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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72화 (72/200)
  • # 72

    Chapter 18. 시체는 말이 없다 (7)

    “사, 살려 줘!”

    샤칼이 힘겹게 말했다.

    아까 보여 주었던 위풍당당함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그건 내가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야.”

    “다, 단지…… 쿨럭, 쿨럭! 단지 역천검이…… 컥, 커헉! 진짜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쿨럭, 쿨럭…….”

    샤칼이 격하게 기침을 해 대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사실 그의 입장에선 진실을 말한 것이지만 정천우의 입장에선 변명에 불과하다.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했어, 안 했어? 대접해 줄 때 얌전히 있었으면 서로 좋았잖아? 아, 괜찮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깔끔하게 보내 줄게.”

    정천우가 으스스한 표정을 지으며 샤칼을 내려다보았다. 반드시 죽여서 후환을 남지 않겠다고 작심한 표정이었다.

    샤칼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제껏 살면서 죽음이라는 단어는 자신과 상관없다고 믿어 왔다. 누구나 존중해 주는 하이엘프라는 위치에 있는 데다가 신탁의 수행자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생명의 위협을 당할 일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7서클의 경지를 개척했다. 이제 대마법사의 반열에 올랐으니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고 믿었다. 고작해야 베테랑급의 기사 따위는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제로 정천우를 몰아붙였다. 신탁만 확인하면 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설마 역천검이 뇌 속성의 마법뿐만 아니라 다른 마법까지 무효화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게 지금의 황당한 상황을 만들었다.

    자신의 가슴 위에 놓인 날카로운 역천검의 검 끝.

    파고드는 순간 자신의 생명은 끝장난다. 죽음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현실이 되고 보니 눈앞이 캄캄하고 두려움에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죽고 싶지 않다!

    샤칼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제, 제발 살려 줘! 정말 확인만 하려고 했던 것뿐이야. 믿어 줘! 제발, 제발!”

    샤칼은 눈물 콧물 다 짜내며 애원했다. 심지어는 역천검의 검날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추접스럽게 왜 이래? 나도 확인만 할 거야. 네놈의 몸뚱이에 칼이 잘 들어가나 안 들어가나. 그럼 됐지? 뒈지건 말건 그거야 내가 궁금한 게 아니니까. 그렇지, 씨발 놈아?”

    정천우가 코웃음을 치며 살벌하게 말했다.

    당한 만큼 되갚아 준다!

    하지 않았으면 모르겠지만 이왕에 손을 댔으면 확실하게 끝을 봐야 한다. 어설프게 상대를 봐줬다가는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른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안다.

    똥오줌 못 가리는 머리 검은 짐승에게 어설픈 자비를 베풀어 봐야 나중에 독(毒)이 되어 돌아온다는 점이다.

    정천우의 눈매가 좁아졌다. 그와 함께 살기가 점점 더 짙어졌다.

    “사, 살려 줘! 제발! 내가 잘못했다!”

    “구질구질하게 주둥이 나불대지 말고 얌전히 가라.”

    정천우가 거꾸로 잡은 역천검에 힘을 주려고 상체에 체중을 실으려 할 때였다.

    “잠깐! 천우! 멈춰! 멈춰 봐!”

    헤이먼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달려왔다.

    샤칼이 워낙 마구잡이로 마법을 난사한 탓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샤칼이 정천우에게 패배할 리가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상황이 정반대로 흘렀다.

    일이 잘못된다고 해도 정천우가 샤칼을 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헤이먼이 파악한 정천우는 그렇게 모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중원에서 거친 낭인으로 살던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그렇게 봤을 뿐이다. 샤칼의 가슴팍에 역천검을 올려놓은 게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꽁지가 빠져라 달려왔다.

    “뭡니까?”

    정천우가 핏발 선 눈으로 헤이먼에게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고개를 돌리면서도 만인에 대비해 샤칼의 혈도를 제압하는 걸 잊지 않았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는 더욱 철저해지는 정천우였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샤칼을 찔러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헤이먼이 걸렸다. 헤이먼은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녔다.

    지금은 폭발적으로 내공을 쏟아 낸 상태였다. 실력자인 헤이먼과 싸우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발밑에 깔린 놈은 언제라도 죽일 수 있다. 슬쩍 역천검을 잡은 손에 힘만 줘도 죽을 목숨이다.

    “그를 죽이면 안 되네.”

    “어째서죠? 이 자식은 날 죽이려고 했는데요?”

    정천우가 어림도 없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말장난 따위에 놀아나기엔 지저분한 삶이 가져다준 기억들은 너무나 처절하다. 위험한 적을 처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시체로 만드는 것 외에는 없다.

    “그는 단지 자네가 가진 역천검이 진품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을 뿐이야.”

    “압니다.”

    정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헤이먼이 환하게 웃었다. 잘하면 말이 통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도 역천검이 사람의 몸에 잘 박히는지 확인하려는 겁니다.”

    “……그, 그걸 굳이 확인할 필요가 있나? 그냥 봐도 잘 박히게 생겼잖은가?”

    “그래 보여요? 그럼 이 개새끼는! 이 씨발 새끼는 왜 몰라봤죠? 그냥 봐도 역천검이잖아요?”

    정천우가 아혈과 마혈을 봉쇄당한 채 널브러진 샤칼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이를 드러냈다.

    ‘내가 언제고 사고 칠 줄 알았어. 아주 된통 걸렸군. 어쨌거나 저 인간은 너무 사납군. 겉보기에는 안 그렇게 생겼는데 말이지.’

    헤이먼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놔두었다가는 진짜로 샤칼을 죽일 것 같았다. 정천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는 단순한 위협용이 아닌 진짜배기였으니까 말이다.

    “그, 그동안 역천검은 가짜가 너무나 많았다네. 그래서 정확한 확인이 필요했어.”

    “그래서 제가 직접 역천검을 들고 마법에 맞아야 확인할 수 있다?”

    정천우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북팽가에서는 간단한 마법만 가지고도 진품이라고 결론 내렸는데, 이 자식은 저더러 목숨 걸고 진품이라는 걸 밝히라고 했죠. 이게 정상입니까?”

    정천우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 그런…… 내가 마법을 잘 몰라서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네.”

    “이보게! 천우 경! 그를 죽이면 곤란해진다네!”

    뒤늦게 싸움이 벌어진 현장으로 기사들을 대동하고 온 팽선웅 백작이 당황한 목소리로 정천우를 말렸다.

    하이엘프인 샤칼이 하북팽가에서 사망한다면 엘프 종족들에게 항의가 들어올까 봐서다. 자신의 말이라면 정천우를 다독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천우의 얼굴은 싸늘하기만 했다.

    “영주님.”

    “그래, 말해 보게.”

    “이런 놈 하나 죽는다고 해서 영주님께 피해가 갑니까? 전 상관없다고 보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이 자식들 편을 드시는 겁니까? 이거 섭섭합니다.”

    정천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샤칼의 편을 드는 게 못마땅한 것이다.

    이제껏 팽선웅 백작에게 호의를 보여 준 건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자신의 편이 되어 주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 그간의 호의가 멍청한 헛짓거리에 지나지 않게 되는 셈이다.

    정천우가 영주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게…….”

    팽선웅 백작은 정천우의 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정천우의 실력은 뛰어나다. 그것은 몬스터를 토벌하던 당시에 확인이 끝났다. 하북팽가에서…… 아니, 동대륙에서 전해지는 뇌전의 샤벨타이거를 부활시킨 인물이다.

    그뿐이면 말도 안 한다.

    수련기사를 정규기사급으로 탈바꿈해 줄 소환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재료만 있으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했다. 뭐가 더 이득인지는 머리를 굴려 볼 필요도 없었다.

    한 영지를 다스리는 사람은 때론 비정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잠시 고민하던 팽선웅 백작이 정천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일에 끼어들지 않겠네. 자네가 하는 일이 옳든 그렇지 않든, 나와 하북팽가는 자네의 편에 설 것이라는 걸 명심하게.”

    팽선웅 백작은 약속한다는 의미에서 군례를 해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를 호위하며 따라왔던 팽우룡과 팽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팽 영주!”

    헤이먼은 다급한 얼굴로 팽선웅 백작을 불렀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 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걸 이해하라!”

    헤이먼은 등 뒤에 걸어 둔 전투용 도끼를 뽑았다.

    끝까지 샤칼을 지키겠다는 의도였다. 정천우가 팔에 힘을 주는 즉시 전투용 도끼를 던지겠다는 나름의 위협이었다.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전투용 도끼에 맺힌 마나 쉐도우가 보통이 아니었다.

    “본색을 드러낸 거냐?”

    정천우가 비웃음을 가득 담아 한마디 툭 던졌다. 이제까지 그나마 유지해 왔던 존중은 씻은 듯이 사라진 상태였다.

    헤이먼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임무에 충실할 뿐이다.”

    “좆 까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정천우가 비아냥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협상의 여지를 남겨 두고 얘기하던 아까와는 달리, 전혀 타협하지 않겠다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기다려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정천우가 거꾸로 쥐고 있던 역천검을 고쳐 잡으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이제껏 헤이먼과 대화를 나눈 것은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소진된 내공을 회복하면서 헤이먼과 싸울 힘을 비축한 것이다. 내공을 어느 정도 회복한 지금, 정천우는 헤이먼이 두렵지 않았다.

    “샤칼! 이 귀병신 놈아! 뭐 하는 거야! 빨리 안 일어나? 이, 이런…….”

    다급하게 샤칼의 이름을 부르던 헤이먼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마치 석화 마법에 당한 것처럼 꼼짝도 못하고 눈만 껌뻑거리는 모습에서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저 자식은 조금 있다가 처리하는 것으로 하고, 너부터 처리하는 게 순서겠어.”

    정천우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헤이먼에게로 걸어갔다. 누런 뇌전의 기운이 역천검을 감싸며 날카로운 기세를 드러냈다.

    “자, 잠깐! 협상하자!”

    “협상? 시체랑 협상하는 정신 나간 놈이 있어?”

    정천우는 고개를 저었다.

    협상 따윌 하기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젠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둘만 해치우면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들어 봐! 들어 보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잖아!”

    헤이먼은 뒷걸음질을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제까지만 해도 정천우를 자신의 상대라고 생각해 보진 않았다. 불과 한 달 전쯤에 보았을 때만 해도 자신을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고 판단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살벌한 기세를 흘리며 다가오는 정천우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아무리 낮게 쳐줘도 베테랑급의 경지는 될 것 같았다.

    ‘어떻게든 싸울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귀병신이 문제야.’

    정천우와 자신의 실력을 가늠하던 헤이먼은 쓰러져서 꼼짝도 못하는 샤칼을 흘깃 훔쳐보다가 정천우를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겨우 이긴다고 해도 밖에서 대기하는 하북팽가의 사람들이 더 문제다. 장담할 순 없지만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하북팽가가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말해 봐!”

    정천우는 비웃음을 던졌다.

    어차피 살려 둘 생각 따윈 없다. 유언을 들어준다는 마음으로 승낙한 것이다. 그리고 최강의 초식을 사용하기 위해서 잠시 더 시간을 벌어 둔 것이기도 했다.

    오호단문도의 일곱 번째 초식인 노호출격(怒虎出擊)은 상당한 내공을 소모하기에 그만한 준비가 필요하다. 주둥이를 나불대며 시간을 주겠다는 놈을 말릴 이유가 없기도 했다. 공들여 준비할수록 초식의 위력은 강해진다.

    헤이먼은 정천우의 얼굴을 쳐다보며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전투 도끼를 내렸다.

    “네 부하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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