역천검을 장착한 창을 높이 들었다.
바닥을 치는 내공이나마 억지로 끌어올려 마나 쉐도우를 만들었다. 자신이 현재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키고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것이다.
“라이온 기사단과 타이거 기사단을 구원한다! 함성을 질러라! 우리의 승리를 알려라!”
“우와아아아아!”
정천우가 목이 찢어져라 함성을 질렀다. 그 뒤를 따라 썬더 기사단원과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이 악에 받쳐 꽥꽥 소리 질렀다.
‘많이도 죽었네.’
불안한 얼굴로 함성을 지르며 자신의 뒤로 말을 달리는 하북팽가 기사들의 숫자를 파악한 정천우는 내심 씁쓸했다.
흑룡 기사단을 섬멸하는 전과를 일궈 냈지만 합쳐서 일흔 명이었던 썬더 기사단과 샤벨타이거 기사단의 수는 삼분지 일가량 줄어 있었다.
“창을 들어라!”
난전을 벌이는 라이온 기사단과 타이거 기사단을 돕기 위해 정천우는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냈다. 적의 기세를 꺾고 아군의 기세를 살리기 위해서다.
과연 정천우의 의도가 먹혔는지, 무당파의 기사들이 눈에 띄게 동요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천우 경! 천우 경!”
팽우룡을 수습한 팽만리가 정천우의 고함을 듣고 말을 몰아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팽우룡이 반쯤 죽어 가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운이 다했는지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팽만리가 자신의 몸과 떨어지지 않도록 줄로 묶어 두지 않았다면 금방이라도 말에서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정천우의 곁으로 다가온 팽만리가 손으로 난전이 벌어진 곳을 가리켰다.
“천우 경, 좌측으로 치고 들어갑시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이랴아!”
팽만리가 가리킨 방향을 확인한 정천우가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무당파의 기사들이 전면에 집중하느라 상대적으로 측면에 대한 방비는 허술했다. 팽만리는 아군들로 바글거리는 정면 돌파보다 측면을 치자는 얘기다.
정천우와 팽만리가 선두를 지키며 방향을 틀자 뒤를 따르던 하북팽가의 기사들 역시 방향을 바꿨다.
“적이 방향을 틀었다. 막아! 막아라!”
무당파의 총사령관 장맹기가 당황한 기색을 지우지 않았다.
“하북팽가 놈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닥쳐라! 그걸 지금 누가 몰라서 이러고 있는 줄 아는가! 제길! 멍청한 마교 새끼 때문에 이렇게나 꼬일 줄이야!”
장맹기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슈발리에가 이끄는 흑룡 기사단이 자신들과 공조하지 않고 단독 행동을 하는 바람에 지금의 상황이 벌어졌다.
아군 진지와 하북팽가의 거리가 짧기에 함께 행동해야만 했다. 그래야 기사단 전력이 탄력을 붙이고 파괴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흑룡 기사단을 뒤늦게 쫓아가느라 출발이 늦었다. 가속도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하북팽가의 기사단과 격돌하는 바람에 돌파는커녕 순식간에 난전 상태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상대 기사단 또한 흑룡 기사단이 벌이는 난전을 피하면서 달리느라 가속도를 붙이지 못했다는 것 정도다.
“빌어먹을! 저 자식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강했단 말인가!”
“사령관님! 차라리 후퇴를…….”
“닥쳐라! 닥치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럼 병사들을 버리자는 것인가! 저 많은 병사를 키우기 위해서 얼마만 한 자금이 들었는지 알고 지껄이는가!”
“하, 하오나! 우리의 열세입니다. 지금도 겨우 버티는 상황입니다. 저들이 가세한다면 우리의 필패입니다.”
“우리는 영주님의 뜻에 따른다! 아니! 영주님을 지키지 못하는 기사는 이미 죽은 것이다! 주군보다 우리가 먼저 죽어야 한다! 그게 바로 기사다!”
장맹기는 할베르트(Halbert, 창끝에 도끼의 날을 단 무기)를 꽉 움켜쥐었다.
‘주군이시여! 모실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장맹기는 영주인 장천근이 있는 방향에 고개를 돌려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맹천! 너는 주군을 모시고 신속히 대피하도록 하라! 이곳은 내가 맡도록 하겠다!”
“사령관님…… 그러나…….”
“제발! 언제까지 내 말에 토를 달 것이냐! 마지막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해 줄 순 없겠나! 가라! 내가 수다쟁이 같은 네놈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다! 시간이 없다. 여기가 뚫리면 영주님이 위험해진다!”
“크윽! 알겠습니다! 영주님을 모신 뒤에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이제껏 장맹기의 옆에서 후퇴를 권하던 장맹천은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며 말 머리를 돌렸다.
“제기랄, 너만이라도 살아남아라. 영주님을 잘 부탁한다.”
장맹기가 멀어져 가는 장맹천의 뒷등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동생을 보는 형처럼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부드럽게 풀어졌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흉하게 일그러져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는 하북팽가의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무당의 정신을 놈들에게 똑똑히 새겨 줄 시간이다! 출진하라!”
할베르트를 움켜쥔 장맹기가 전투마의 배를 걷어차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주변에서 전황을 지켜보며 끓는 피를 억지로 잠재우던 스톰 기사단에 소속된 19명의 기사들이 각오를 다지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이번이 마지막 전투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짊어진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