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57화 (57/200)
  • # 57

    Chapter 16. 너무해 (1)

    “뭐가 이래…….”

    정천우는 쓰게 입맛을 다시며 스푼을 내려놓았다.

    몬스터 토벌전이 끝난 이후, 정천우는 인형삼과 음령과를 잔뜩 채취했다. 요즘도 쉬지 않고 채취한다.

    주변의 몬스터를 모조리 토벌했기에 정천우가 경공을 발휘하면 영약 서식지까지 네 시간이면 도착한다. 물론 말을 타고 가도 그 정도면 도착할 만한 거리다.

    문제는 단약을 만들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점이다. 중원에서의 기억을 더듬어 의원인 악소추가 해 주었던 얘기를 몇 번이나 곱씹었다.

    하지만 실패다.

    인형삼과 음령과를 달여서 나온 물은 너무 흐리다. 이런 걸 환으로 만들려면 다량의 곡물 가루가 필요하다. 차라리 생으로 먹는 게 훨씬 더 낫다.

    정천우가 영약을 환으로 만들려는 이유는 단순하다. 저장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약을 달인 물이 이렇게나 양이 많으면 곤란하다.

    “마실 엄두가 안 나네…….”

    정천우가 질색한 얼굴로 커다란 솥에 남은 물을 내려다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맛?

    징그럽게 쓰다.

    약효?

    진짜 병아리 눈물만큼의 내공 증진 효과가 있다.

    독성?

    미쳐 버릴 만큼 끔찍하다. 두 가지 영약을 하나로 합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종류의 약을 생으로 먹을 때보다 두 배는 고통스럽다.

    첫날 한번 당하고 난 뒤로는 일단 마시지 않고 계속 실험만 하는 중이다.

    물의 양을 줄이면 약효가 충분히 우러나지 않고, 그렇다고 물을 많이 넣으면 약으로 사용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얻은 성과라면 정천우의 내공으로 치명적인 독성은 상당수 감소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 봐야 안심하고 먹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말이다.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인간이 얘기할 때 좀 열심히 들을 걸 그랬어.”

    정천우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악소추가 말하던 것에 귀를 기울였다면 단약을 제조하는 데 이렇게나 애를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단약을 직접 만드는 날이 올 거라곤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다. 당시에 악소추가 자세히 알려 줬다고 할지라도 건성건성 흘려들었을 게 분명하다.

    “빌어먹을, 그 밉살스러운 인간이 보고 싶어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

    정천우가 혀를 차며 커다란 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악소추를 떠올리자 중원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커지는 느낌이었다. 아울러 자신의 가슴을 뛰게 했던 진미령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선했다.

    “반드시 구하러…… 제길!”

    정천우는 진미령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서대륙에 가려면 강해져야 한다.

    그냥 강해지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강해져서 키아벨리아스라는 드래곤을 만나야 한다. 300년 전 드래곤조차도 몸을 사리게 했다던 벽력대제만큼은 강해져야 희망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강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단약의 제조조차 헤매는 실정이다. 어느 세월에 혼원벽력신공으로 내공을 쌓아 고수가 될 수 있을지 답답하기만 했다.

    덜컹!

    신경질적으로 솥뚜껑을 닫은 정천우는 입맛을 다시며 집을 나섰다. 기분 전환도 할 겸 치료소라는 곳에 들를 생각이었다.

    치료 마법이나 신관의 신성력 말고도 사람을 치료하는 방법이 있는지 제럴드에게 물어보고서 들은 게 바로 치료소라는 곳이다. 치료소에서 일하는 치료사들이 약초를 이용해 환자를 고친다고 했다.

    정천우는 그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약초를 사용한다니, 감초와 비슷한 약초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휘유…… 뭔 일이래?”

    정천우는 외성을 통과하자마자 들려오는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에 약간 놀라고 말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갑작스러운 몬스터 토벌 때문에 근심에 빠졌던 영지민들이었다. 몬스터가 사라지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로 인해 병사들이 죽어 나가면 분위기가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병사들은 누군가의 아버지 혹은 형이나 오빠, 그게 아니라면 동생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몬스터 토벌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영지민의 걱정은 단번에 사라졌다. 몬스터의 사체에서 얻은 부산물이 영지의 분위기를 바꿨다.

    하북팽가의 몬스터 토벌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에 동대륙의 상인들이 발 빠르게 찾아왔다. 몬스터의 부산물을 저렴하게 구입해 다른 곳에 팔기 위해서다.

    “분위기가 좋은 건 다행인데, 이래서야 정신이 하나도 없잖아?”

    여기저기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 때문에 정천우는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사람들의 손을 잡아끄는 영지민들의 얼굴이 무척이나 밝다. 그럴 수밖에 없다. 상인들이 머물면서 돈을 펑펑 써 대고, 신기한 물건들을 잔뜩 내놓았다.

    몬스터의 사체에서 나온 부산물에 대해서 20%의 권리를 인정한 팽선웅 백작 덕분에 병사들의 주머니 사정도 넉넉해졌다. 병사들이 번 돈의 대부분은 그들의 가족들에게 돌아갔다.

    결국은 이번 몬스터 토벌전으로 영지민들이 풍족해진 결과를 낳았다.

    “여길 어떻게 지나가냐…….”

    치료소에 가려고 모퉁이를 돈 순간, 정천우가 곤란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노점들이 거리 양쪽을 가득 채웠다. 넓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물건을 보려는 사람과 지나가려는 사람들이 많아 넓은 길이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외지의 상인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영지민들이 좌판을 열고 음식을 팔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각종 음식 냄새가 정천우의 코를 찔렀다.

    “이 달콤한 향기는 뭐지?”

    정천우는 마구 밀려드는 음식 냄새 중에서 유독 달콤하고도 향긋한 냄새에 코를 벌름거렸다.

    향기에 유혹당한 그는 어디서 이런 향기가 풍기는지 찾기 위해 내공을 사용해 후각을 집중하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 사람을 뚫으며 길을 찾았다.

    “직접 만든 과일잼이 한 병에 단돈 7브론즈! 병을 가져오시면 6브론즈! 두 병을 사시면 1실버에 드립니다. 어떤 빵과도 잘 어울리는 과일잼이 있습니다. 오세요! 어서 오세요!”

    익살스러운 미소를 베어 문 사내가 커다란 솥에 기다란 주걱을 넣고 저으면서 크게 소리쳤다.

    정천우는 달콤한 향기의 근원지가 여기라는 것을 확신했다. 솥 안에서 강렬한 딸기향과 달콤한 냄새가 마구 퍼져 나오고 있었다.

    언뜻 봐서는 물에 딸기를 넣고 끓이는 것 같았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동대륙에 와서야 처음 접한 유리병에는 뭔지 모를 것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게 뭡니까?”

    “이건 딸기잼, 요건 사과잼, 그리고 이것은 포도잼입니다. 뭘로 드릴까요?”

    사내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않으며 유리병에 든 잼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정천우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라 잼이라는 것의 정체였다. 제럴드와 함께 생활한 지도 꽤 오래되었지만 잼이라는 건 처음 보았다. 제럴드가 단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이걸 빵에 발라 먹는다고 하셨죠?”

    “에이…… 장난 그만 치고 한번 드셔 보세요. 다른 곳처럼 뼛국물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내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젤리를 만들 때 사용하는 젤라틴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잼이라는 것을 처음 접하는 정천우에게는 하나 마나 한 얘기였다.

    “드셔 보시라니까요? 하하하! 보기보다 의심이 많은 분이시군요! 자, 여기 있습니다. 텁텁한 맛이 나면 모조리 공짜로 드립니다.”

    사내는 유리병의 마개를 열어 스푼으로 딸기잼을 푹 떠서 정천우에게 내밀었다.

    딸기잼이 담긴 스푼을 받아 쥔 정천우가 그것을 코에 가져갔다. 상큼한 딸기의 향이 느껴지면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정천우가 스푼을 입에 넣었다. 혀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향과 맛에 그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달다!’

    절로 감탄이 나오는 맛에 정천우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런 종류의 간식을 그도 알고 있다. 중원에서도 이와 비슷한 종류의 간식이 있다. 바로 당과(糖瓜)라는 것인데, 꼬치에 꽂은 호박이나 수박을 이용해 만드는 음식이다.

    정천우도 어렸을 적엔 무척 좋아했던 음식이다.

    중원의 당과는 과일에 엿으로 막을 씌우는 것인 데 반해, 이곳의 잼이라는 것은 부드럽고 훨씬 더 달다. 식감은 다르지만 중원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맛이었다.

    “두 병만 주십시오.”

    “담아 가실 통이 없으시면 유리병까지 합쳐서 1실버 2브론즈입니다.”

    “그럽시다.”

    정천우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사내에게 내밀었다.

    돈을 준 정천우는 사내가 주걱으로 휘젓는 솥 안을 들여다보고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솥 안에는 딸기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러나 딸기는 물과 함께 부글부글 끓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사내는 정천우가 솥을 들여다보면서 이상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은 정말 정직하게 잼을 만든다. 다른 사람들은 설탕을 덜 쓰려고 별의별 꼼수를 다 쓰지만 자신은 일절 다른 것을 넣지 않고 설탕으로만 승부한다.

    그런데 정천우가 솥 안을 감시하듯 살피니 기분이 나빠지는 게 당연했다.

    “아니, 문제라기보다는 지금 끓이는 게 잼 맞습니까?”

    “맞습니다만?”

    “딸기를 물에 끓이는데 어떻게 이렇게 끈적하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해서 쳐다봤습니다.”

    “뭐요? 하하하! 물이라니? 이건 설탕입니다. 물을 썼다간 큰일 납니다. 딸기에서 즙이 나오거든요. 설탕과 딸기만 넣고 끓이면 나중에 물기가 다 날아가고 이렇게 잼이 되는 겁니다.”

    “아!”

    정천우의 눈이 커졌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은 정말 바보 같았다.

    잼을 만드는 방법을 보면서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인형삼과 음령과를 달인 물을 은근한 불에 계속 졸여 진액으로 만들면 되는 거였다. 진액에 가루로 만든 약재를 혼합하면 쉽게 단약을 만들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르고 있었다는 게 그저 한심할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천우는 사내를 향해 기쁜 얼굴로 고마움을 나타냈다.

    “아, 예…… 예.”

    사내는 뜬금없는 정천우의 인사에 얼떨떨한 얼굴로 마주 고개를 숙였다.

    ‘좋아! 이제 중화제로 사용할 만한 약재와 해독제만 구하면 된다.’

    정천우는 잼 병을 배낭에 집어넣고 활짝 웃었다.

    고민했던 부분이 해결됐다. 복작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는데도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치료소를 찾아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곳을 통과하고 나자 한가로운 거리가 나타났다. 정천우는 제럴드가 알려 준 대로 길을 찾았다. 몇 번 헤매긴 했지만 치료소들이 모인 곳이라 짐작되는 길목을 기어이 찾을 수 있었다.

    좌판이 즐비하게 자리 잡아 활기에 가득했던 아까의 거리와는 전혀 분위기가 다른 곳이었다. 중원의 약재상에서 풍기는 약향과 비슷한 냄새가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나치는 사람들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다리를 절룩거리는 사람, 연신 기침을 하며 두툼한 봉지를 겨드랑이에 끼고 지나가는 사람.

    아무튼, 정천우의 곁을 지나치는 사람 중에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여기 치료소라는 곳이 있다고 하던데요.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정천우는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말을 걸었다. 그러자 힘겨운 걸음으로 그의 곁을 지나치려던 사내가 손가락을 들었다.

    “저곳입니다. 이 근방에서는 실력이 가장 좋지요.”

    “감사합니다.”

    정천우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사내가 가르쳐 준 곳으로 걸어갔다.

    굳이 건물을 기억할 필요도 없었다. 사람들이 밖에까지 나와 줄을 서고 있었기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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