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64화 (6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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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17. 평화를 원하거든 칼을 들어라 (4)

    그냥 죽는 게 억울했던지 한껏 비웃음을 날린 휴만은 마지막 말을 내뱉지 못한 채 생기를 모두 잃고 말았다.

    “피바람?”

    정천우는 역천검을 시체에서 뽑아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지 억울해서 지껄이는 말 같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놈들이 왜 여기서 어슬렁거리는 거지? 음모가 실패한 걸 알 텐데…….”

    이상함을 느낀 정천우가 이내 죽은 놈들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비록 자신이 하북팽가의 정식기사는 아닐지라도 현재 빌붙어 살고 있으니 밥값은 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 자신이 이들의 재물을 챙기는 건 당연한 권리라는 생각도 했다.

    시체들이 입고 있던 갑옷과 무기, 그리고 품속까지 꼼꼼하게 뒤졌다. 그것들은 모조리 마법 배낭에 들어갔다.

    “이건…….”

    정천우가 마지막으로 무당파 기사들의 배낭을 챙기다가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마법 배낭이었다.

    그것도 정천우가 들고 다니는 것보다 성능이 훨씬 좋은 물품이었다.

    80%/90%/200kg

    배낭에 적힌 숫자다.

    무게를 80%나 줄여 주고, 부피는 90%나 줄여 준다. 게다가 현재 쓰는 것보다 50kg을 더 담을 수 있다. 하북팽가에선 구할 수 없는 고효율의 마법 배낭인 것이다.

    신이 난 정천우는 무당파 기사에게서 얻은 마법 배낭에 자신의 마법 배낭을 집어넣으려고 했다.

    “어? 이게 왜 안 들어가?”

    정천우가 의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비슷한 종류의 마법이 걸린 물건끼리는 반발한다는 걸 모르는 정천우다. 마법 배낭에 다른 마법 배낭을 집어넣을 순 없다는 걸 모르는 정천우는 한참이나 씨름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부수입을 챙기긴 했는데…… 에이, 모르겠다! 일단 가야지.”

    정천우는 영약을 캐려던 애초의 계획을 접기로 했다.

    노력의 결과물(?)을 네 개의 마법 배낭에 꽉꽉 채워서 짊어졌다. 묵직하긴 했지만 들고 가면 모두 돈이 된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

    “새끼들이, 또 자빠져 놀고 있네?”

    “놀긴 누가 놀아! 에이, 씨!”

    제럴드가 투덜거리면서 짜증을 냈다.

    “어? 너 쌍판이 왜 그러냐? 누구한테 맞았어? 잭슨! 살살 하…… 넌 또 뭐냐?”

    정천우가 고개를 돌렸다가 얼굴이 울긋불긋한 잭슨을 발견하곤 할 말을 잃었다.

    “새끼들이 하라는 수련은 안 하고 쌈질했어? 아주 가지가지 한다.”

    “아니야! 손님 왔어.”

    “손님? 여기는 손님한테 처맞는 게 예의냐?”

    “아냐! 에효…… 말하기도 귀찮다. 네가 직접 들어가 봐라.”

    제럴드는 만사가 다 귀찮은 모양인지 집을 가리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군데 그래?”

    “몰라, 인마! 만나 보면 알아.”

    “잘한다, 기껏 가르쳤더니 얻어터지기나 하고. 이거나 정리해 놔!”

    정천우는 배낭을 내려놓으면서 혀를 끌끌 찼다.

    제럴드 정도의 수준이면 정식기사에게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아무한테나 얻어터질 수준은 아니다.

    잭슨은 말할 것도 없다. 원래부터 정식기사 출신인 데다가 단약의 도움 덕분에 지금은 팽씨 성을 부여받은 기사 수준은 된다.

    그런 두 사람을 저렇게 만들어 놓다니, 의외의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정천우가 현관문을 잡으려 할 때였다.

    “뭐야?”

    집 안쪽에서 들려오는 콧노래와 물소리에 정천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덜컥!

    “여어! 자네 왔나?”

    “오랜만이다.”

    “아하하하…… 샤칼 님과 헤이먼 님이셨군요?”

    정천우가 멋쩍은 얼굴로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은 커다란 나무통에서 목욕 중이었다.

    두 사람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놀랍게도 여자였는데 옷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샤칼의 옆에서 다소곳하게 서 있었다.

    아름다운 여자였는데 흠이라면 중요한 부위에 수북해야 할 무언가(?)가 없다는 정도다.

    “저기…… 이 숙녀분은 누구십니까?”

    “응? 누구? 얘? 얘가 보여?”

    샤칼은 정천우가 누굴 가리키는지 의아해했다. 그러다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체의 여인을 손으로 가리켰다.

    “예. 이거 낯 뜨거워서…… 샤칼 님, 헤이먼 님, 취미가 참…….”

    정천우가 뒷말을 삼켰다.

    홀라당 벗은 당사자 앞에서 차마 말하기가 껄끄러웠다. 그러나 몰래 엄지를 척 세우고 있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뻔했다.

    “얘는 정령이야. 정령 몰라?”

    “정령? 전에 말씀하셨던 정령이 바로 이 아름다운 여자라고요?”

    “못 믿겠으면 만져 봐.”

    샤칼은 목욕통에 느긋하게 누워서 피식 웃었다.

    정천우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체의 여인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이 새끼는 만져도 꼭…….”

    샤칼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안 만져지네요.”

    정천우는 여인의 가슴을 통과하는 자신의 손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정령은 주인만 만질 수 있어. 이렇게…….”

    샤칼은 나체 여인의 손을 잡고는 빙긋 웃었다.

    정천우가 만졌을 때와는 다르게, 나체의 여인은 샤칼이 손을 잡아끌자 몸이 흔들렸다.

    “샤칼 님, 저도 정령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요?”

    “……포기해라. 그렇게 엉큼한 심보로는 정령하고 계약 못한다. 너한테서는 정령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하긴…… 인간은 원래 정령과 친하지 않으니까 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

    “쳇! 아, 맞다! 밖에 있는 애들은 왜 두들겨 팼어요?”

    정령을 얻을 수 없다고 하자 정천우는 순식간에 태도를 바꿨다. 원래 따질 목적으로 들어왔는데 여인의 나체에 정신을 빼앗기는 바람에 이제야 생각났다.

    “그거? 내가 좀 주물러 줬네. 녀석들이 목욕통 좀 가져오라니까 없다고 바락바락 대들잖나? 그래서 살짝 주물러 줬지.”

    “……살짝요?”

    “뭐, 좀 과했나? 지난번에 봤을 때하고는 많이 달라졌길래 조금 더 놀아 줬다네. 왜, 좋아하던가? 내가 애들을 좀 잘 가르치긴 하지. 으하하하!”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도 않는지 헤이먼은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정말로 제럴드가 좋아했을 거라고 믿는 얼굴이었다.

    “그럼 잭슨은 왜 저렇게 망가뜨린 건데요?”

    “잭슨? 아! 같이 있던 어린 친구? 부러워하는 것 같아서 제럴드 그 친구와 놀아 준 김에 같이 가르쳐 봤다네. 그 친구도 제법 하던걸?”

    “……뭐, 그렇다 치고요. 왜 오신 겁니까? 그땐 바쁘다고 하셨잖아요.”

    정천우는 더 말해 봐야 머리만 아플 것 같아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자네, 중원에서 왔다며?”

    “어디서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원에서 온 건 맞습니다.”

    정천우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어서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제럴드가 두들겨 맞다가 얘기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중원 출신이라고 해 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저 귀병신이 찾는 게 바로 자네일세.”

    “네?”

    “뭘 놀라고 그러나? 전에 얘기한 것 같은데? 저 녀석이 꼬라지는 저래도 주제에 하이엘프란 말이지. 신탁을 받았는데…….”

    “반 토막! 됐어. 나머지는 내가 얘기할 거야.”

    “뭐, 그러든지.”

    헤이먼은 차라리 잘 됐다는 표정으로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목욕통에 몸을 뉘였다.

    “우리 엘프들은 신을 섬기지. 엘프들에게 위기가 닥칠 때 자애롭고도 고결하신 엘라피스 님께선 이따금 신탁을 내려서 엘프들이 번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계셔.”

    “그런데요?”

    “보통은 몇백 년에 한 번 정도 신탁이 내려지는데, 이번엔 내가 신탁을 받았지. 그건 전에도 말해 줬잖아? 아무튼 이번 신탁은 역천검의 주인을 찾으라는 거였어. 그러니까 증명해 봐!”

    “뭘요?”

    “네 허리에 찬 그게 진짜 역천검인지 증명해 보라는 거야. 검신에 룬어가 나타나면 네가 신탁의 주인공인 걸 인정해 주겠어.”

    샤칼은 뭘 당연할 걸 묻느냐는 듯 간단하게 말했다.

    그러나 정천우에겐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전격계 마법에 당했을 때 검신에 룬어가 나타났었다.

    잠시 고민하던 정천우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샤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신탁의 주인이 되면 뭐가 좋은데요?”

    “글쎄? 영광이지. 엘프의 신인 엘라피스 님께서 찾으시는 인간이잖아.”

    “근사한 걸 준다거나 하는 건 없고요?”

    “그런 걸 바라나?”

    “책에서 보면 신탁의 주인공은 뭔가 특별한 것들을 주던데요? 신의 무기라든지, 무슨 공주라든지…….”

    정천우는 하북팽가의 서고에서 보았던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나 샤칼은 쓰게 입맛을 다시면서 정천우를 향해 인상을 찡그렸다. 인간이란 종족은 너무나 바라는 게 많다고 속으로 투덜대면서 말이다.

    “그런 건 전부 인간들이 지어낸 얘기다. 신은 지상계에 일절 관여할 수 없어. 관여해서도 안 되고.”

    “그럼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까?”

    “신이 왜 그런 걸 만들겠어? 그분들의 입장에서 우린 아무것도 아니잖아. 신탁이라도 내려 주신 걸 고맙게 생각해야지.”

    “관심 없습니다. 그럼 씻고 가세요. 저는 바빠서 이만 나가 봐야겠어요.”

    정천우는 김빠진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샤칼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등을 돌렸다.

    “어이! 이봐! 증거를 보여 달라니까?”

    “귀찮아요. 그냥 제가 신탁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정천우는 손을 흔들어 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저, 저 새끼가! 너 거기 안 서?”

    샤칼은 자신을 무시하고 나가는 정천우를 향해 한바탕 욕을 하고는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정천우를 잡으러 가기 위해서다.

    덜컥!

    “야! 이 자식 어디 갔어?”

    “저기…….”

    제럴드는 거기(?)를 덜렁거리면서 집 밖에 튀어나온 샤칼을 보고는 손가락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려가는 정천우가 있었다.

    “하…… 하하…… 저게 인간이 뛰어가는 속도라고? 말도 안 돼!”

    샤칼은 정천우가 경공을 발휘해 날아가듯 달리는 뒷모습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

    “영주님을 뵙습니다.”

    “천우 경, 정말 오랜만일세. 그간 잘 지냈는가?”

    팽선웅 백작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정천우를 신뢰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몬스터 토벌에서 그가 보여 준 활약은 대단했다. 영지의 어느 기사보다도 더 많은 역할을 했으며, 몸을 사리지 않고 대형 몬스터와 싸웠다.

    빨리 몬스터들을 몰아내고 영약들을 채집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팽선웅의 눈에는 더없이 모범적인 기사의 표본으로 보였다.

    “영주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자네 같은 사람이 하북팽가에 들어온다면 정말 좋을 텐데 말일세. 아쉽군그래.”

    팽선웅 백작이 흘리듯 말하며 정천우의 표정을 살폈다. 표정의 변화가 없는 정천우의 얼굴을 보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짐작한 그는 미련을 버렸다.

    언젠가는 함께 일하게 될 사람이다. 사촌 여동생이 마음에 품고 있다니 머지않은 미래에 하북팽가에 들어올 거라 확신했다.

    사촌 동생인 제인은 아름답고 똑똑하며 현명한 여인이다. 팽선웅 백작은 그런 아이가 작정하고 덤벼들면 넘어오지 않을 남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제인의 적극적인 대시에도 넘어가지 않는다면 그건……

    ‘제인을 거부할 수 있는 놈은 고자밖에 없겠지! 흐음…… 저 튼실한 걸 가지고 고자일 턱이 없잖아.’

    팽선웅 백작이 정천우의 중요 부위(?)를 슬쩍 쳐다보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넨 역시 사나이 중의 사나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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