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60화 (60/200)
  • # 60

    Chapter 16. 너무해 (4)

    ***

    “으아아아함…….”

    “자식, 입 찢어지겠다.”

    정천우는 크게 하품을 하면서 걸어 나오는 제럴드에게 한마디 툭 던지고는 김을 뿜어내는 솥 밑으로 장작을 넣었다.

    제럴드의 뒤에는 언제나처럼 잭슨이 쫄래쫄래 따라 나왔다.

    “아직도 이러고 있는 거야? 아까 만든 건 어쨌어?”

    “보관하기 좋게 말리는 중이야.”

    성공했다는 기쁨에 정천우의 얼굴에선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성공했냐?”

    “그럭저럭 성공한 것 같다. 하나 먹어 볼래?”

    “또 지난번처럼 설사하는 거 아니야?”

    제럴드는 미심쩍다는 얼굴로 정천우를 아래위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맛이 궁금했다. 자러 가기 직전에 솥 안에서 흘러나오던 향기가 제법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억지로 먹을 거면 그냥 말고.”

    정천우가 장작불이 옮겨 붙은 것을 확인하고서는 쪼그리고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 번째 성공을 발판으로 이번에는 영약을 두 배 넘게 넣었다. 오래도록 푹푹 끓여 낸 뒤에 은근한 불로 달이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럼 전에 말했던 효과가 있는 거냐?”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효과는 있었어. 기다려 봐. 금방 가져올 테니까.”

    “천우 형님, 저도…….”

    약을 가져온다며 정천우가 등을 돌리자 이제껏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잭슨이 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가 말끝을 흐렸다. 자신을 받아 주긴 했지만 정천우가 아직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아 서운한 것도 있고 어색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잭슨을 받아들이자마자 정천우가 몬스터 토벌에 참전했다. 토벌전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약을 만든답시고 저러고 있으니 친해질 새가 없었다.

    지금 정천우의 이름을 부른 것도 잭슨의 입장에서는 많이 노력한 것이다. 굳이 이상한 약을 먹고 싶어서 불렀다기보다는 동질감을 느끼기 위한 성향이 컸다.

    “알았다. 둘 다, 오늘부턴 본격적으로 수련할 생각이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

    “예, 천우 형님.”

    “야, 갑자기 왜! 내가 수련한다고 실력이 늘디?”

    기뻐하는 잭슨과는 반대로 제럴드가 하기 싫다는 표정을 드러내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정천우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창고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엄지손톱만 한 흑갈색 단약을 손에 들고 나왔다.

    “이게 그거냐? 좀 찜찜하게 생겼다?”

    제럴드는 정천우의 손바닥 위에 놓인 단약을 집어 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단약이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라 물컹한 것이, 꼭 짐승의 대변과 같은 느낌이었다. 색상도 그렇고, 둥글게 만드느라 첨가한 약초가 곱게 빻아지지 않아 풀의 줄기가 비죽 튀어나온 느낌까지…….

    “싫으면 먹지 마!”

    “까칠하기는! 누가 안 먹는다고 그랬냐? 모양이 좀 그렇다는 거지.”

    제럴드는 정천우가 손을 뻗어 오자 냉큼 단약을 입에 넣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와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오! 그럭저럭 맛있잖아?”

    제럴드가 단약을 씹어 삼키고는 감탄성을 흘렸다. 처음으로 느껴 보는 오묘한 맛에 반한 것이다. 단것을 싫어하는 그가 단맛에 매력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그의 옆에서 단약을 먹을까 말까 망설이던 잭슨은 그제야 안심하고 입에 넣었다. 그의 표정 역시 제럴드와 다를 바 없었다. 처음으로 느껴 보는 맛에 신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으윽! 괘, 괜찮……을 거라더니…….”

    “크흑…….”

    제럴드와 잭슨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배 속이 짜릿짜릿하게 요동쳤다.

    “자! 육합권 실시!”

    정천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크게 소리쳤다.

    “아, 아파 죽겠는데 육합권은 개뿔…….”

    “으으으…….”

    제럴드와 잭슨이 퍼렇게 질린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정천우는 가차 없었다. 엉거주춤하게 선 채로 배를 움켜잡은 제럴드와 잭슨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찼다.

    “아욱! 제, 젠장! 아프잖아!”

    “우왁!”

    “하라면 하지, 뭔 잡소리가 그렇게 많아! 실시! 또 맞는다!”

    정찬우는 두 사람의 상태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다시 엉덩이를 걷어차려고 했다. 그제야 두 사람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육합권의 기수식을 취하면서 투로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바들바들 떨면서 고통을 참던 두 사람의 얼굴이 의아함에 물들었다.

    주먹을 뻗으면서부터다.

    무언가 몸속에서 쭉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배 속에서 부글거리던 무언가가 전신에 퍼졌다. 점점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다리에 힘이 생겨났다.

    팡! 파방, 팡!

    처음의 흐느적거리던 움직임은 사라지고 두 사람의 뻗어 내는 주먹과 발에서 파공음이 일어났다.

    “와하하하! 힘이 넘쳐!”

    “오오오!”

    제럴드가 방정맞게 웃으며 육합권의 수련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 옆에서 육합권을 펼치는 잭슨 역시 마찬가지였다. 육합권의 투로를 반복할수록 몸속이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몸이 땀에 흠뻑 젖은 뒤에야 움직임을 멈추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헉, 헉…… 신기한데?”

    “후와, 후와…… 몸이 개운해지는…… 헉, 헉…… 개운해지는 느낌입니다.”

    제럴드와 잭슨이 놀라워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처럼 자발적으로 격렬하게 수련해 본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샘솟는 기운에 취해 녹초가 될 때까지 육합권을 수련했다.

    “괜찮았냐?”

    정천우가 빙그레 웃으며 두 사람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긴 했지만 이렇게나 효과가 빠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곳 사람들은 단전이 없기에 기껏해야 육체가 튼튼해지는 정도의 효과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니 굉장히 만족한 듯한 얼굴이었다.

    “최곤데?”

    “음…… 그동안 수련하면서 몸이 답답하다고 느낀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약을 먹고 육합권을 수련해 보니 몸에 새로운 마나를 채운 것처럼 상쾌합니다. 이런 경험은 정말 처음입니다.”

    딱히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던 제럴드와 달리, 잭슨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변화를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했다.

    잭슨은 마나를 유형화해서 마나 쉐도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그런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수련에 들어가는 걸로 하고, 난 좀 자야겠어. 계속 신경 썼더니 머리가 띵하다. 불 좀 잘 보고 있어. 불을 꺼트리지만 않으면 돼. 같이 먹을 거니까 신경 좀 써.”

    정천우는 급작스럽게 밀려드는 피로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막상 단약 개발에 성공하고 나니 긴장이 풀어지면서 잠이 쏟아졌다.

    ***

    “너무해…….”

    제인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정말이지 이렇게나 무심할 줄은 몰랐다. 벌써 3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정찰 임무를 마치고 곧바로 몬스터 토벌에 참가하느라 정천우가 자신을 보러 오지 않은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몬스터 토벌이 끝나고서도 장장 2주 동안 자신을 찾지 않는다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분명히 그에게 얘기했잖아. 그런데 어째서…….”

    제인이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오우거의 끔찍한 습격에서 살아남은 그날, 정천우를 끌어안으며 얼마나 오열했던가!

    그를 위해 몸을 그 무시무시한 오우거를 향해 내던졌다. 자신의 마음을 다 보여 주었다. 그런데도 정작 상대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으니 자존심이 상했다.

    참고 기다리자!

    여자의 자존심이 있지!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서 버텼다. 자신 정도의 미모면 어디 가서도 빠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꿀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버텼지만 이제는 한계다.

    “더 이상은 못 참아! 치잇!”

    제인은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비장한 얼굴로 방문을 열었다.

    마냥 기다렸다가는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았다. 일단 정천우를 찾아가서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는 게 속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혼자 끙끙 앓다가는 화병이 날 것만 같았다.

    씩씩거리면서 밖으로 나간 제인은 곧바로 경비병에게 마차를 부탁했다. 경비병들은 심상치 않은 그녀의 분위기에 꽁지가 빠지게 움직여 마차를 대기시켰다.

    “제인 마법사님, 어디로 모실까요?”

    “천우 경의 집으로 가 주세요.”

    “천우 경이라면…….”

    마부석에 앉은 경비병이 난처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지명을 말하지 않고 사람의 이름을 말하니 그게 누군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았다.

    “지난번에 가 보셨잖아요. 목책 근처의 경비대 마을!”

    “아! 알겠습니다. 금방 모시겠습니다. 이랴아!”

    경비병은 날이 선 제인의 목소리에 어마뜨거라 하는 얼굴로 급하게 말고삐를 휘둘렀다.

    “너무해! 너무하잖아!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그럼 왜 날 지켜 주겠다고 한 거지? 아닐 거야. 그 사람도 날 분명히 좋아할 거야. 분명히 그럴 거야.”

    제인은 정천우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자 억울함과 서운한 마음이 뒤섞여 초조해지고 말았다.

    경비병에게 빨리 가자고 말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마차가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아 심장이 두근거렸다. 막상 그를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가 이런저런 고민에 빠진 사이, 마차가 서서히 느려지더니 이내 완전히 멈췄다. 제인의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콩닥거렸다.

    “제인 마법사님, 도착했습니다.”

    “나, 나가요.”

    제인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참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덜컥!

    “어맛!”

    제인은 하마터면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언제나 경비병이 문을 열어 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의미다.

    “내리십시오.”

    “알겠어요.”

    제인은 경비병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려 그녀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정천우였다.

    ‘칫! 너무해!’

    제인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누구는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건만 정작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을 데리고 검술을 수련하는 모습을 보니 새삼 화가 치밀었다. 왠지 자신만 안달복달한 것 같아 손해 본 느낌이었다.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 제인은 화난 얼굴로 정천우를 향해 걸어갔다.

    ‘내가 온 걸 알면서도 못 본 척해?’

    제인의 눈이 퍼렇게 빛났다.

    이럴 수는 없다.

    정천우가 바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리가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는 전혀 바빠 보이지 않았다.

    제인의 얼굴은 화를 참지 못하고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를 길이 없었다.

    제인이 붉어진 얼굴로 다가오는 모습을 그제야 발견한 정천우가 역천검을 허리춤의 검집에 꽂아 넣었다.

    “제인 마법사님! 오랜만이에요.”

    “흥!”

    반가워하는 정천우의 얼굴이 가식적으로 느껴져서 제인은 콧방귀를 뀌며 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마침내 제인이 그의 앞에 도착한 순간,

    “너무해!”

    뺨을 때릴까 한바탕 욕을 할까 고민하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말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주책맞게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가슴이 울렁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정천우는 왜 그녀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눈만 끔뻑거렸다.

    “나빴어요! 흑…….”

    제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뜬 정천우의 품에 빨려 들어가듯 폭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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