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74화 (7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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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19. 피할 수 없는 전쟁 (2)

    ***

    “오늘 그대들을 부른 것은 대책 회의를 하기 위함일세. 다들 짐작하고 있겠지만 무당파에서 영지전을 알려 왔다네.”

    팽선웅 백작은 무거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무당파에서 파견한 정찰조와 정천우가 전투를 벌인 지 5일이나 지났기에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이미 차근차근 영지전을 준비하던 중이었으니까 말이다.

    “수수 경! 전쟁 물자는 어떻게 되었는가.”

    “네, 영주님! 보고드립니다. 영지전이 장기화될 것을 염두에 두고, 농성을 위해 군량과 쿼렐을 충분히 비축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지난번 몬스터 침공 당시 대량의 기름을 사용했기에 이번 영지전에서는 화공을 사용할 수 없을 듯합니다.”

    팽수수는 그 외에도 무기 현황과 병사의 수, 영지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자경단의 숫자까지 세세하게 보고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지난번 몬스터 침공과 토벌전에서 상당수의 병사가 죽거나 다쳤다. 하지만 호전적인 하북팽가의 영지민을 통해 부족한 병사의 수는 금세 원상 복구되었다.

    궁병대 2032명, 창병대 5123명, 검병대 1012명, 방패병대 2156명.

    병과로 구분한 병사만으로도 1만 명이 넘는 병력이었다. 무당파의 병력은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숫자다. 게다가 성을 방패 삼아 싸우기 때문에 병력은 안심해도 좋은 수준이었다.

    “우룡 경, 기사단은 어떻소?”

    “전력이 대폭 강화되었습니다. 천우 경이 만들어 준 약 덕분에 지금도 꾸준히 전력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팽우룡은 한쪽 구석에 앉은 정천우를 쳐다보며 고마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정천우는 그런 팽우룡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으로 화답해 주었다.

    “오오! 그것 참 즐거운 소식이 아닐 수 없군. 어떻게 편성했는지 알려 주게.”

    상기된 얼굴로 묻는 팽선웅 백작에게 팽우룡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수련기사 322명에게 약을 먹인 결과, 110명이 정규급 능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기존 정규기사들의 실력이 대폭 향상되어 썬더 기사단을 30명으로 증설하고, 타이거 기사단은 90명, 라이온 기사단은 102명으로 증설하였습니다.”

    “하하하! 정말이지 반가운 소식일세! 하지만 기사단의 덩치가 너무 커진 것 같은데,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영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타이거 기사단에서 20명을 추리고, 라이온 기사단에서도 20명을 추려 40명으로 이루어진 기사단을 만들게. 기사단의 이름은 샤벨타이거로 명명하고, 단장은 천우 경이 맡아 주게.”

    “네? 저더러 맡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정천우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예의에 어긋난 말투였지만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그걸 탓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하북팽가의 전력이 상승한 것은 모두 자네의 덕이 아닌가! 지난번 몬스터 토벌전에서 눈여겨보았다네. 자네가 맡아 준다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 주겠는가?”

    팽선웅 백작은 거부하지 말라는 티를 팍팍 풍기면서 말했다.

    반드시 자리를 내줘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무려 7서클의 대마법사가 그의 부하가 되었다. 거기에 불굴의 투지를 지녔다고 알려진 베테랑급 드워프까지 덤으로 끼었다.

    정천우처럼 활용도 높은 인재를 일개 기사로 배정하는 건 낭비나 마찬가지다. 써먹을 수 있을 때 확실하게 써먹자는 게 팽선웅 백작의 생각이었다.

    “하오나 저는 아직 기사단장의 자리를 맡기엔 부족함이 있습니다. 게다가 명예기사라는 걸 상기해 주십시오.”

    정천우는 완곡하게 거절의 뜻을 밝혔다.

    감투를 쓴다는 건 지금 그의 입장에선 좋은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책임진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고, 가뜩이나 새로 생긴 부하 놈들이 속 썩이는 판이라 더 그랬다.

    “부담 가질 필요 없네. 정식기사가 되면 별문제 없을 것 아닌가?”

    “그러나…….”

    정천우가 대꾸하려는데 팽선웅 백작은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거부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자네에게도 좋은 일일 것일세. 벽력대제께서 남긴 글을 보고 싶지 않은가? 자네의 관심사가 그것이라고 들었네만. 벽력대제께선 검술서마다 각기 다른 글을 남기셨다고 하지. 특히 심법이 적힌 책에 중요한 얘기가 많지. 알겠지만, 심법이 적힌 책들은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유는 알겠지?”

    팽선웅 백작이 정천우의 눈을 바라보면서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능구렁이 같은 인간!’

    정천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단전 자체가 없는 이곳 사람들에게 심법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래서 다른 검술서들은 사본을 많이 만들어도 심법은 사본을 거의 만들지 않았다.

    벽력대제가 죽은 지 300년이 흘렀다. 그나마 있던 사본은 그사이 사라졌다고 보는 게 맞다. 이곳 사람들에겐 허황된 개소리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결국 심법이 기술된 책을 얻으려면 내성을 직접 털라는 의미다.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명예기사의 작위를 받은 것인데, 이렇게 되면 하북팽가의 정식기사가 되어야 했다. 그래야만이 기사단과 함께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두었네. 이리 오게.”

    팽선웅 백작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품속에서 나무로 만든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의 뚜껑을 열자 그 속에는 푸른색 사파이어가 박힌 기사의 인장이 나왔다.

    정식기사를 뜻하는 인장이었다.

    ‘아예 작정하고 있었네.’

    정천우는 입맛이 썼지만 아쉬운 것은 자신이었다. 아쉬운 놈이 우물을 파는 법이다.

    지금까지 얻은 정보가 너무나 적다. 키아벨리아스라는 존재가 중원으로 가기 위한 열쇠라는 것과 그의 정체가 드래곤이라는 게 전부다. 그 외에는 아는 게 없다.

    정천우는 쓰게 입맛을 다시며 팽선웅 백작의 앞에 섰다.

    “천우 경은 이제 우리 하북팽가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네. 앞으로도 맹활약을 기대할 테니, 부디 실망시키는 일이 없기를 바라네.”

    “감사합니다. 영주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천우는 명예기사의 인장을 빼고는 정식기사의 인장을 손에 끼웠다.

    짝짝짝!

    그러자 회의실에 모인 기사들이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렇게 될 줄 알았는지 순순히 정천우가 샤벨타이거 기사단을 맡는 걸 인정했다.

    “자, 자! 이제 다시 본 회의로 넘어들 가세. 제인 마법사, 무당파의 전력과 그들이 왜 영지전을 선포했는지 알려 주게.”

    “네, 영주님.”

    제인은 몇 장의 문서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을 가다듬은 그녀는 앞으로 걸어 나와 잠시 정천우를 바라보고는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당파의 전력은 지난달에 수집된 첩보를 토대로 만들어졌음을 밝힙니다. 한 달 반이 지난 시점이라 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무당파의 병력은 대략 1만 3천의 일반병과 약 120명가량의 기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이라면 부담되는 전력이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제인은 발표를 이어 나가면서 그들의 침투 경로와 어떤 식으로 도발할지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적을 알아야 적절한 대응이 가능하다는 팽선웅 백작의 지론에 따라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다.

    “제인 마법사님,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상황을 설명하려는데 팽우룡이 손을 번쩍 들었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팽우룡을 쳐다보았다가 제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들도 무당파가 왜 이렇게 영지전을 서두르는지 이유가 궁금하기 마찬가지였다.

    영지전은 하북팽가에서 선포해야 하는 게 이치에 맞다. 무당파 때문에 몬스터의 침습을 받았고, 무당파의 기사들에게 습격을 받았으니까 말이다.

    명분에서부터 밀리는 무당파가 왜 이렇게 성급하게 구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지난달에 우리 하북팽가를 습격한 마법사를 통해 알게 된 사실과 선전포고문을 살펴봤을 때, 무당파가 우리 하북팽가를 노리는 이유는…….”

    ***

    “역천검이란 말이지…….”

    대병력을 이끌고 맨 앞에서 말을 타고 가는 매서운 인상의 중년 사내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영주님께서 왜 역천검에 집착을 보이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고작해야 쇠붙이에 불과한 물건이 아닙니까?”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기 경,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게. 우리 무당파가 역천검을 차지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은가?”

    무당파를 거론하며 흥분한 어조로 말하는 사내는 바로 무당파의 장천근 후작이다.

    그의 곁에서 말을 모는 사람은 장씨 성을 하사받은 무당파 최고의 기사단인 스톰 기사단의 단장이다. 장천근 후작의 최측근으로, 20년을 넘게 변치 않는 충성을 보이는 베테랑급 기사다.

    영주의 질문을 받은 장맹기는 침음을 흘리며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팽팽 굴렸다.

    그러나 전투라면 몰라도 명분이나 정치적인 문제처럼 골치 아픈 것을 생각하려니 머리에 쥐가 나는 것 같았다.

    “후우…… 저는 역천검이 우리 무당파의 손에 들어온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지 모르겠습니다.”

    “후후후, 전설이 우리 무당파와 함께한다면 누가 우리의 앞길을 막겠나?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벽력대제 시절처럼 동대륙을 통일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역천검을 다룰 수 없으면 모두 소용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장맹기는 의문을 감추지 않으며 장천근 후작을 바라보았다.

    “일단 역천검의 주인을 먼저 잡아야지. 뭐, 잡을 수 없다면 죽여도 상관없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역천검일 뿐이니까. 벽력대제가 사용하던 물건을 무당파가 지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린 많은 것을 할 수 있지.”

    “저는 생각이 짧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영주님의 앞에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치우는 데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장맹기는 얘기가 복잡해질 것 같아 말뜻을 이해하길 포기했다.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적의 목을 베는 게 훨씬 더 통쾌하고, 영주를 위해 일하는 기분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머리 복잡한 일들은 펜대 굴리는 놈들이 하는 게 맞지, 자신에게는 무리였다.

    “하하하! 그래그래! 자네만 믿겠네.”

    “염려되는 것은 지난번에 소환단 탈취 임무를 맡겼던 ‘헬 기사단’이 단 한 명도 복귀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혹시 하북팽가 놈들이 전력을 확충한 것은 아닌지, 그게 염려됩니다.”

    장맹기가 목소리를 죽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헬 기사단은 정규급 이상의 실력자로 이루어진 비밀 기관이었다. 무당파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클라우드 기사단의 기사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헬 기사단이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은 계획했던 작전이 처음부터 발각되지 않는 한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무당파에서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하북팽가에 대규모 몬스터 침공이 있었다. 디바인 마크가 확실하게 발동했다는 의미다.

    그렇다는 것은 작전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하북팽가에 숨겨진 힘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들게 했다.

    “그거야 나도 알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하북팽가에 숨겨진 힘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지 않은가? 우리에게도 숨겨 둔 힘이 있으니까 말이야.”

    장천근 후작은 말을 타고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기사들을 돌아보며 득의의 미소를 보였다.

    “맞습니다. 저들이라면 하북팽가에 숨겨진 전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문제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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