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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68화 (68/200)
  • # 68

    Chapter 18. 시체는 말이 없다 (3)

    퀭한 눈의 샤칼이 정천우를 향해 삿대질하며 욕을 퍼부었다.

    다크서클이 턱에 닿을 듯 내려앉아 있었다. 단순히 잠을 못 잔 거라면 이렇게까지 샤칼의 얼굴이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건 밤새도록 아랫배가 쿡쿡 쑤시는 고통에 시달린 탓이다.

    “아니, 주의 사항도 듣지 않고 받자마자 냉큼 먹은 사람이 누군데요?”

    정천우가 콧방귀를 뀌었다.

    역천검의 진위 여부를 가리라고 귀찮게 따라다니는 게 귀찮아서 먹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지만 약발(?)이 떨어지고 나니 어김없이 갈궈 댄다.

    “쌍놈의 새끼! 일부러 그랬지?”

    “거, 진짜 너무하시네. 그래서 싫어요? 몸이 달라졌을 건데요?”

    “달라지긴 개뿌…… 으음…….”

    버럭 화를 내려던 샤칼이 말끝을 흐리고는 침음을 흘렸다.

    분명 피곤한 것 같은데 몸은 활력이 넘친다. 순수하고 깨끗한 마나가 전신에 가득했다. 마나양이 늘어난 것 같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가뿐하다.

    “적당히 좀 해요. 좋은 게 좋은 거잖아요. 생각 있으면 말씀하세요. 아직도 여력이 있어 보이거든요? 몇 번 더 먹으면 마나양이 더 늘어날 것 같은데요?”

    “여기서 더 마나가 늘어날 수 있다고?”

    샤칼이 놀란 얼굴로 정천우를 쳐다보았다.

    정령술이 주특기지만 마법에도 소질이 있는 샤칼이다. 인간들이 정한 기준으로 보면 5서클 수준이다. 겨우겨우 발현할 수 있는 게 5서클 마법이라는 얘기다.

    지금은 5서클 마법을 발현한다고 해도 전처럼 힘들 것 같지는 않았다. 사용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발전 가능성이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당연하죠. 여기 사람들은 이상하게 사기(邪氣)…… 그러니까 여기 말로 하면 잡스러운 마나 정도로 해 두죠. 아무튼, 그 잡스러운 마나를 너무 많이 품고 있어요.”

    “잡스러운 마나?”

    샤칼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정천우가 하는 말의 뜻을 알 것 같기도 했다. 엘프 마을의 대마법사급 실력자들이 그런 말을 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마나를 수련한다고 해도 실력이 쉽사리 늘지 않는 건 불필요한 기운까지 몸에 쌓아 두는 탓이라고 했다.

    대마법사급 경지의 존재들이나 할 만한 말을 실력이라곤 보잘것없는 정천우가 하고 있으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네.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마나로 가득 채워도 부족할 판에 잡스러운 마나가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니, 마나를 다루기가 더 어려워지는 거죠.”

    정천우는 단정 짓듯 얘기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전신에 흐르는 기운에 비해서 실력이 너무 떨어진다. 그 이유가 단전을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단전이라는 건 단순히 기운을 쌓는 용도로만 사용되는 게 아니다. 유입된 기운을 정제하는 과정을 거쳐 자신의 무공에 알맞은 기운만 골라서 저장하고 남은 걸 내보내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중요한 기관을 형성할 수 없으니 잡스러운 사기까지 몸에 쌓아 두는 거다.

    게다가 단전의 부재로 내공을 정제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심법을 운행할 수 없으니 총체적 난국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흐음…… 그럼 어제 준 그 약이 하는 역할은 정확히 뭔데?”

    샤칼이 눈을 빛냈다. 자신이 먹은 약만 있다면 엘프들의 능력이 급속도로 향상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숲에서만 지내는 보통의 엘프와 달리, 샤칼은 인간 세상에 떠도는 것을 즐겼다. 인간들과 어울리다 보니 적당히 더럽혀져서 욕심이라는 걸 배웠다. 정천우가 만든 단약의 제조법을 손에 넣으면 엘프들의 생활이 달라질 것 같았다.

    제조 방법이 안 된다면 단약이라도 많이 얻고 싶었다. 그렇게만 되면 더 이상 인간들의 눈치를 보며 숨어 살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저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중원에서 사용하는 정통적인 방식입니다. 내공! 아니, 마나의 양을 더 빨리 쌓을 수 있게 해 줍니다. 다만 여기 사람들은 단전이라는 게 없어서 약 기운이 전신에 퍼지는 거죠. 순간적으로 마나가 팽창하다 보니 몸에 쌓인 잡스러운 마나가 배출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강제로 육체를 재구성하는 효과가 있다?”

    샤칼의 눈이 크게 떠졌다. 놀라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마법사나 기사나 일정 수준에 올라서면 마나를 받아들이기 적합하도록 몸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몸에 쌓인 탁한 마나를 배출하고 순수한 마나를 받아들이면서 육체가 마나를 받아들이기 좋은 몸으로 변하는 것이다.

    일정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을, 정천우가 만든 약이 인위적으로 일으킨다는 의미다.

    인간의 감정에 오염된 샤칼로서는 탐나지 않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

    “육체의 재구성?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정천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하는 의미를 대충 파악해 보면 중원에서 말하는 환골탈태(換骨奪胎)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따위 허접한 단약으로는 불가능한 얘기다. 최소 소림의 대환단 정도는 되어야 환골탈태를 꿈꿔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말 그대로 마나를 받아들이기에 가장 좋은 육체로 만드는 거지. 마법사들이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를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하던데? 뭐, 기사로 치면 마스터급에 오를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말이야.”

    샤칼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살짝 들떠 있었다.

    자신의 가정이 진짜라면 이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약이 있다면 강제로 빼앗아서라도 손에 넣고 싶어 할 게 뻔했다.

    강해진다는 건……

    누구나 바라는 원초적인 종류의 욕망이니까.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정천우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흔들었다.

    “불가능해요. 이건 그저 약간의 도움만 줄 뿐이죠. 일회성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저 잡스러운 마나를 제거해 주는 정도의 역할밖에 없어요. 불필요한 마나가 몸에서 모두 빠져나가면 그다음부터는 효과가 없어요.”

    “제길! 좋다가 말았네. 그럼 난 어때? 네가 말하는 한계에 도달한 거냐?”

    김빠진다는 얼굴이었던 샤칼은 다시 기대에 찬 얼굴로 말했다.

    지금만으로도 대단한 발전인데 더 발전할 여지가 있다면 마법 실력을 높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령력까지 향상된 느낌이었기에 기대가 컸다.

    “음…… 제가 마법사가 아니라서 잘 모릅니다. 직접 드셔 봐야 알 것 같은데요? 일단 여력은 있어 보여요.”

    “그래? 알았어!”

    “저, 저기!”

    정천우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샤칼이 창고 쪽으로 날듯이 뛰어갔다.

    아까 창고에서 단약을 꺼내는 걸 봤던 까닭에 망설임이 없었다. 강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다급하게 정천우가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한발 늦고야 말았다.

    “끄으으으…… 으으윽!”

    “하아…… 생각이란 걸 좀 하시죠. 한 번 당해 보고서 또 당하십니까?”

    정천우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 육합권을 배워서 효율적으로 마나를 배출해야 한다고 말한 게 조금 전이다. 그럼에도 또 아무런 준비 없이 날름 단약을 삼켰다.

    “까, 까먹었…… 으아악! 커흑! 으으으…….”

    샤칼은 절망에 빠진 얼굴로 괴로워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정천우는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며 자리를 떴다.

    두두두두!

    “응? 이건 또 무슨 일이야? 벌써 전쟁이 벌어진 거야?”

    정천우는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어지러운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천우는 눈에 내공을 집중시켜 흙먼지를 날리면서 말을 달리는 하북팽가의 기사단을 쳐다보았다.

    “응? 영주님이 직접? 일이 벌어져도 크게 벌어졌나 본데?”

    팽선웅 백작의 모습을 확인한 정천우가 재빨리 집 앞으로 달려가 문을 거칠게 두들겼다.

    쿵, 쿵, 쿵!

    “제럴드! 잭슨! 영주님 오신다! 빨리 일어나! 어서!”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정천우가 다시 마당으로 나가 원래의 자리에 섰다.

    뒤이어 집 안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더니 거칠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주님께서 오신다고?”

    “망했다! 제럴드 형님, 세수! 세수부터!”

    제럴드와 잭슨이 호들갑을 떨며 밖으로 나왔다.

    이제 막 잠에서 깬 상태였기에 눈곱이 덕지덕지 낀 얼굴로 두 사람은 급하게 물을 찾았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난리야?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있나!”

    헤이먼이 귀찮다는 기색 가득한 얼굴로 어슬렁거리며 나왔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 세상의 영주라는 건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제럴드와 잭슨에게는 날벼락이었다.

    대략 1킬로미터 밖에서 언덕을 올라오는 기사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늦어도 1분 내로 도착할 것이기에 서둘러야 했다. 대충 고양이 세수를 마친 두 사람은 급하게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가 난리를 피워 댔다.

    “영주가 왜 오는 것인가?”

    “글쎄요. 저도 모르죠. 전쟁이 벌어진 거라면 피곤해지는데…….”

    “그나저나 귀병신은 아직도 저러고 있는 건가? 그 약 한번 지독하군!”

    창고 쪽에서 들려오는 돼지 멱따는 비명에 헤이먼이 귀를 손가락으로 후비며 인상을 찌푸렸다.

    “깨어나서 또 드시던데요?”

    “……저 자식, 고통을 즐기는 건가?”

    “아마도요.”

    정천우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마당을 벗어나 울타리 밖으로 나갔다. 영주가 오고 있으니 멀리 마중은 나가지 못하더라도 흉내 정도는 내 줘야겠다는 생각에서다.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던 기사단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다가오다가 정천우와 5미터가량 거리를 두고 완전히 멈춰 섰다.

    히히히힝! 푸륵, 푸르륵!

    30마리 정도의 전투마가 거친 투레질과 함께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뒤이어서 기사단의 꽁무니를 쫓던 흙먼지가 정천우를 향해 쏟아졌다.

    “고귀하시고 자애로우신 영주님을 뵙습니다.”

    정천우는 어색해하면서도 군례에 따라 오른쪽 주먹을 가슴에 얹으며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먼지가 잔뜩 몰려와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숨쉬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오! 천우 경! 그대를 보기 위해 내 한달음에 달려왔다네.”

    팽선웅 백작은 한껏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빈말이 아니었다는 듯, 그는 평소처럼 우아하게 말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급하게 몸을 날렸다.

    “제가 오후에 찾아뵙겠다고 수련기사를 통해 전했는데, 혹시 전달받지 못하신 건 아닌지…….”

    팽선웅 백작의 반응이 워낙 부담스럽다 보니 정천우가 말끝을 흐리며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닐세! 전달받았네! 다만, 이렇게 엄청난 물건을 보고서 그냥 있을 수가 있어야지! 혹시라도 다른 영지의 첩자들이 알게 되면 큰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내 직접 기사단을 이끌고 서둘러 찾아왔다네.”

    “제가 영주님을 번거롭게 해 드린 모양입니다.”

    정천우가 미안한 기색을 드러내며 고개를 한 번 더 숙였다.

    물론 전혀 미안하지 않다. 애초에 팽선웅 백작이 자신의 말을 믿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잘하면 짭짤하게 뜯어낼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팍팍 들었다.

    “하하하! 아닐세! 자네의 말을 처음부터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나의 잘못일세. 그래, 소환단은 어디에 있는가?”

    팽선웅 백작은 상기된 얼굴로 단약의 행방부터 물었다. 아직 약의 이름을 정하지 않은 탓에 그는 단약을 소환단이라고 불렀다.

    기사들의 마나양을 한계까지 단숨에 이끌어 주는 엄청난 약이다. 자신도 아침에 먹어 보고선 엄청난 효과를 보았다. 팽우룡과 마찬가지로 베테랑급의 마나 쉐도우를 발휘할 정도로 실력이 높아졌다.

    이런 약이라면 수련기사들의 실력을 단숨에 정규기사 수준으로 높일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존의 기사들이 복용하면 더욱 엄청난 성장을 보일 것이다. 이제 무당파 따위는 전혀 겁내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단약은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모든 기사가 복용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하지 않습니다. 상당히 공을 들여야 하기에 만드는 게 그다지 쉽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정천우는 일부러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단약을 싸구려로 보이게 하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만들기 어려운 척해야 그만큼 짭짤하게 받아 낼 수 있다.

    “그런가? 아쉽게 되었군그래.”

    팽선웅 백작이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정천우가 만든 소환단만 있으면 호시탐탐 하북팽가를 노리는 무당파는 물론이고, 잘하면 남궁세가까지 밀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영주님께서 도움을 주신다면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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