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66화 (66/200)
  • # 66

    Chapter 18. 시체는 말이 없다 (1)

    “이기고 싶은 게 아니라 이길 수밖에 없네. 우리 팽가의 사람들은 패배를 모르지. 승리! 그게 아니라면 죽음이야. 패배의 기억 따윈 가지고 있질 않아. 그래서 우린 강하지! 무당파의 장천근 후작! 우리 하북팽가를 건드린 걸 관 속에서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팽선웅 백작이 으스스한 얼굴로 씹어뱉듯이 말했다.

    전력 면에서 밀린다는 걸 알면서도 당당하게 승리를 선언했다. 패배 따위는 염려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무당파가 영지전을 언제쯤 선언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흐음…… 놈들이 정찰을 나왔다는 것은 조만간 벌어질 영지전에 대비해 지형을 알아본 것이겠지. 그렇다면 조만간 영지전을 선포하겠지. 길어야 열흘? 아마도 그 정도쯤이 아닐까 생각하네.”

    “수련기사를 정규기사 수준으로 빠르게 양성할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정천우는 단약을 염두에 두고 말했다.

    자신에게는 그저 내공 수련을 돕는 정도의 효과뿐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다른 효과가 있다.

    제럴드와 잭슨의 경우에 비춰 볼 때, 단약은 이제까지 수련하면서 쌓인 혼탁한 마나를 몰아내고 순수한 마나를 쌓게 해 주는 효능을 보인다. 다만 일회성이라 한계에 도달하면 약효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분명한 것은 단기간에 확실하게 강해진다는 거다.

    정천우가 얘기를 꺼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북팽가가 무너지지 않아야 자신도 안전하게 강해질 수 있다.

    서대륙으로 넘어가기 전까지는 최대한 안정적으로 실력을 키우고 싶은 게 정천우의 바람이었다.

    “왜 물어보는지 모르겠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무당파쯤은 손쉽게 해치울 수 있겠지. 부족한 경험이야 실력만 받쳐 주면 실전에서 얼마든지 쌓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꿈같은 얘기지.”

    팽선웅 백작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기사단의 전력이 약화된 탓에 무당파가 감히 영지전을 선포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전력만 확충되면……

    아니! 이번 고비만 넘기면 용병과 자유 기사들을 고용해서라도 무당파를 쓸어버리겠다고 다짐하는 팽선웅 백작이었다.

    “그럼 제게 수련기사 몇 명만 데려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수련기사를?”

    “네. 한번 시험해 볼 생각입니다.”

    “무엇을 시험한다는 뜻인가?”

    “빠른 기간 내에 수련기사의 실력을 높여 줄 생각입니다.”

    정천우는 단약을 먹일 생각으로 팽선웅 백작에게 말했다.

    수련기사의 실력이 늘어 정규기사급 수준에 올라서면 이번 영지전에서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은 뻔한 이치다. 하지만 팽선웅 백작이 믿어 주지 않을 것이기에 수련기사 몇 명만 달라고 한 것이다.

    직접 결과를 보여 준 다음에 다시 얘기할 생각이었다.

    “몇 명 정도라면 상관없네. 다만 영지전이 시작되면 같이 싸워야 하니 그전까지는 데려와야 하네.”

    “이틀이면 됩니다. 그런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결과를 낸다면 비용을 좀…….”

    정천우가 말끝을 흐렸다.

    호의에서 출발한 마음이기는 해도 세상에 공짜는 없다. 공짜로 뭘 해 주면 더 큰 걸 바라기 마련이다.

    “하하하! 사람 참, 결과만 좋다면야 내 만족스러울 만큼 챙겨 주도록 하지. 그런데 자네는 어찌할 것인가?”

    팽선웅 백작은 마치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애초부터 정천우가 합류하길 원했으면서 지금까지 능청을 떨었다. 수련기사를 내 달라는 요청에 순순히 응한 것도 사실은 정천우를 합류시키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함께 싸울 생각입니다. 설마 절 빼려고 하셨습니까? 문제는 역시…….”

    정천우가 검지와 엄지를 붙이며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하하하! 당연히 챙겨 줄 것일세! 그럼 자네도 합류하는 것으로 하고, 난 그럼 부하들과 대책을 마련해야 하니 이만 자리를 비워야겠어. 아! 그렇지? 잠시만 기다리게.”

    팽선웅 백작은 소파에서 일어나 서류가 잔뜩 쌓인 탁자로 걸어갔다. 종이 한 장을 꺼내고는 아무렇게나 휙휙 갈겨쓴 다음 서류에 인장을 찍었다.

    “이걸 가지고 가서 수련기사를 데려가게. 오늘 고마웠네. 덕분에 소식을 빨리 알게 되었으니, 영지전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 같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하하! 자네가 영지전에 합류한다는 것보다 좋은 소식이 있겠는가? 그래, 이제부터 바빠질 테니 어서 가 보게.”

    “이틀 뒤에 뵙겠습니다.”

    “그래, 또 보세.”

    팽선웅 백작은 정천우가 가는 걸 기다리지도 않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대책 회의를 빨리 진행할 생각이었다.

    “영주님, 재미있어질 겁니다.”

    정천우는 집무실을 지키던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멀어져 가는 팽선웅을 쳐다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

    “증거를 보이라고, 새꺄!”

    “귀찮다고 했죠?”

    정천우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샤칼에게 시달렸다.

    단약을 가지러 가는데 창고까지 쫓아와 쫑알대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자요! 알아서 하세요.”

    “뭘!”

    “거기다 번개를 쏘든 뭘 하든 마음대로 하세요. 그럼 되잖아요.”

    정천우가 짜증을 담아 한마디 쏘아붙였다.

    “새꺄! 지금 장난해? 주인이 들고 있어야 역천검이 반응하지! 들어 봐! 내가 전격 마법 한 방 날려 줄게!”

    “싫거든요?”

    “왜! 이건 중요한 거라니까?”

    샤칼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정천우를 잡아먹을 듯 닦달했다.

    역천검의 진위 여부에 따라 신탁을 이행할 수 있다. 그런데 정천우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간단하게 확인만 하면 될 일을 가지고 왜 이렇게 튕기는지, 속 터져 죽을 것 같았다.

    “그건 샤칼 님 사정이죠. 제가 미쳤어요? 목숨 걸고 그 끔찍한 마법을 맞게. 남는 것도 없는 일에 제가 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건데요?”

    “너 정말 이기적인 새끼구나?”

    샤칼이 눈살을 찌푸리며 톡 쏘았다.

    그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무려 신탁이 걸린 일이다.

    신의 뜻은 곧 정의다. 당연히 누구든 응해야 마땅하다고 믿었다. 그걸 거부하는 건 지독한 이기주의라고 생각하는 샤칼이었다.

    “누가 이기적인지 모르겠네요. 됐어요! 바쁘니까 좀 떨어져 봐요.”

    정천우는 신경질적으로 샤칼을 밀어냈다.

    그러나 샤칼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앞마당에 나올 때까지 두 사람의 실랑이는 계속되었다.

    마당에는 2명의 수련기사가 멀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정천우가 팽선웅 백작의 인장이 찍힌 서류를 들고 오더니 다짜고짜 끌고 왔다. 그래 놓고는 이렇게 어정쩡하게 기다리라고 했다.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와 있어야 하는지 이유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단지 육합권을 조금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끌려왔으니…….

    “기다리셨죠? 자! 이거 한 알씩 드시고 육합권을 수련하면 됩니다. 참 쉽죠?”

    “네? 네…….”

    “정말 그렇게만 하면 끝납니까?”

    2명의 기사는 정천우가 내민 단약을 살펴보며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물론입니다. 소환단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네…….”

    조금 커다란 토끼 똥처럼 생겼다. 먹자니 찜찜하고, 먹지 않으면 성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2명의 기사는 서로 눈을 마주 보고는 큰 결심을 하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독약이라도 먹는 듯한 결연한 얼굴로 두 사람은 단약을 입에 넣고 삼켰다. 그러는 사이 옆에서 샤칼이 계속 칭얼거렸다.

    “한 번만 하자! 응? 응?”

    “……거, 젠장. 꼭 말을 해도 그렇게밖에 못해요? 기사님들이 오해하잖아요!”

    정천우가 질색한 얼굴로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한 번만 하자!’라는 말에 단약을 삼킨 기사들의 얼굴에 경멸의 빛이 드러나 있었으니 정천우가 질색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쉽게 가자고. 나도 이 빌어먹을 신탁을 해결해야 할 것 아냐!”

    “아니, 그렇다고 쓰잘 데 없는 일에 저보고 목숨을 걸라고요? 샤칼 님, 정말 제정신 맞으세요?”

    정천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지만 샤칼은 막무가내였다. 싫다는 그의 손에 기어이 역천검을 쥐어 주었다.

    “싫다고 했잖습니까! 기사님들은 어서 육합권을 시작해 주세요.”

    정천우가 신경질적으로 역천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고는 샤칼에게 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로 기사들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기사들은 육합권의 기수식을 취하면서 투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짜 이럴 거야? 자꾸 이렇게 비협조적…… 응? 이게 무슨 일이야?”

    정천우에게 삿대질까지 해 가며 화를 내던 샤칼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샤칼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육합권을 펼치는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투로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기사들의 몸에서 탁하기 짝이 없는 마나가 빠져나오고 있었다. 기사들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고통과 환희가 한데 뒤섞인 표정이었다.

    약기운과 독성이 함께 퍼지는 가운데, 마나를 수련하면서 쌓인 탁한 기운이 영약의 기운에 밀려 강제로 배출되고 있었다.

    “대체 무슨 현상이지? 천우! 설명해 봐!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제가 왜 설명해야 하는데요?”

    “정말 계속 이럴래?”

    샤칼은 심통 난 얼굴로 쏘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천우는 샤칼을 무시했다. 신탁이 맞는지 확인해 봐야겠다면서 전격 마법을 몸으로 때우라는 어처구니없는 인물이니 무시당해 마땅하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요? 직접 먹어 보면 알잖아요.”

    정천우는 귀찮다는 듯이 단약 한 알을 내밀었다. 단약을 받아 든 샤칼이 날름 입에 집어넣었다.

    “어? 어억! 으으으…….”

    샤칼은 단약을 삼키고는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잘못된 수련으로 몸에 쌓인 나쁜 기운이 천천히 배출되고 있었다.

    단지 그것만이라면 괴로울 리가 없다. 영약이 가진 독성이 퍼지면서 아랫배를 쿡쿡 쑤셨다.

    “이거, 이거 왜 이렇게 아픈…… 큭…… 으윽!”

    “아, 깜빡하고 말씀을 안 드렸네요. 약을 먹고 난 다음에는 육합권을 사용해 몸속에 쌓인 탁한 마나를 배출해야 하는데…… 미안합니다.”

    정천우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용서를 구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나쁜 새끼…… 그, 그걸 이제 말해 주면 어, 어떻…… 크으윽…….”

    샤칼은 아랫배를 쿡쿡 쑤셔 대는 통증에 그만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잠시 버티는가 싶었던 샤칼은 이내 바닥에 널브러져서는 끙끙 앓았다.

    해독초와 감초를 넣었다고는 해도 단약의 독성은 대단했다. 육합권으로 독성과 탁한 마나를 빠르게 배출하지 못하면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야 한다.

    하도 옆에서 쫑알대는 게 귀찮아서 엿 먹어 보라는 심정으로 먹였는데, 효과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육합권을 펼치던 2명의 기사가 길게 숨을 내뿜으며 수련을 마무리했다.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게…… 이게…… 엔서! 어때? 몸이 이상하지 않아?”

    “빌리, 너도? 어떻게 된 일이지?”

    2명의 수련기사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변화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놀라워했다.

    마나가 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몸에서 힘이 넘쳤다.

    겨우 토끼 똥 같은 이상한 약을 먹고 한 시간 가까이 육합권에 매진했을 뿐이다. 지쳐야 하는데 오히려 힘이 넘치고 마나가 충만하다.

    “마음에 드십니까?”

    정천우가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제럴드와 잭슨도 이들처럼 단약을 복용하고 난 뒤에 무척이나 놀랐었다. 별 볼 일 없던 실력이 확 늘어났을 테니 좋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마나가 온몸에 가득한 느낌입니다. 활력이 샘솟고 말입니다.”

    빌리라는 이름의 기사가 자신의 몸을 둘러보며 기쁨에 찬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마나가 늘어난 것은 아닙니다. 몸속에 자리 잡은 탁한 마나를 배출하고, 그 자리에 새로이 순수한 마나가 채워진 겁니다. 마나의 양이 늘지는 않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마나가 늘어난 건 사실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게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엔서와 빌리는 정천우에게 거듭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영주님께서 기사단의 전력이 부족하다고 하셔서 자그마한 도움을 드린 것뿐입니다.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정천우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는 품에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지난번 팽선웅 백작이 그에게 주었던 가죽 주머니였다.

    “이걸 팽우룡 단장님께 전해 주시고, 내일 오후에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건 두 분이 내일 아침에 한 알씩 드십시오. 약을 드신 후엔 육합권을 수련해야 한다는 점,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정천우는 서른 개 정도의 단약이 든 가죽 주머니를 건네고 엔서와 빌리에게 별도로 단약을 하나씩 주었다.

    두 사람의 육체 단련 수준이 높지 않아 두 알이면 한계에 다다를 것으로 보였다.

    “꼭! 전하겠습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시면 두 분 모두 정규기사가 되실 수 있을 겁니다.”

    정천우가 흐뭇한 얼굴로 2명의 수련기사에게 덕담을 해 주었다. 두 사람은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벗어 둔 갑옷과 세이버를 챙겨서 돌아갔다.

    “으으으…… 나, 나 죽어…… 이봐! 나 좀 어떻게…… 어떻게 좀 해 줘.”

    “참으시면 됩니다.”

    “어, 언제까지…… 큭…… 언제까지 고통이 이어지는…… 거지?”

    바닥을 뒹굴 힘조차 사라진 샤칼이 정천우의 바짓단을 겨우 붙들며 말했다.

    “그거야 저도 모르죠.”

    정천우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시끄럽게 앵앵거리는 것보다 차라리 저 상태로 방치하는 편이 백배 낫다.

    “씨바알…… 우욱! 크으으…….”

    절망스러운 소식을 접한 샤칼은 밀려드는 통증을 더 견디지 못하고 욕설을 끝으로 기절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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