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59화 (59/200)

# 59

Chapter 16. 너무해 (3)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야?”

제럴드가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약을 달인다는 개념이 없는 동대륙이었다. 제럴드가 심상치 않은 향기를 내는 정체불명의 검은 액체에 호기심을 드러낼 만했다.

분명 익숙하지 않긴 해도 묘한 향기였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냄새라 제럴드는 그 맛이 궁금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정천우가 저렇게 심혈을 기울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단것을 싫어하는 그의 호기심을 건드릴 정도로 기분 좋은 향기였다.

“자식이, 자빠져 자라니까 더럽게 끼어드네. 안 졸리냐?”

정천우는 그릇을 들고 스푼으로 걸쭉한 액체를 퍼 담으며 한 소리 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을 남겨 두고 있는데 자꾸 옆에서 말을 시키니 부정 타는 느낌이 들었다.

“스승님, 저도 궁금합니다만…….”

“새끼가! 더럽게 말 안 듣네. 형이라고 부르랬잖아!”

“아, 예! 천우 형님, 지금 만드시는 게 뭡니까?”

잭슨은 급하게 호칭을 바꾸고는 정천우의 곁에 바짝 다가왔다.

궁금하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코가 썩어 들어가는 냄새를 풍기던 솥에서 이처럼 감미로운 향기가 날 줄은 몰랐다. 야간 근무를 나갔다 온 하룻밤 새에 일어난 변화였다.

처음 맡아 보는 향기임에도 입안에 침이 고였다. 밤새 근무를 서고 돌아온 뒤라 졸리기도 하고 출출하기도 하다. 그런 상태였으니 잭슨과 제럴드가 침을 흘리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나하고 네놈들을 강하게 해 줄 약이다. 진득하게 기다려. 아직 완성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까.”

“에이! 말도 안 될 소리를 하고 있어? 약 처먹는다고 강해지면 누가 힘들게 몸을 단련하냐? 주기 싫으니까 딴소리하는 거지?”

제럴드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약을 먹어서 강해진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자신도 진작에 약 사 먹고 강해졌을 것이다. 듣기로는 소환단을 먹으면 강해진다고 하지만 죽어야 강해질 수 있으니 그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믿기 싫으면 관둬! 잼이라는 걸 사 놨으니까 배고프면 빵하고 같이 처먹고 디비 자! 사람 일하는데 방해하지 말고.”

“알았어, 인마! 잭슨, 들어가자!”

“예, 제럴드 형님.”

제럴드가 콧방귀를 뀌며 등을 돌리자 잭슨은 아쉬운 듯 정천우의 등을 바라보았다.

‘후…… 언제 가르쳐 주실지…….’

잭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함께 지내기만 하면 정천우에게서 무술을 배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한 달이 다 돼 가도록 무술을 배우기는커녕 목책에서 아무것도 없는 숲을 지키고 있자니 슬슬 지쳐 가는 기분이었다.

혹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무술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인지 걱정되기도 했다.

‘아니야, 한번 믿었으면 끝까지 믿으라고 하셨어.’

잭슨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버지인 팽진우의 말이 떠올랐다. 한번 결정했으면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끝까지 해야 한다고 배웠다.

사람도 마찬가지.

믿기로 했으면 그 끝에 뭐가 있든 끝까지 믿고 따르라고 팽진우가 입버릇처럼 말했다.

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고 잘 준비를 하는 제럴드를 바라보며 잭슨이 빙그레 웃었다.

‘뭐, 이런 생활도 나쁘진 않잖아?’

잭슨과 제럴드가 잠자리에 든 그 시각,

정천우는 밀가루와 약초 가루를 가져와 진득하게 졸아든 영약 진액 옆에 놓았다.

드디어 영약을 달여 만든 진액과 약초 가루를 섞어 환(丸)으로 만들 차례다.

얼마나 정성 들여 달였는지, 영약의 진액이 잼처럼 진득하다. 정천우는 약초 가루를 그릇에 붓고 스푼으로 정성껏 갰다. 뻑뻑하다 싶을 때까지 약초 가루를 추가한 정천우가 드디어 반죽을 조금 떼어 환으로 빚었다.

“이제 시험해 볼 차롄가?”

112개의 단약을 만들어 낸 정천우가 그중의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가부좌를 틀었다.

건조시키지 않아 아직은 말랑말랑한 상태의 단약이 배 속으로 넘어갔다. 그래서인지 금세 단약이 풀어지면서 영약이 품었던 기운이 솟아나왔다.

정천우는 고통에 대비했다.

인형삼과 음령과는 독성을 품은 영약이다. 먹을 때마다 독성 때문에 단전을 공격해 왔다.

아니, 공격이라기보다는 단전에 안착하려고 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래서 기존에 쌓인 내공과 충돌을 일으켜 고통을 주는 것이다.

진액이 되기 전에 먹어 보았지만 혹시나 모를 일이었기에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다. 진액으로 만들어지면서 여독이 농축되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해독초와 감초를 넣어 독성을 약화시켰다고는 해도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주먹구구식으로 때려 넣은 것이었기에 독성이 제거되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아…….’

정천우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부드럽다!

단약에서 흘러나온 기운에는 독성이 무척이나 완화되었다. 간직하고 있던 양기(陽氣)와 음기(陰氣)를 마구 풀어냈다.

정천우는 전륜공의 흐름에 따라 영약의 기운을 인도해 십이주천을 해냈다. 새로운 기운을 육체와 동기화시키는 작업이다.

“후우…….”

대략 한 시간 정도가 흐르자 정천우가 길게 숨을 내뿜으면서 단약의 여독이 농축돼 생겨난 탁기(濁氣)를 배출했다.

“성공이야!”

정천우는 입이 찢어질 듯 웃으면서 기뻐했다.

이제 남은 단약을 그늘에서 말려 주면 끝이다. 물론 그러는 사이에도 계속 영약을 섭취하겠지만 말려 둬야 오래 보관할 수 있다.

단약에 남은 약간의 독성은 어쩔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이다. 이렇게 미미한 정도의 독성이라면 견딜 만하다.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으니까 말이다.

‘좋아! 이제부턴 혼원벽력신공을 익혀 내공을 더욱 빠르게 쌓아야겠어!’

정천우가 단약을 창고에 가져가면서 다짐했다.

단약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몇 번 더 내공 수련에 힘쓴 정도의 양이다.

그러나 무시할 순 없다.

내공 수련이라는 것이 하루 이틀에 되는 게 아니다. 어차피 매일같이 행하는 수련의 효율을 세 배 이상 높여 준다면 기연이라고 할 만하다. 게다가 그 내공 수련이 혼원벽력신공이라면 내공 증진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 뻔하다.

“한꺼번에 팍팍 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정천우가 창고의 선반 위에 단약을 올려 두고서 입맛을 다셨다.

한꺼번에 왕창 먹고서 단약의 기운을 쪽쪽 빨아 대면 좋겠지만 그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단약 하나가 품은 기운은 고작해야 하루에서 이틀 정도 수련해야 얻을 수 있는 기운이다.

1년의 내공을 얻으려면 300개 이상을 입에 넣어야 하는데, 독성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기에 과하게 복용하면 위험할지도 모른다.

이제야 전륜공의 내공을 혼원벽력신공으로 변환해 가는 중이다. 욕심이 과했다간 몸을 망칠 수 있다. 하루에 한 알에서 두 알 정도로 제한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당분간은 그렇다는 말이다.

창고에서 나온 정천우는 다시 솥을 불 위에 올렸다. 그리고 마법 배낭에서 인형삼과 음령과를 잔뜩 꺼냈다.

만들 수 있을 때 많이 만들어 둘 생각이었다. 겨울이 오면 영약을 구하기가 쉽지 않게 될 테니까 말이다.

“혼원벽력신공 팔성!”

정천우가 솥에 물을 부으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완전하게 단이 형성되고 나서부터 흡입력을 발휘해 내공을 더욱 빠르게 쌓을 수 있는 무공이 바로 혼원벽력신공이다.

단약의 도움을 받아 혼원벽력신공을 수련하면 아무리 늦어도 5년 안에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가 되면…….”

정천우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

정천우가 단약 개발에 성공해 꿈에 부풀어 있을 무렵,

“샤칼! 네 이름으로 서신이 와 있던데?”

“웃기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우리가 여기 온 줄 어떻게 알고?”

샤칼이 혀를 차며 콧방귀를 뀌었다.

신탁을 전하기 위해서 무당파를 지나 이제 막 소림파에 도착했다. 자신을 아는 사람이라면 통신구를 사용해 연락하지, 번거롭게 서신 따위를 보낼 이유가 없다.

“은하상단에서 그렇게 말하는 걸 어쩌라고? 귀찮으면 관둬. 자, 여기 돈 찾아왔다.”

샤칼의 수호기사인 헤이먼이 가죽으로 만들어진 돈주머니를 탁자 위에 절그럭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진짜야?”

“귀병신아! 내가 언제 헛소리하는 거 봤어?”

“미친, 반 토막 자식이 누구더러 병신이래? 그럼 말 나온 김에 받아 왔으면 좋잖아!”

샤칼이 인상을 구기며 투덜거렸다.

자신의 입도 험하지만 수호기사로 배정된 헤이먼의 입도 무지하게 더럽다. 엘프답지 않게 험악한 입버릇을 가진 샤칼이다 보니 누가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 싸우는 줄 알 정도다.

“본인이 직접 와야 한다는데 내가 무슨 수로 서신을 달라고 하냐? 내가 너인 줄 알아? 혹시 네놈 대가리는 장식이냐? 내가 달라고 안 했을 것 같아?”

“에이, 씨! 하여간 주둥이에 걸레를 물었나, 말하는 꼬라지가 진짜 좆같아! 내가 더러워서 갔다 온다, 썅!”

샤칼이 못 들어주겠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게 네놈이 은하상단에 갔으면 좋았잖아!”

“지랄한다! 정당한 내기였거든? 됐어! 몰라, 몰라!”

샤칼은 헤이먼의 욕지거리를 듣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보통 엘프들은 어디서든 무척이나 부지런히 움직이는 성향을 지녔다. 몸을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샤칼이 엘프답지 않은 것이다.

돈 찾으러 은하상단에 가는 것조차 귀찮아서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오면 자신이 가겠다고 내기를 걸었다. 이겼다고 좋아하며 헤이먼을 보냈는데 서신을 찾으려면 본인이 직접 오라고 했다니 짜증스러웠다.

“아, 뭐 해? 안 가?”

샤칼은 여관 겸 음식점을 겸하는 ‘낭만의 쉼터’의 문을 넘어가려다가 말고 헤이먼을 돌아봤다.

“너 혼자 가면 된다고 했잖아!”

“진짜 그냥 나 혼자 가? 후회할 텐데?”

“후회하긴 뭘 해? 야, 야! 너 배낭은 왜 들어?”

헤이먼이 콧방귀를 뀌면서 자리에 앉으려다가 샤칼이 배낭을 짊어지는 모습에 눈을 부라렸다.

굳이 여행용 배낭을 메야 할 이유가 없었다. 겨우 은하상단에 가는 것뿐이었으니까 말이다.

“나 은하상단 들렀다가 그냥 갈 건데?”

“뭐? 저 귀병신 새끼가 또 지랄한다! 당장 배낭 안 내려놔?”

“싫은데? 같이 갈 거야, 말 거야?”

“에라이, 더러운 새꺄! 배 째! 안 가, 인마!”

헤이먼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하는 꼴을 보니 혼자 가긴 심심하다는 의미다.

“저런 새끼가 무슨 하이엘프야? 빌어먹을 새끼, 확 뒈져 버리면 이 개 같은 임무가 끝나고 좋잖아!”

헤이먼은 살벌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절대로 같이 가지 않겠다는 듯이 자리에 앉은 채로 꼼짝하지 않았다.

“염병! 아주 지랄을 하세요. 씨발, 네깟 게 무슨 수호기사야? 임무 끝내겠다고 지금 날 죽이겠다는 거야? 너 돌았어? 확 씨발, 나 대가리 박고 진짜 뒈져 버린다?”

샤칼은 헤이먼의 막말에 화를 내며 담벼락에 머리 박는 시늉을 하고 입술을 실룩였다.

“해 봐! 해 보라고! 죽으면 네놈 손해지, 내 손해냐?”

“……치사한 새끼.”

“귀병신아! 맥주 한 통. 그럼 가 준다.”

“콜!”

“하여간 드럽게 게을러서는…….”

헤이먼이 그제야 못 이긴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가기 심심했던 샤칼의 얼굴이 미소가 피어올랐다.

“징그러워, 귀병신! 처웃지 마!”

헤이먼은 불퉁한 얼굴로 샤칼을 노려보았다.

“자식이, 같이 가고 싶었으면서 튕기기는? 가자, 반 토막!”

“귀병신! 반 토막이라고 부르면 죽인댔지!”

“됐어. 지겹지도 않냐? 그래 봐야 또 반 토막이라고 부를 건데? 자, 자! 가자. 맥주 두 통 사 줄게.”

“……젠장, 약속 지켜!”

“오케이, 따라와!”

샤칼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은하상단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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