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65화 (6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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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17. 평화를 원하거든 칼을 들어라 (5)

    “영주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하하하! 내가 본 사내 중에 자네처럼 듬직(?)한 사람은 없다네.”

    차마 솔직하게 얘기할 수 없었던 팽선웅 백작이 화통하게 웃으며 친근한 척 정천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예…….”

    “하하하!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는가! 그래, 오늘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정천우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팽선웅 백작은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무당파의 기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몬스터 산맥에서 수상하게 돌아다니기에 그것을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무당파의 기사가?”

    팽선웅 백작이 웃음을 지우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바꿨다.

    몬스터의 침공과 데스나이트의 출현. 그 모든 일이 바로 무당파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가뜩이나 뒷수습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데, 무당파의 기사가 몬스터 산맥에 나타났다니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무당파의 기사가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여기 그들이 사용하던 롱소드를 가져왔습니다.”

    정천우는 한쪽 벽에 기대 놓았던 롱소드를 들고 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팽선웅 백작이 롱소드를 검집째 들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롱소드를 뽑았다.

    “으음…… 정말 무당파의 물건이로군. 그것도 정식기사에게 지급되는 롱소드야.”

    롱소드의 가드(Guard, 검날받이)를 살펴보던 팽선웅 백작은 침음을 흘렸다.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을 때 영주가 직접 무당파의 문양이 새겨진 롱소드를 지급한다.

    엄지손톱만 하게 음각된 회오리 문양.

    중원의 태극 문양을 이해하지 못한 동대륙의 사람들은 그것을 회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대륙에 존재하는 무당파의 문양은 회오리가 되었다.

    팽선웅 백작이 롱소드를 다시 검집에 밀어 넣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롱소드를 직접 들고 왔다는 것은 전투가 벌어졌다는 얘기겠지?”

    “원래는 놈들이 무얼 하는지 숨어서 살펴보기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제가 숨은 곳에 쿼렐을 쏘았습니다.”

    정천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자신의 은신은 거의 완벽했다. 호흡까지 죽여 가면서 기척을 숨겼는데 놈들은 너무나 손쉽게 자신이 은신한 곳을 찾았다.

    그들의 실력이 뛰어났다면 억울하지나 않겠는데 직접 싸워 보니 영 아니올시다였다.

    “아마도 마법 물품을 사용했을 거라고 생각하네. 무당파는 예전부터 마법 물품에 상당 부분을 의지하는 놈들이었지. 얘기가 샜군. 그건 나중에 제인 마법사한테 물어보게. 그래서, 무당파의 기사들과 격전을 벌인 것인가?”

    팽선웅 백작이 은근슬쩍 제인의 이름을 꺼내서 만나기를 권했다.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하지만 상황 보고가 더 중요했던 정천우는 대충 흘려들었다.

    “드로잉 나이프로 두 놈을 쓰러뜨리고, 책임자로 보인 기사와 정면 대결을 벌였습니다. 이 롱소드가 바로 그자의 것입니다. 오늘 뵙고자 한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기사가 죽기 직전에 이상한 얘기를 했습니다.”

    “이상한 얘기? 어떤 얘기를 했기에 이상하다는 것인가?”

    “절 비웃으면서 곧 피바람이 불 거라고 했습니다.”

    “피바람? 피바람이라…… 자네 생각은 어떤가?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겠지?”

    팽선웅 백작이 이마에 주름을 만들면서 정천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싸움을 벌이겠다는 의미로 생각합니다. 그것도 대대적인 전투를 준비하고 있을 듯합니다.”

    “그렇겠지? 이거 참…….”

    팽선웅 백작은 힘 빠진다는 듯이 의자의 등받이에 쓰러지듯 몸을 기댔다.

    아직 몬스터 토벌의 후유증도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피바람이라니.

    하북팽가의 피해가 복구되면 무당파를 향해 검을 뽑아 들려고 마음먹고는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힘을 키워야 할 때다.

    몬스터 토벌로 자금에 여유가 생긴 덕분에 많은 것을 준비하는 중이다. 이런 때에 전쟁이 벌어지면 좋지 않다.

    팽선웅 백작은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분명 싸워야 할 테지만 현재 전력으론 무당파와 맞서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민하십니까?”

    “당장은 무당파와 싸우기 곤란하기 때문일세. 나의 기사들은 충직하고 용맹스럽지. 그래서 미치겠다네.”

    “저는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충직하고 용맹하다면 좋은 것 아닙니까?”

    정천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 좋은 일 때문에 미치겠다니?

    하북팽가에 존재하는 기사단은 세 개. 그중에서 전원이 팽씨 성을 사용하는 썬더 기사단원들은 정말 대단하다.

    힘과 지혜를 겸비한 팽우룡과 성질은 더러워도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팽만리, 그들은 팽선웅 백작이 명령을 내리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낼 사람들이었다.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네. 나의 기사들은 너무 충성스러워. 목숨을 버릴지라도 명령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한다네.”

    “영주님께 충성한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우 경을 생각해 보면 알 걸세. 나는 기사들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무모하게 싸우다가 죽는 걸 바라지 않는다네. 두 차례에 걸친 몬스터 침공과 무당파의 난입으로 많은 기사가 죽었지. 지금 하북팽가의 전력은 약해진 상태일세. 무당파가 그걸 알고 날뛰는 거겠지.”

    팽선웅 백작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천우는 그제야 팽선웅 백작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찰 임무에서 팽진우의 과잉 충성 때문에 정규기사를 10명이나 잃었다. 아직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은 기사들까지 생각하면 전력의 30%가 줄어든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무당파의 전력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습니까?”

    “무당파의 전력은 거의 우리와 비등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지……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예전에도 우리보다 기사의 수가 많았다네. 그럼에도 무당파가 우리를 넘보지 않은 것은 병사의 수에서 차이가 났기 때문인데, 이젠 그것마저도 어렵지.”

    팽선웅 백작이 안타까운 현실에 쓰게 입맛을 다셨다.

    몬스터 침공에서 기사 전력만 피해가 생긴 게 아니다. 상당수의 병사가 몬스터 토벌전에서 희생되었다. 이것으로 하북팽가의 전력은 무당파보다 확실하게 약해졌다.

    무당파는 하북팽가가 전력을 회복하기 전에 쳐들어오겠다는 속셈이다.

    “흐음…… 수련기사들을 투입하면 어떻습니까?”

    “그들은 아직 약해. 정규기사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하북팽가를 포기하는 겁니까?”

    팽선웅 백작이 계속 자신감 없는 태도로 말하자 정천우는 직접적으로 말했다.

    이제껏 들은 것만으로 결론을 내리자면 하북팽가는 무당파와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포기? 하하하! 하하하! 포기! 크하하하!”

    팽선웅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배꼽을 잡고 웃어 댔다.

    갑작스럽게 돌변한 그의 태도를 보고 정천우는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한 말이 재미있는 농담이 아니라는 것쯤은 충분히 안다. 그런데 팽선웅 백작이 죽는다고 웃고 있으니 그저 의아할 뿐이었다.

    “하하하…… 재미있는 농담이었네. 우리 하북팽가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뭔지 아는가?”

    “……포기라는 겁니까?”

    “맞아. 하북팽가의 사람들은 포기를 모른다네. 설마 내가 무당파와 싸우는 걸 두려워한다고 생각한 것인가?”

    “기운이 없어 보이셔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정천우는 솔직하게 말했다.

    세상을 다 산 듯한 얼굴로 한숨을 푹푹 쉬던 팽선웅 백작이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그의 행동은 싸움을 포기한 사람 같았다.

    “우리 하북팽가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운다네. 이곳의 영지민들? 한없이 선량해 보이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모두 손에 세이버를 쥐고 나서지. 몬스터 토벌전 때를 떠올려 보게.”

    “으음…….”

    정천우는 몬스터 토벌전이 시작된 날을 떠올리며 낮게 신음을 흘렸다.

    생각해 보니, 불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대형 몬스터를 사냥하는 동안에 영지민들은 고블린과 오크의 서식지에서 부산물을 정리했을 정도다.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 것도 없이 그렇게 움직였다.

    물론 겁이 많은 사람도 상당하겠지만 하다못해 제럴드조차 두려워하긴 했을망정 전투에서 도망치진 않았다. 영지민 자체가 호전적이라는 의미다.

    “무당파 놈들? 올 테면 오라고 해! 우리 하북팽가는 영지민 모두가 다 병사면서 전사라네! 나보다 부하들이 먼저 다 죽을까 봐, 그게 두려울 뿐일세!”

    팽선웅 백작은 이제까지의 모습과 달리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정천우를 쳐다보았다.

    순간, 정천우는 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을 받았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분명히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생김새도 다르다. 그러나 이 순간 정천우는 묘한 동질감 같은 걸 느꼈다.

    ‘내가…… 내가 원래 이랬던가? 내 피가 이렇게 뜨거웠나?’

    정천우는 팽선웅 백작과 함께 싸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자신의 감정을 믿을 수 없었다.

    안전제일.

    이제껏 낭인의 삶을 살면서 부르짖었던 게 바로 그거다. 가늘고 길게 사는 게 짧고 굵게 사는 것보다 낫다고 믿었다.

    결정적으로 ‘공짜는 없다!’라는 게 정천우의 철칙이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오래오래 살겠다고 늘 다짐했었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고 위험한 일은 멀리하는 게 좋다. 순간의 객기로 삶을 포기하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선택이다.

    자신은 언제나 이성적이고(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이득 없는 일에는 나서지 않는 성격이다.

    그랬는데……

    ‘왜 심장이 이렇게 뛰는 거지? 어째서!’

    정천우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자신을 쳐다보는 팽선웅의 모습이 사나이답다고 생각했다.

    중원에서는 만나 보지 못했던 유형의 사람이다. 사람의 심장을 뜨겁게 만드는 재주를 지녔다.

    중원이었다면……

    자신의 능력은 보잘것없는 수준이다. 일류 고수들이 판치는 곳에서 낭인들은 그저 칼받이 신세가 고작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다르다.

    이제 겨우 이류 언저리에 올라설까 말까 한 실력이라도 이곳에선 강자로 인정받는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당당하게 나서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나고 있었다.

    정천우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혼란스러워하거나 말거나, 팽선웅 백작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북팽가는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네. 그러자면 칼을 들어야지. 우리 하북팽가의 신념이 무엇인지 아는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칼을 들어라! 벽력대제께서 동대륙을 통일시키면서 남기신 말씀이지. 전쟁이 벌어지면 내가 가장 먼저 죽을 각오로 싸울 생각이라네.”

    “…….”

    정천우는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말하는 팽선웅 백작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그걸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정천우는 그에게 감동했다.

    이토록 커다란 영지를 다스리는 사람이 몸을 사리지 않는 게 신기했다.

    지난번 무당파의 습격에서도 그는 치열하게 싸웠다. 부하들의 뒤에 숨어서 주둥이로 싸우는 놈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이런 남자라면 한 번쯤 믿어 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에서 이기고 싶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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