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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67화 (67/200)
  • # 67

    Chapter 18. 시체는 말이 없다 (2)

    ***

    “뭣이? 그게 정말인가?”

    팽선웅 백작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썬더 기사단의 단장인 팽우룡의 보고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야 겨우 마나 쉐도우를 만들어 낼까 말까하던 수련기사 2명 때문이다.

    정규기사급 수준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하루 만에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기량이 높아졌다고 한다. 수련기사 중에서도 가장 막내였기에 더 놀라웠다.

    그들을 관리하는 팽우룡도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는데 팽선웅 백작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정규기사 한 명이 아쉬운 판에 둘이나 정규기사급으로 성장했으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네, 어제 천우 경이 데리고 나갔던 수련기사들입니다.”

    “천우 경? 그가 한 말이 그럼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인가!”

    팽선웅 백작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루 만에 수련기사의 기량을 높일 수 있다는 말을 믿어 달라는 것 자체가 개소리다. 단지 정천우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수련기사를 데려가라고 한 것인데 진짜로 그들의 실력이 향상됐다는 보고를 들으니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영주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팽우룡이 허리에 매달린 세이버의 손잡이에 오른손을 얹으며 물었다. 세이버를 뽑고 싶다는 의미다.

    의미 없이 이런 행동을 할 팽우룡이 아니었기에 팽선웅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언제 그런 걸 따지는 사이였던가…… 어엇!”

    팽선웅 백작이 입을 쩍 벌리며 당혹성을 터트렸다. 팽무룡의 세이버에서 이글거리며 솟아난 마나 쉐도우를 목격한 탓이다.

    평소에 보여 주었던 푸르스름한 마나 쉐도우가 아니다. 선명한 푸른빛이다.

    팽선웅 백작은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격한 탓에 턱이 빠지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입을 크게 벌렸다.

    팽우룡의 실력은 팽선웅 백작이 가장 잘 안다. 두 사람의 실력이 엇비슷하기 때문이다.

    둘은 자주 만나서 대련하고 상대의 부족한 점을 지적할 정도로 서로를 잘 안다. 어제 아침에도 함께 대련을 했으니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겨우 하루 만에 사람이 달라졌으니까 말이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자네가, 자네가! 축하하네! 정말 축하하네!”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지만 팽선웅 백작은 팽우룡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어쨌든 믿음직한 부하가 강해졌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힘이 강해졌다는 의미였으니까.

    다섯 단계로 나누어지는 성취도로 따지면 팽우룡의 경지는 베테랑급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막 기사의 길로 접어든 사람을 유저(User)라고 한다. 마나 쉐도우를 미약하게라도 자신의 무기에 생성할 수 있는 사람을 익스퍼트(Expert), 그보다 더 나아가서 마나 쉐도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경지를 베테랑(Veteran)이라고 불렀다.

    그 상위 단계가 더 있지만 하북팽가에선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베테랑 초입의 수준인 팽우룡이 현재로선 가장 기량이 뛰어난 기사였으니까.

    중원으로 따지면 삼류 무인이 유저, 이류 무인이 익스퍼트, 일류 고수가 베테랑에 해당한다.

    그저 크게 분류를 나누어 놓은 것일 뿐이다. 실전 경험이 받쳐 주지 않는다면 베테랑급 기사라 할지라도 유저급 기사에게 당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그래도 베테랑급 기사가 태어났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기사단원들의 사기가 올라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팽선웅 백작이 환하게 웃으며 악수하던 오른손에 왼손을 보태며 힘을 주었다.

    더욱 강한 기사단으로 거듭나길 바라는 의미에서 보이는 행동이었다. 자신이 팽우룡과 함께 베테랑급 기사가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같이 담았다.

    “영주님도 가능한 일입니다.”

    “하하하! 말만이라도 고맙네.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검술에 매진할 터이니 염려하지 마시게.”

    팽선웅 백작은 자신을 위로하는 팽우룡에게 고마움을 담아 빙긋 웃었다.

    그러나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팽우룡의 얼굴은 위로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그런 표정인가?”

    팽선웅 백작은 악수하던 손을 풀며 말했다.

    그러자 팽우룡이 허리춤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 안에서 갈색의 작은 알약을 꺼내자 팽선웅 백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소환단? 그건 지난번에 공개석상에서 다 파기한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자네가 그걸 가지고 있는 것인가?”

    눈살을 찌푸린 팽선웅 백작은 마치 못 볼 것을 보았다는 얼굴이었다.

    저것 때문에 무당파가 하북팽가의 영지에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지금에 와서는 영지전까지 불사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 그로서는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다.

    “이것은 소환단이 아닙니다. 천우 경이 보내 준 약인데, 제가 베테랑급의 기사가 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그게 사실인가?”

    팽선웅 백작의 눈이 커졌다.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소환단과 거의 똑같이 생겼기에 더욱 의심스러웠다.

    이제껏 소환단을 먹고 살아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소환단과 똑같이 생긴 약 때문에 팽우룡이 베테랑급의 기사가 되었다니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어제 천우 경이 데리고 나갔던 수련기사들도 이것을 먹고 육합권을 수련한 뒤에 정규기사급 실력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게 사실이란 말인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진 눈으로 팽선웅 백작이 팽우룡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수련기사를 의심했습니다. 혹시라도 무당파의 사주를 받은 놈인가 하고 말입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마음, 이해할 수 있네.”

    팽선웅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하를 의심해야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소환단의 끔찍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100%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물건이었다.

    자신도 팽우룡의 말을 쉬이 납득할 수 없는 바에야…….

    “불안해하실 것 같아 만리 경을 밖에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불러도 되겠습니까?”

    “만리 경이야 누구나 다 아는 충직한 기사가 아닌가! 어서 들어오라고 하게. 아니, 애초에 같이 들어왔으면 좋았을 것 아닌가!”

    팽선웅 백작은 짐짓 화난 표정을 지으며 팽우룡을 나무랐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질책하는 기색이 없었다. 자신을 생각해서 불안감을 날려 주기 위해 팽만리를 데려왔을 거라 생각하니 새삼 팽우룡의 마음 씀씀이가 기꺼웠다.

    그가 흐뭇해하는 사이, 팽우룡이 밖으로 나가 팽만리를 데리고 들어왔다.

    “충! 고귀하시고 자애로우신 영주님을 뵙습니다.”

    “매일 보는 사이에, 자네도 참 융통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군. 예를 거두게.”

    팽선웅 백작은 나무라는 듯이 말했다.

    평생을 함께한 사이다. 과한 예의(禮意)는 집어치우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팽만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제가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너도 나도 영주님을 쉽게 볼 것입니다. 위계질서가 무너지면 기강이 해이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팽만리는 아예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팽선웅 백작은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팽만리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알겠네. 그만하고 일어나게. 내 자네의 입장을 모르는 바가 아닐세. 우리끼리 있을 땐 조금 편하게 지내고 싶었을 뿐이라네.”

    “영주님, 감사합니다. 하오나 군신(君臣) 간에 질서가 무너질까 두려워 이렇게 하는 것이니 헤아려 주십시오.”

    “알았으니 어서 일어나게. 내가 불편해서 못 참겠어.”

    팽만리는 진심이 담아 말하는 팽선웅 백작의 말을 듣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팽우룡이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고집스럽게 예의를 지키려는 팽만리나, 좀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 하는 팽선웅 백작이나…… 팽우룡에게는 무척이나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영주님, 만리 경이 직접 보여 드릴 것입니다. 준비됐나?”

    “단장님, 어서 주십시오!”

    팽만리는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아침에 수련기사 2명이 단약을 먹고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았다. 그런 와중에 팽우룡마저 단약을 먹고서 베테랑급 기사가 됐다.

    자신도 빨리 시험해 보고 싶었지만 팽우룡이 말렸다. 영주님께 먼저 보고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영주 집무실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자신도 빨리 팽우룡처럼 실력을 키우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던 상태였다.

    “갑옷부터 벗고 육합권 수련할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나?”

    “아! 예, 알겠습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형 동생 하는 사이지만 공적인 자리에서는 썬더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의 관계다. 팽만리는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고 서둘러 갑옷을 벗었다. 영주인 팽선웅 백작을 만나는 자리기에 입긴 했지만 육합권 수련이 목적이라 갑옷은 방해만 된다.

    재빨리 갑옷을 벗은 팽만리는 단약을 받아 들고 잠시 망설였다.

    팽우룡이 단약을 먹고서 마나양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을 보긴 했지만 소환단과 비슷한 형태를 지닌 단약이었기에 꺼림칙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꿀꺽!

    망설임을 털어 낸 팽만리가 마침내 단약을 삼켰다.

    “큭!”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단약을 삼키기 무섭게 아랫배에서 아릿한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팽만리는 서둘러 육합권의 기수식을 잡았다. 육합권을 통해 들끓는 마나를 배출하지 못하면 고통을 받는다고 들었다.

    다른 세상인 중원의 무공이 팽만리의 몸을 빌려 리듬을 타면서 펼쳐졌다. 기운을 갈무리하듯 크게 원을 그리던 두 팔을 가슴에 모였다.

    쿵!

    묵직한 진각과 함께 힘차게 뻗어지는 정권지르기!

    순간, 팽만리의 입술이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답답한 무언가가 한꺼번에 터져 나가는 듯한 상쾌함 때문이다.

    “차아!”

    한차례 발을 어깨 높이까지 휘둘러 찬 팽만리가 손바닥을 활짝 펴면서 양옆으로 벌리고는 기합을 질렀다.

    희열에 가득한 미소가 그의 얼굴 가득 번졌다.

    기마 자세로 두 팔을 좌우로 벌린 채 정지해 있던 그의 몸이 흐느적거리며 오른팔을 휘저었다. 그러고는 정면을 향해 장풍을 쏟아 내듯 곧장 내질렀다.

    팽만리의 몸은 육합권의 투로(鬪路)에 따라 점차 빨라졌다. 빠른 가운데에서도 일정한 리듬을 만들면서 맺고 끊음을 확실하게 보여 줬다.

    “이거…… 정말 놀랍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줄이야!”

    팽선웅 백작은 두 번째로 육합권의 투로를 이어 가는 팽만리를 쳐다보며 감탄성을 흘렸다.

    팽만리의 몸에서 마나가 격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순하게 빠져나오기만 했다면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멀쩡한 기사 하나가 폐인이 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팽만리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입가에 맺힌 미소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마나를 잃어 가는 사람이 보일 법한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몸 주변에서 흐릿하게 아지랑이가 보인다. 마나가 몸 전체를 휘감으면서 일으키는 착시현상이다.

    “후와아! 후우, 후욱…… 아, 아, 아!”

    투로에 따라 네 번이나 육합권을 반복한 팽만리가 탄성을 터트리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지금 영주 집무실에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것인지, 허겁지겁 한 편에 놓아둔 세이버를 집어 들었다.

    그는 검집에서 뽑아낸 세이버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팔 근육이 꿈틀거린다 싶은 순간, 푸른색의 마나 쉐도우가 세이버의 검날을 타고 불쑥 일어났다.

    “으하하! 으하하하!”

    팽만리가 목젖이 보일 정도로 입을 쩍 벌리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룡 경! 나도, 내게도 빨리 그 약을 주게!”

    팽만리가 보여 준 충격적인 모습을 확인한 팽선웅 백작이 팽우룡을 향해 손을 내밀며 보챘다.

    ***

    “야, 이 개자식아!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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