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69화 (69/200)

# 69

Chapter 18. 시체는 말이 없다 (4)

“그게 정말인가?”

아쉬워하던 팽선웅 백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색했다.

“물론입니다. 저 혼자서 약초를 캐느라 오래 걸렸을 뿐입니다.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헤따이 뿌리와 헤따이 열매를 가져다주시면 단약을 더 만들 수 있습니다.”

정천우는 팽선웅 백작에게 말하면서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대화로 해결하기보다 칼부터 뽑고 보는 인간들이다. 이렇게 성질 더러운 놈들에게 풀뿌리를 캐고 열매를 따 오라고 시키면 화부터 낼 게 뻔하다.

정천우가 동대륙에 와서 느낀 점은 하나다.

중원의 무인이나 하북팽가의 기사나 하는 짓이 똑같다는 점이다.

일단 자신들에게 커다란 도움이 될 거라는 걸 보여 준 다음에야 뭘 해도 해야 한다.

중원 무인들의 알량한 자존심이나, 이곳 세상의 기사도나 거기서 거기다. 무인들이 영약을 바라듯 이곳의 기사들도 마나를 빨리 쌓을 수 있기를 원한다.

‘흐흐흐…… 돈 좀 되겠어.’

정천우가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별다른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 헤따이 열매와 뿌리? 어딜 가면 구할 수 있는가?”

팽선웅 백작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하북팽가의 전력을 강화할 수 있는 일이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조건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은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순간에 강해질 수 있는데 거리낄 건 아무것도 없다.

수련기사들이 정천우에게 잠시 끌려갔다가 돌아왔는데, 고작 하루 사이에 몰라보게 강해졌다. 다음 날 아침에 소환단을 주워 먹고 미친 듯이 육합권을 수련하더니 더욱 강한 기세를 뿌려 댔다.

더 놀라운 것은 팽우룡이었다.

주화입마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소환단을 먹고 나더니 단숨에 베테랑급 기량을 발휘했다. 놀라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정천우의 생각과는 달리, 기사들은 지금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단지 팽선웅 백작이 앞에 있어 기쁨을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나 귀한 약을 모두가 먹을 수 있다니 가슴이 벅찰 따름이었다.

“지난번 대형 몬스터를 토벌한 지역을 중심으로 사방에 퍼져 자생하고 있습니다.”

“양은 어느 정도나 필요한가?”

팽선웅 백작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깨닫고 조바심을 냈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헤따이 뿌리와 열매다. 그런데 지금은 누가 모조리 캐어 갈까 봐 걱정되었다.

“될 수 있으면 많이 필요합니다. 단약을 여러 번 복용해야 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귀한 약재가 들어가니 자금이 좀 필요합니다.”

“자금이라면 걱정하지 말게! 그래, 당장 필요한 금액이 얼마인가?”

팽선웅 백작은 정천우를 향해 다그치듯 말했다.

정규기사 한 명을 양성하는 데 들어가는 돈은 살벌할 정도다. 수련기사를 정규기사 수준으로 순식간에 키울 수 있다는데 돈이 아까울 리가 없었다.

“모든 기사에게 먹일 양이면 대략 천 골드가 필요합니다.”

“당장 주도록 할 테니 약부터 만드는 것으로 하세. 그건 그렇고, 헤따이 열매와 뿌리를 먼저 확보해야 할 텐데…….”

팽선웅 백작은 정천우의 말에 흔쾌히 자금 지원을 약속했다. 정천우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제가 가겠습니다! 절 보내 주십시오, 영주님!”

팽선웅 백작이 말끝을 늘어뜨리기가 무섭게 팽수수가 앞으로 나섰다.

썬더 기사단의 유일한 여기사다.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은 팽수수는 단약에 대한 열망이 컸다. 머리만 뛰어난 사람이 아닌 당당한 썬더 기사단의 주요 전력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팽씨 성을 부여받았지만 여자이기 때문에 자신을 봐주는 듯한 썬더 기사단원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팽우룡이나 팽만리처럼 베테랑급 기사가 된다면 아무도 자신을 여자라고 깔보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때문에 단약이 매우 절실했고, 그 재료를 채취하는 일에도 조바심을 냈다.

“수수 경, 그대가?”

팽선웅 백작은 의외라는 듯이 팽수수를 쳐다보았다.

그런 모습에 팽수수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임무를 행하는 것은 기사의 당연한 도리.

영주인 팽선웅 백작이 되묻는 모습에 그녀는 분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모시는 영주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아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

자신을 아끼기 때문에 몬스터에게 공격당할까 봐 걱정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신은 여자이기 전에 기사다.

팽수수는 말에서 뛰어내려 팽선웅 백작의 앞에 달려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번 임무를 제가 맡겨 주신다면, 영주 성 내에 대기 중인 기사단의 말을 빌리겠습니다. 그리고 말을 탈 줄 아는 병사들을 차출해 즉시 몬스터 토벌이 있었던 지역으로 출발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으음…… 아, 알겠네. 그럼 자네가 수고해 주게.”

“충! 즉시 출발하겠습니다.”

팽수수는 임무를 맡긴다는 말에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짓고는 주저 없이 전투마에 올라타고 말을 몰아 영지성으로 달려갔다.

“흐음…… 수수 경은 불필요하게 비장해서 탈이란 말이지…… 그건 그렇고, 천우 경!”

“네, 말씀하십시오.”

“일이 생기고 보니 천우 경의 숙소가 위험에 노출된 것 같아 걱정스럽네. 나와 다른 기사들처럼 내성(內城)에서 생활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팽선웅 백작은 짐짓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정천우에게 물었다.

단약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고 물량을 확보하겠다는 속셈이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정천우를 걱정해 주는 것처럼 말한다.

‘이건 은근히 속 보이네. 뭐, 어쩌면 이러는 게 맞는 거겠지.’

“알겠습니다. 영주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명을 따르겠습니다.”

정천우는 속마음과 달리 한껏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서 대답했다.

어차피 주목받기 시작한 상황이다. 화끈하게 승낙하는 편이 훨씬 보기 좋다.

이제 혼원벽력신공을 수련하려면 좀 더 안전한 곳이 필요하긴 필요했다. 기사들이 주둔하는 내성이라면 외부에서 건드릴지 모른다는 걱정 없이 수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하하! 그대가 있어 내가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네.”

“영주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청? 말하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 주겠네.”

“이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도 내성에서 지내도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저 친구는 경비대의 일을 하고 있는데, 기사단에 합류시켰으면 합니다.”

정천우가 제럴드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잭슨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기사단에서 속해 있던 사람이었고 정천우에게 몸을 의탁하느라 밖으로 나왔을 뿐이다.

그러나 제럴드의 경우는 목책을 지키는 일개 경비대원이라 일부러 부탁하는 것이다.

“오…… 경비대에 이런 친구가 있었단 말인가? 어째서 이런 인력이 경비대에서 썩고 있었다는 말인가!”

정천우가 소개하고 나서야 제럴드를 유심히 살핀 팽선웅 백작이 감탄했다.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만 놓고 보자면 수련기사 수준은 가뿐히 넘었다. 정규기사 수준의 기량을 지닌 사람이 목책이나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니 의외였다. 그야말로 고급 자원을 푹푹 썩힌 셈이었으니까 말이다.

“이 친구 역시 단약을 먹고 나서 실력이 늘었습니다.”

“헛! 일반인도 소환단을 먹으면 기사급 실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가!”

팽선웅 백작은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정천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천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수련을 잘못한 것일 뿐, 마나는 성실하게 쌓은 친구입니다. 단약은 잘못된 마나를 배출하고 올바른 마나를 쌓게 해 준 정도입니다.”

“흐음…… 내가 잘 못 알아듣겠군.”

팽선웅 백작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병사를 정규기사 수준으로 탈바꿈시켰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뭐가 문제라는 건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병사들이 기사급의 실력을 발휘한다?

그것만큼 놀라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게 가능하다면 다른 영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무력이 확보된다.

팽선웅 백작은 정천우의 말을 기다렸다. 하북팽가가 그 옛날 동대륙 전체를 호령하던 때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고서 말이다.

“아무한테나 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준비된 사람에게만 단약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준비된 사람?”

“육체와 마나 수련을 꾸준히 해 온 사람들을 말합니다. 단약은 육체가 일정 수준에 이른 사람이 아니면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아니, 효과가 있긴 하겠지만 그건 정말 모래 한 톨만큼의 효과일 겁니다. 그럴 바에야 단련된 사람을 더욱 강하게 하는 게 효과적입니다. 약은 무한정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그렇군. 아쉽긴 하지만 그게 어딘가! 당장 옮기도록 하세. 자네의 요청은 다 들어주도록 하겠네!”

팽선웅 백작이 정천우에게 다시 한 번 부탁 비슷하게 명령을 내렸다.

모든 병사를 기사급 실력으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물 건너갔지만, 모든 기사의 수준을 한 단계 이상 끌어올릴 수 있다는 건 분명해졌다.

게다가 잘 단련된 병사 중에서도 기사급 실력자가 나올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아니, 엄청난 가치가 있다.

행여나 남의 손에 들어간다면 위험천만한 일이다. 빨리 내성으로 거처를 옮겨 보안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때였다.

“알겠습니다. 우선은 단약부터 챙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 만리 경! 천우 경을 도와주게.”

바로 코앞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팽선웅 백작이 썬더 기사단의 부단장씩이나 되는 팽만리를 시켜 정천우를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예, 영주님!”

팽만리는 군소리 없이 말에서 내려 정천우의 뒤를 따랐다. 창고를 향해 걸어가는 두 사람의 귀에 신음이 흘러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 헛!”

팽만리는 정천우의 뒤를 따라 걷다가 뜻밖의 상황에 헛바람을 삼켰다.

엘프 하나가 땅바닥을 뒹굴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고상한 척, 깨끗한 척하길 좋아하는 엘프가 이렇게 흉한 몰골로 땅바닥을 뒹구는 모습은 충분히 이상한 일이었다.

“육합권을 배운 뒤에 먹으랬더니, 말 안 듣고 그냥 먹었거든요.”

“그, 그런 것입니까?”

팽만리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샤칼의 모습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팽우룡이 주화입마를 벗어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 육합권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단순히 육합권을 펼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이렇게나 괴로워할 줄은 몰랐다.

“끄으으으…… 으으으…….”

샤칼은 바닥을 구르며 괴로워했다.

지금 그의 내면에서는 마나가 날뛰는 중이었다.

인간보다 오랜 삶을 살아가는 엘프였기에 몸에 쌓인 마나의 양도 어마어마했다. 마나를 정제하는 기술이 없는 세상이기에, 지금까지는 순수한 마나와 탁한 마나가 그의 몸속에서 균형을 이루며 공존해 왔다.

하지만 단약을 복용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탁한 마나가 단약의 기운을 빌려 육체 밖으로 밀려났다. 단약의 기운이 떨어진 새벽녘에는 순수한 마나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정도로 겨우 균형을 맞추었다. 그런 와중에 다시 단약이 몸속에 들어오는 바람에 겨우겨우 버티던 탁한 마나가 또다시 몸 밖으로 밀려났다.

순간, 탁한 마나가 밀려나서 생긴 자리를 순수한 마나와 단약의 기운이 잠식해 들어갔다.

탁한 마나 역시 샤칼의 육체에 길들여졌던 만큼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고 버티면서 난동을 부렸다. 그 때문에 괴로워진 것은 샤칼이었다.

“끄으으으으…….”

괴로운 신음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찌나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지 한 줄기 선혈이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부릅뜬 눈에선 실핏줄이 터져 나와 벌겋게 충혈되었고,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천우 경! 이거 위험한 것 아닙니까?”

팽만리는 땅바닥에 쓰러진 채로 꿈틀거리는 샤칼을 내려다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정천우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 그가 감당할 만한 기운이 아니었다. 내공과는 다른 이질적인 기운이 샤칼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어 손쓸 방법이 없었다.

마법사 특유의 무 속성 마나는 정천우로서는 처음 접해 보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정령력까지 날뛰고 있었다. 이제 겨우 이류의 문턱에 넘어설까 말까 하는 정도의 정천우가 섣불리 건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혼자서 극복해야 할 문제입…… 으응?”

정천우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샤칼의 기운에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샤칼의 몸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기운이 집중되고 있었다.

“크아아악!”

샤칼의 입에서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이 튀어나왔다.

집중된 기운이 흐름을 이루면서 샤칼의 몸을 중심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주변의 마나를 마구 빨아들이면서 그의 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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