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75화 (75/200)
  • # 75

    Chapter 19. 피할 수 없는 전쟁 (3)

    두 사람이 보는 것은 무당파의 기사단이 아니었다.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며 묵묵히 말을 모는 시커먼 복장의 기사단.

    암울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들의 분위기에 감염된 것인지, 뒤를 따르는 병사들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장천근 후작에게 믿음을 주었다.

    잘 벼려진 칼날과도 같은 기사들.

    곁에 있으면 얼음 굴에 들어온 것처럼 오한이 드는 살기.

    장천근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으로 저들을 꼽을 수 있었다.

    “후후후…… 언제 봐도 살 떨리게 믿음직스러운 놈들이란 말이야.”

    “조금만 더 협조적이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좀 아쉽습니다.”

    “그거야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저들과 우리는 단지 목적이 같을 뿐, 완전한 동료는 아니니까 말일세.”

    “하긴…….”

    장맹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끝을 흐렸다.

    함께 행동하고는 있지만, 무당파의 사람은 아니다. 완전하게 신뢰해서도, 그렇다고 의심해서도 곤란하다. 실력은 믿되, 언제든 배신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북팽가를 처치하고 난 뒤에는 저들과 싸워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장맹기가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맹기 경, 얼굴 좀 풀게. 하북팽가 놈들이 고생 많이 했겠어. 아예 몬스터의 씨가 마른 것 같지 않은가?”

    장천근 후작은 몬스터 산맥 초입에 들어서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동대륙에서는 단순히 혈연관계에 있다고 해서 영주의 자리를 꿰찰 순 없다. 직속 후계라고 할지라도 힘을 지니지 못하면 도태되는 곳이 바로 동대륙이다.

    물론 후계자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일정 수준의 경지에 오르면 영주의 지위를 잇게는 해 준다. 하지만 예우해 준다고 해도 최소한 영지 내에서 상위 10명 안에 드는 정도의 실력은 지녀야 한다.

    비록 중원의 무인처럼 내공을 이용해 감각기관을 극도로 예민하게 조율할 순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일반인들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장천근 후작이었기에 몬스터의 기운 정도는 감지할 수 있다.

    몬스터 산맥 초입에 다다랐음에도 몬스터 특유의 지저분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것이다. 몬스터를 소탕하겠다고 하북팽가의 기사와 병사가 고생했을 걸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것은 장맹기 역시 마찬가지다.

    무당파와 인접한 하북팽가는 눈엣가시였다. 동대륙을 통일한 벽력대제의 후예라는 이유로 거들먹거리는 게 눈꼴셨다.

    인접한 곳이었기에 무당파는 언제나 하북팽가와 비교당해야만 했다. 과도한 경쟁은 문제를 일으켰고, 벽력대제가 죽은 지 3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몬스터가 말끔하게 정리된 것으로 보아 하북팽가 놈들의 출혈도 컸을 것입니다. 좋은 징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기회에 다시는 재기할 수 없게 팽씨 성을 받은 놈들을 깡그리 죽여 없애야 합니다.”

    “안 그래도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네. 아예 팽가의 검술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모조리 불태울 생각이야. 그게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원하신 일이기도 하고.”

    “맞습니다. 전대 영주님께서 하북팽가에 어떤 치욕을 당하셨는지 무당파의 사람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원한을 갚아 줄 때가 온 겁니다.”

    장맹기는 이를 부드득 갈며 허리춤에 걸린 롱소드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두 사람은 하북팽가가 위치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결전을 다짐했다. 치욕스러웠던 과거의 빚을 청산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서…….

    ***

    하북팽가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몬스터 토벌 당시에만 해도 이렇게 정신없지는 않았다. 영지에 직접적인 해가 있는 게 아니라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일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무당파에서 영지전을 선포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영지에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

    하북팽가에 있어 무당파는 지독한 악연으로 점철된 곳이다. 동대륙 최말단에 위치한 하북팽가의 발란 영지를 가로막고서 온갖 야료를 부려 대던 놈들이다.

    팽선웅 백작의 아버지인 팽환문이 참다못해 무당파를 박살 낸 적이 있다. 그게 벌써 20년 전 일이다.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잊히기엔 아직 짧은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하북팽가는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영지민들이 더욱 전쟁 준비에 열을 올리는 기이한 현상과 함께.

    “오늘부터 너희는 샤벨타이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정천우라는 사람이다. 내가 샤벨타이거 기사단의 단장이다.”

    정천우는 어색함을 참아 내고 단상에서 앞에 도열한 기사들을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정천우의 뒤에는 입이 댓 발이나 튀어나온 샤칼과 담담한 표정의 헤이먼이 서 있었다.

    그들은 졸지에 샤벨타이거 기사단의 부단장과 전속마법사가 되었다. 부하가 되었으니 정천우를 따라 자연스럽게 소속된 것이다.

    사실 이건 팽선웅 백작의 노림수이기도 하다. 알게 모르게 샤벨타이거 기사단은 마법 전력까지 갖춘 특수한 기사단이 되었다.

    “급하게 결성한 기사단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샤벨타이거라는 이름 아래 하나가 되었다. 내가 너희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정천우는 잠시 말을 끊었다.

    어울리지 않게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하려니 어색한 것도 있지만 반드시 해 주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죽지 마라! 그리고 동료를 죽게 내버려 두지 마라! 그리고 나를 믿어라!”

    굳은 얼굴로 정천우가 기사단원 하나하나와 눈을 맞출 기세로 둘러보았다. 기사들은 정천우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하북팽가의 명예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마라!

    이제껏 그렇게 배웠던 그들이다. 그런데 기사단장을 맡은 정천우의 부탁…… 아니, 명령은 달랐다.

    명예에 대한 언급이 없다. 생존을 최우선하라는 말이 기사들의 가슴에 묘하게 와 닿았다.

    “충! 기사 레밍턴, 천우 경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충! 기사 하스론,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레밍턴과 하스론이었다. 절도 있는 동작으로 가슴에 오른 주먹을 붙인 채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정천우와 몬스터 토벌전에서 함께 싸웠던 기사들이었다. 당시 정천우의 지휘를 받아 대형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다. 그게 다 정천우가 가르쳐 준 삼재진 덕분이었다.

    그의 명령은 언제나 안전을 최우선으로 했다. 무턱대고 앞으로 나서지 못하게 했으며 개인행동을 금했다. 그럼에도 성과는 가장 많이 냈다.

    이런 사람이 기사단장이 되었으니 레밍턴과 하스론으로서는 믿고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충! 기사 엔서!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충! 기사 빌리! 믿고 따르겠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엔서와 빌리가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며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까지 숙였다.

    얼마 전 정천우의 집에 끌려가 단약을 먹고 정규급 실력을 지니게 된 2명의 청년 기사들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수련기사의 신분에 불과하던 둘이었기에 정천우에 대한 호감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4명의 기사가 충성을 맹세하자 나머지 기사들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사단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처음으로 내린 명령이 너무나 소박하다.

    그 소박함 속에 담긴 진심.

    죽지 말라는 말.

    ‘이거 은근히 낯 뜨겁네.’

    정천우는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지난번 몬스터 토벌전에서 한시적이긴 하지만 기사들을 이끌어 보았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만약 그때의 경험마저 없었더라면 연설이고 뭐고 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대륙을 향해 떠나기 전까지는 함께 생활해야 할 사람들이다. 같이 지내던 사람이 허무하게 죽어 나가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중원의 숲 어딘가에 내팽개쳐져 있을 화의룡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니까 말이다.

    “좋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정천우가 쑥스러운 감정을 집어던지고 힘주어 말했다.

    자신의 부하들이라고 생각하니 괜스레 신경이 쓰였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다.

    ‘의룡이처럼 허무하게 죽는 건 참을 수 없어.’

    이들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천우는 이들의 목숨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모두 일어나라! 오늘부터 우리는 샤벨타이거의 기사들이다! 함성을 질러라!”

    “우와아아아! 우리는 샤벨타이거 기사단이다아!”

    정천우의 선창에 이어 기사들이 목청껏 함성을 질러 댔다.

    ***

    “이게 무슨 소린가?”

    서류를 검토하던 팽선웅 백작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천우 경이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을 모아 놓고 첫 훈련에 들어갔어요. 일부러 구성원 대부분을 천우 경과 인연이 있던 기사들로 채웠다니 다행이죠.”

    팽선웅 백작의 결재를 받으러 왔던 제인이 빙그레 웃었다.

    마음에 둔 남자가 점차 자리를 잡아 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그랬군. 하기야 ‘샤벨타이거 기사단’이라고 소리 지르고 있으니…… 천우 경도 제법 하잖아? 안면이 있는 기사들로 구성해 줬다고는 해도 아직 데면데면할 텐데, 이런 정도의 함성을 이끌어 낸 걸 보면 감각이 있단 말이야. 넌 어때?”

    “네? 영주님, 뭘 말씀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네요.”

    제인은 갑작스럽게 말투를 바꾸며 묻는 팽선웅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도 없어서 하는 말인데, 천우 경과는 잘 돼 가는 거야? 설마 아직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팽선웅 백작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며칠 동안 영지전을 준비한다고 머리가 복잡했기에 긴장도 풀 겸 제인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지는 거였다.

    말 그대로 겸사겸사다.

    팽선웅 백작이 생각하기에 정천우는 하북팽가에 꼭 필요한 인재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인물이기에 충성의 맹세와 같은 것으로 구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자신의 사촌 동생인 제인과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만이 정천우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꼭 정천우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아니라도 관심이 가는 게 당연한 일이다. 제인 역시 이제 시집갈 나이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일이라는 게 뭘…….”

    제인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뭘 알면서 묻고 그래? 남녀 사이에 일어날 일이 뭐가 있겠어?”

    “아직…….”

    “뭐? 아직이라고? 네가 어디가 어때서?”

    “그러니까요. 얄미워 죽겠다니까요? 오빠, 오빠가 생각하기에도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요? 오빠가 봤을 때 어때요? 작아요? 별로예요?”

    제인은 분하다는 얼굴로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훌륭하다!

    일반적인 남자라면 누구나 혹할 만큼 적당한 크기에 매력적인 가슴이다.

    “흠, 흠…… 괘, 괜찮지.”

    팽선웅 백작이 오히려 민망해서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아무리 사촌 동생이라고 해도 대놓고 가슴이 어떠냐고 물으니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칫! 게다가 저 처녀라고요! 숫처녀! 제가 얼굴이 떨어지길 해요, 그렇다고 키가 작아요? 천우 경은 대체 왜 절 가만히 놔두는 거죠? 네? 오빠, 왜 그런 거죠?”

    그간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제인은 처음과 달리 낯 뜨거운 얘기를 마구 늘어놓았다.

    로브 자락을 좌우로 활짝 펼치고서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내니 사촌지간이라도 팽선웅 백작은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때였다.

    쿵, 쿵, 쿵! 덜컥!

    노크 소리와 거의 동시에 영주 집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제야 제인이 황급히 로브 자락을 놓았다.

    “영주님! 무당파의 병력이 이틀 거리에 와 있다고 합니다.”

    “그래?”

    난감하던 차에 잘 되었다는 듯이 팽선웅 백작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뭐지?’

    급한 소식을 전하러 온 병사는 급보를 전해 듣고서 오히려 안도하는 팽선웅 백작의 모습에 의아했다.

    그러나 이내 감탄하고 말았다.

    ‘역시 영주님은 대범하시구나! 이렇게 침착하시다니…… 이번 전쟁은 우리의 승리다!’

    병사는 더욱 존경을 담아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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