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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58화 (58/200)
  • # 58

    Chapter 16. 너무해 (2)

    “여기가 치료소 맞습니까?”

    정천우는 줄의 가장 끝에 서서 자신의 앞에 사람에게 물었다.

    “끄응…… 모르고 줄 섰수? 아프니까 말 시키지 말고 차례나 기다리시오.”

    정천우가 말을 건 사내는 잔뜩 인상을 구기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가 보기에도 상처가 심각해 보였다. 어디에 긁혔는지는 몰라도 팔이 길게 찢어졌는데, 상처에서 고름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래된 상처인지 피가 나오진 않았지만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농(膿, 고름)이 심했다.

    ‘상처가 심한데?’

    정천우는 고름이 심하게 잡힌 사내의 팔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저런 상처는 보통의 치료법으론 어림도 없다. 상처를 보호하고 독기가 침투하는 것을 막아 줘야 한다.

    만약 치료소에서 자신의 앞에 선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면, 그리고 약을 사용한다면……

    ‘단약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천우의 눈이 빛났다.

    해독 효과가 있는 약초만 얻어도 9할(90%)은 성공한 셈이다. 과일잼에서 얻은 깨달음과 해독초만 있으면 단약을 만들기 위한 기본적인 준비는 끝난다.

    그는 기대하는 얼굴로 줄이 짧아지기를 기다렸다.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줄이 짧아졌다. 이제 자신의 앞에 섰던 사람이 치료받을 시간이었다. 정천우의 뒤로는 새로 온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10분이나 흘렀을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팔에 상처를 입어 고름이 맺혔던 사내가 환한 얼굴로 방문을 열고 나왔다. 괴로워하면서 들어갔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정천우는 그의 팔에 감긴 붕대를 유심히 살폈다. 붕대에 진물 같은 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피나 고름은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정천우의 눈이 빛났다.

    피나 고름으로 인한 진물이 아니라면 약을 발랐다는 의미다. 잘하면 중원의 약재와 비슷한 효과가 있는 것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팔을 다친 사내를 내보낸 여인이 사무적인 어조로 정천우를 향해 손짓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말린 약초들이 풍기는 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다. 정천우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생겨났다. 약초에 관련한 실마리나 얻을까 하고 찾아왔는데 이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이쪽에 앉으십시오. 그래, 어디가 아파서 오셨습니까?”

    50대 초반의 나이쯤 되는 중년 남자가 정천우를 의자에 앉으라 손짓하면서 물었다.

    “몸이 불편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궁금한 것을 몇 가지 묻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여기는 치료소지, 궁금한 것을 묻는 곳이 아닙니다만…….”

    중년 사내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환자도 아닌 사람이 찾아오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진료비는 드리겠습니다.”

    정천우가 5골드짜리 동전을 내려놓으며 중년 사내와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중년 사내는 5골드짜리 동전을 품에 챙겼다.

    고리타분하게 환자의 생명이 어쩌고 하는 말을 했다면 피곤했을 텐데 세상의 때가 적당히 묻은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말씀하십시오. 무엇이 궁금합니까?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중년 사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천우는 확실히 돈이 좋긴 좋다고 생각했다. 불필요하게 이런저런 말을 하는 수고로움을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 꺼내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독한 성질의 약초 두 가지를 중화하고 싶은데, 함께 사용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요?”

    “흐음…… 중화시킨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중년 사내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정천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해 보니 이 동대륙은 약초에 관해 초보적인 수준이 분명했다. 지천에 영약이 깔려 있는데 그것을 조합해서 약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뻔하다.

    아마도 신관이나 치료 마법이 있기 때문에 약에 크게 의존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약초에 관한 학문이 발달하지 못한 듯싶었다.

    “아니, 다르게 묻겠습니다. 제 앞의 환자에게 무슨 약을 처방한 것입니까? 먹는 약도 같이 주신 것 같은데요.”

    “조금 전에 나간 환자는 깊은 상처를 입고서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몸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피를 보충하고 상처가 더 곪지 않도록 약을 지어 줬습니다. 다만 피를 보충해 주는 플랜튼(Plantain)만을 사용하면 약초에 약간의 독성이 있어 골든라드(Goldenrod)를 함께 처방해 주었습니다.”

    “골든라드? 그게 뭡니까?”

    정천우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독성을 해독한다고 하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다.

    약초학이 발달하지 않은 이곳 사람과 깊은 대화를 나눈다는 건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정작 무슨 약초냐고 물은 정천우조차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웠으니 전문가 수준의 대화를 나누기엔 애초부터 글렀다.

    “여기에서 사용하는 약초들은 대부분 흔하게 볼 수 있는 풀들을 말린 것입니다. 그중에는 독성이 있는 것들도 많습니다. 그런 약초를 쓸 때 골든라드를 섞어 주면 독성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약을 오래 먹으면 독이 쌓여서 위험해지긴 합니다만 단기간 치료에는 탁월한 효능을 보입니다.”

    “골든라드라는 약초를 볼 수 있습니까?”

    정천우가 기대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대충 얘기를 들어 보니 중원의 감초와 비슷한 효과를 지닌 것 같았다.

    중년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만 가득 달린 서랍장에 손을 뻗어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이것입니다.”

    정천우는 중년 사내가 내민 말린 풀을 받아 냄새를 맡았다.

    “으음…….”

    정천우가 침음을 흘렸다.

    냄새가 역했다. 감초는 독특한 향기가 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중년 사내가 꺼낸 골든라드에선 독한 풀냄새만 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린 이파리 하나를 뜯어 입에 넣었다.

    ‘써!’

    정천우의 인상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혓바닥이 아릿할 정도로 징그럽게 쓰다.

    “제가 찾던 게 아닌 듯합니다. 이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약초가 있을까요?”

    “차라리 약초 상점에 가셔서 해독 효과가 있는 약초를 찾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약초 상점? 그런 곳도 있었습니까?”

    “저희 치료소에서도 약초를 상점에서 사다가 쓰고 있습니다. 오히려 약초에 관해선 그들이 더 전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천우는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오늘 참 여러 가지로 멍청한 짓만 하고 돌아다니는구나.’

    정천우가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는 치료소 밖으로 나갔다.

    치료소에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걸었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약초 상점과 치료소뿐이었다.

    헛웃음을 지은 그는 다른 곳보다 규모가 커 보이는 약초 상점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가게가 크면 그만큼 다양한 종류의 약초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찾으십니까?”

    “해독 효과가 있는 약초를 사러 왔습니다.”

    “해독 효과가 있는 거라면…….”

    종업원은 해독 효과가 있는 약초를 찾는다는 말에 살짝 아쉬워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정천우의 복장이 노련한 용병들이 즐겨 입는 차림새였기에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싸구려 약초인 해독초를 찾자 실망한 것이다.

    말이 좋아 해독초다. 해독초로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쇳독이 올랐다든가 염증에 효과를 보이는 종류, 그것도 환부에 붙이는 종류가 아니라 복용하는 종류를 찾는다면 돈이 더 안 된다.

    “제가 원하는 게 있다면 모조리 사겠습니다.”

    “말씀만 하시지요. 뭐든지 다 있습니다. 어떤 해독초를 원하십니까!”

    종업원은 언제 시들한 표정을 지었느냐는 얼굴로 활기차게 말했다.

    돌변한 종업원의 모습에 정천우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중원이든 여기든 인간은 다 똑같다고 생각했다.

    “해독 효과가 있으면서 먹었을 때 맛이 달짝지근한 종류를 찾습니다.”

    정천우는 감초를 떠올리면서 말했다.

    영약을 달인 물은 지독하게 쓰다. 아무리 내공 증진의 효과가 있다고는 해도 매일 꾸준하게 먹을 것을 생각하면 최소한 고통스러운 맛은 피하는 게 좋다.

    종업원은 정천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요구 사항에 맞는 해독초를 마구 꺼내기 시작했다.

    “손님께서 말씀하신 조건에 맞는 약초는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이것은 리코리스(Licorice)라는 약초의 뿌리입니다.”

    “엇!”

    종업원이 내미는 약재에 정천우가 깜짝 놀랐다.

    적갈색을 띤 나무뿌리를 잘라 놓은 듯한 생김새였는데, 은은하게 풍기는 향이 중원의 감초와 비슷했다.

    정천우가 빼앗듯이 종업원의 손에서 감초를 받아 손으로 부러뜨렸다. 뒤이어 퍼지는 감초의 향기.

    “이거 얼마입니까! 있는 대로 다 주십시오.”

    “나머지 두 개는…….”

    “다 사겠습니다.”

    정천우는 주머니를 열어 종업원이 달라는 대로 돈을 주었다.

    감초를 구하는 게 중요했기에 나머지 두 가지 약초는 덤이었다. 세 가지의 약재를 몽땅 털어 오는 데 대략 13골드를 줬다. 종업원은 신이 나서 정천우에게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다.

    마음이 급해진 정천우는 마법 배낭에 약초를 담기가 무섭게 집으로 달려갔다.

    ***

    보글보글…….

    커다란 솥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뜨거운 김이 새어 나오며 진한 약향을 뿜어냈다.

    “잘 돼야 할 텐데…….”

    정천우는 피곤한 얼굴로 약이 끓는 솥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어제 낮에 돌아와 영약(?)을 넣고, 적당량의 감초와 덤(?)으로 사다시피 한 해독초 두 가지를 넣고 끓였다. 밤 12시쯤에야 모든 약재를 건져 내고 계속 졸이는 중이었다.

    물론 끓이기 전에 내공을 일으켜 한 차례 더 독성을 날려야 했다. 뇌전의 기운을 품은 그의 내공은 독성을 완화시키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나머지 여독(餘毒)은 중화제와 해독초를 대량으로 투입해 해결하는 게 답이다. 내공으로도 해결되지 않으니 다른 약초의 도움을 받는 게 맞다.

    졸이고 졸여서 한 사발 정도의 양이 남을 때까지 불을 피울 생각이었다. 과일잼에서 힌트를 얻었다. 걸쭉해질 때까지 졸인 다음 곡물 가루를 넣고 뒤섞어 환(丸)으로 빚을 생각이었다.

    효과?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독성이 확실하게 제거되었다.

    중화제와 해독초를 넣고 달인 약물을 먹었더니 예전과는 달리 배 속을 휘젓는 듯한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미미하긴 해도 내공이 꿈틀거리는 느낌 역시 받았다.

    이제 조금만 더 졸여서 진액 상태가 되면 끝이다.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여어! 벌써 일어…… 밤새웠냐?”

    잭슨을 데리고 들어오던 제럴드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자신이 보기에는 한심하기만 한 짓이었다.

    독초를 모아다가 끓여 댄 게 벌써 며칠째인지 세는 것조차 지겨울 정도다. 그런데 이번엔 아예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야, 야! 지금 중요한 시기니까 들어가서 자라! 방해하지 말고.”

    정천우는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솥뚜껑을 열었다. 김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달짝지근한 냄새를 풍겼다.

    “어? 뭐야! 왜 이런 냄새가 나지?”

    제럴드는 놀랍다는 듯 코를 킁킁거리며 솥에 다가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솥에서는 독한 냄새만 풍겼다. 그런데 근무를 다녀오고 나니 뭔가 달라져도 한참 달라졌다.

    “저리 비켜!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한 작업이야!”

    정천우가 두 장의 수건으로 솥을 잡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찬물을 받아 놓은 목욕용 통에 살포시 띄웠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일어나면서 달아올랐던 솥이 식어 갔다.

    정천우의 표정이 하도 진지해서 제럴드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을 담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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