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55화 (55/200)
  • # 55

    Chapter 15. 하북팽가 영지의 안정화 (2)

    “영주님의 뜻대로…….”

    말뜻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던 팽우룡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정천우를 영입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귀족의 대화법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난 그에게 라이온 기사단을 맡길 셈이라네. 그란드 경과 반씩 맡겨서 그의 능력을 확인할 생각이야.”

    팽선웅이 벌써 생각해 두었다는 듯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라이온 기사단의 총인원은 30명이 조금 넘는다. 그것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원래 기사단장을 맡았던 그란드에게 맡기고 나머지 반은 정천우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

    그의 능력을 확인한 뒤에 뭘 하겠다는 말은 없다. 하지만 기사들은 굳이 따지고 들지 않았다. 나머지는 팽선웅이 알아서 할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란드 경.”

    “네, 영주님. 말씀하십시오.”

    그란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불만스럽겠지만 이번에는 자네가 이해해 주게. 자네의 기사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 되어 미안하게 생각하네.”

    “주군의 명을 받드는 것은 기사의 본분입니다.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부하들에게도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천우 경이라면 믿을 수 있습니다. 부하 녀석들도 그렇게 반발하진 않을 것입니다.”

    그란드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정천우라면 믿고 부하들을 맡길 수 있었다. 몬스터 침공에서 그가 보여 주었던 모습은 기사들의 귀감이 되었다. 게다가 영주성으로 진격해 무당의 기사들을 해치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란드는 그가 약간은 거칠고 예의범절에 어둡기는 했지만 심성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팽선웅 백작의 명령에 그다지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도 이제 일선에서 물러나 쉴 때가 되었나 하고 자괴감을 느끼던 참이었으니까.

    “자네가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군그래. 자네에게는 이번 토벌이 끝나면 멋진 놈으로 말 한 마리를 선물해 주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란드는 감동했다는 듯이 한 번 더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차를 끄는 짐말의 가격도 200골드를 치러야 구할 수 있다. 전투마는 그보다 두 배 이상 비싸다. 그저 그런 전투마라고 할지라도 최하 가격이 600골드를 넘어간다.

    그란드로서는 횡재한 셈이다.

    “하하하! 그란드 경과 같은 사람이 내 곁에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네. 회의가 끝나거든 자네가 천우 경에게 직접 이 소식을 전해 주게.”

    “알겠습니다. 영주님의 뜻을 확실하게 전하겠습니다.”

    그란드는 존경을 담아 말하고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몸이 늙어서 예전처럼 날렵하지도, 억센 힘을 유지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전투마를 하사한다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자신의 곁에서 함께해 달라는 의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물러나야 할 때라고 생각하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영주에 대해 더욱 존경심이 생겨났고,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천우 경, 모두 정리하고 왔습니다.”

    잭슨은 붉어진 얼굴로 마당에 앉아 골몰히 생각에 빠진 정천우의 상념을 깨뜨렸다.

    정천우는 지금 어떻게 하면 독성을 간직한 인형삼과 음령과를 단약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중원에서 친하게 지내던 의원인 악소추의 얘기를 떠올리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극양(極陽)과 극음(極陰)의 기운을 지닌 인형삼과 음령과를 이용해 단약을 만들려면 중화제가 필요하다. 게다가 독성(毒性)을 없애기 위해 해독 작용이 우수한 약재를 섞어야 한다.

    중원이라면 대표적인 약재로 감초를 들 수 있다. ‘약방에 감초’라는 말처럼 감초는 독성을 풀어 주고 약의 효능을 높여 주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동대륙은 중원과 달라 감초라는 게 존재하는지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 인형삼과 음령과조차 못 알아보고 ‘헤따이’라는 독초로만 알려질 만큼 약학(藥學)에 무지했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마법과 신성력 때문에 굳이 약초에 의지할 필요가 없어서였을지도 몰랐다.

    영약을 지천에 깔아 두고도 단약을 만들 방법이 없어 머리가 복잡했다. 가뜩이나 머릿속이 간질거리는 판에 잭슨이 정천우의 상념을 방해했다. 정천우의 기분이 더러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뭘 정리했다는 거지?”

    “짐을 정리해 왔습니다. 집은 건너편 쪽에 구입했습니다. 여기서 2분 정도만 걸어가면 있습니다.”

    잭슨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집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뭐, 그거야 내가 알 바가 아니고……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네? 그게 무슨 말씀…….”

    밝게 웃음을 머금었던 잭슨의 얼굴이 일순간에 굳어졌다. 정천우의 말에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자식이, 사람 말을 못 알아듣네? 이제부터 뭐 할 건지 물어보잖아. 기사 때려치웠다면서? 앞으로 뭘 해서 먹고살 건데?”

    “네? 저는 천우 경을 제 스승으로 모시고…….”

    “잠깐! 스승?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는데? 내가 누굴 가르칠 만한 사람처럼 보여? 이게 은근슬쩍 남의 장사 밑천을 날로 먹으려고 드네?”

    정천우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무공을 가르쳐 준다는 얘기는 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무공 자체만 놓고 보자면 잭슨이 자신보다 낫다.

    오호단문도를 이제 겨우 수련 중인 정천우보다 잭슨의 숙련도가 훨씬 높다.

    기사의 자리에 오르면서 혼원벽력도법까지 배웠고, 정규 훈련에서 혼원벽력도법을 매일같이 수련했다. 정천우가 가르칠 게 없다.

    물론 가르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누군가를 가르쳐 본 기억이 없어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나도 제럴드 놈한테 얹혀살아. 넌 양아치냐? 가뜩이나 먹고살기 힘든 놈한테 빌붙어서 뭘 하겠다고! 그럴 생각이었다면 그냥 가라. 가뜩이나 심란해 죽겠는데 나 괴롭히지 말고.”

    “돈 벌겠습니다. 제 돈은 제가 벌어서 쓰겠습니다. 절 버리지만 말아 주십시오. 네?”

    심드렁한 정천우의 표정에서 잭슨은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비록 아버지라 부를 수는 없었지만 팽진우와 함께 있을 때는 몰랐다.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팽진우가 오우거를 막아섰을 때…… 잭슨은 처음으로 팽진우의 진심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을 아끼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져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가 정천우를 섬기라고 했을 땐 겁에 질린 와중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유일한 혈육이 죽고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늘 아침 그의 승낙이 떨어지고 나서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졌던가!

    이렇게 버려질 순 없다는 생각이 잭슨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잭슨은 무너지듯 주저앉아 무릎을 꿇었다.

    “크흑…… 저와 알고 지내던 동료 기사들이 절 벌레 보듯 합니다. 믿을 사람은 천우 경밖에 없습니다. 제발…….”

    “인마, 그러게 누가 네 입으로 나불거리래? 자식이, 그 얘긴 일부러 숨겨 줬는데 뭐하러 떠들어 대고 염병이야? 멍청한 자식.”

    정천우는 콧방귀를 뀌었다.

    잭슨의 멍청한 짓거리는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었다. 그런 얘길 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뒤늦게 도착한 잭슨이 영주 앞에 엎드려서는 눈물 콧물 다 짜내면서 모조리 까발렸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오늘 아침 잭슨의 입을 통해 나이를 듣고서야 이해가 되었다. 아직 어려서 감정 조절을 못한 것이다.

    좋게 말하면 순진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멍청한 거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멍청한 짓 하지 않겠습니다. 곁에 있게 해 주십시오.”

    “젠장…….”

    정천우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처음 녀석과 마주쳤던 때와 지금을 비교하니 씁쓸하기만 했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모습이었을 때가 차라리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제럴드! 제럴드!”

    정천우가 집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니미! 숨넘어가겠다! 왜 또 불러 대?”

    “경비대에 사람 부족하지?”

    “당연하지. 내가 아주 요즘 뺑이 치고 있잖아. 왜, 이제야 들어올 마음이 생긴 거냐?”

    제럴드가 눈을 빛내며 정천우에게 다가왔다.

    이번 몬스터 침공으로 인해 경비대의 인원이 4명이나 줄어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빡빡한 인원에서 사람이 줄어드는 바람에 추가 근무가 늘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천우가 경비대원으로 들어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목책을 지키는 경비대라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실력이 있어야 한다. 혹시 모를 몬스터의 위협과 다른 영지의 침입을 성에 알려야 할 막중한 임무 때문이다.

    그래서 인원을 보충하는 게 더욱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전투 능력을 반드시 필요로 하면서 야간 임무에 투입될 정도로 성실하고 튼튼해야 하니까 말이다.

    뺀질거리는 영지병을 데리고 야간 근무를 서려면 병사보다 실력이 좋아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정천우는 경비대원으로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실력자다.

    특히나 제럴드는 그가 경비대에 들어오길 바랐다. 그렇게 되면 소개 수당까지 챙길 수 있을 테니까.

    “아니, 이 녀석 경비대에 집어넣으라고.”

    정천우는 고개를 흔들며 손가락으로 잭슨을 가리켰다.

    “에? 잭슨 경을? 말이 돼?”

    “뭐? 아니, 근데 이 자식이? 그럼 내가 들어가는 건 말이 되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잭슨 경은 기사였잖아.”

    제럴드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질을 쳤다.

    말해 놓고 보니 자신이 헛소리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잭슨보다 더 실력 좋은 정천우를 무시한 셈이었으니까.

    “나도 지금은 기사거든? 그리고 이 녀석은 이제 백수야. 먹고살려면 일해야지. 그래서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되지! 잭슨 경이 온다면 샘슨, 그 노친네도 좋아할 거야.”

    “잭슨, 너는 어때? 경비대에 들어갈 거야, 말 거야?”

    “들어가겠습니다. 천우 경이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잭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크게 대답했다.

    버림받지만 않는다면 어떤 일이라도 상관없다. 기사로 생활할 때보다 월급 수준은 형편없겠지만 정천우의 말처럼 직업은 있어야 한다.

    “좋아! 제럴드, 당장 데리고 가서 샘슨 아저씨한테 넘겨.”

    “지금?”

    “지금 당장!”

    정천우는 타협의 여지도 없다는 듯이 짧게 말했다.

    제럴드는 입이 툭 튀어나왔다. 한창 점심을 준비하던 중이다. 식사는 하고서 나가고 싶은데 정천우의 표정을 보니 투덜거렸다가는 더러운 성질머리가 튀어나올 분위기였다.

    “잭슨 경, 갑시다.”

    “좋소!”

    “잠깐!”

    정천우는 몸을 돌려 나가려는 제럴드와 잭슨을 불러 세웠다.

    그의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제럴드와 잭슨은 불안한 마음에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인마, 간다고 했잖아. 가, 갑자기 왜 그래!”

    제럴드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너 이 자식, 똑바로 안 해? 내 친구가 네놈 아래냐? 싸가지 없이 어디서 혓바닥을 반만 놀려? 죽고 싶어? 앞으로 형님이라고 깍듯하게 대접해. 알았어? 그리고 너도 그래, 인마! 이 녀석은 기사 때려치웠다고 했잖아! 그냥 동생이야, 동생!”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럴드 형님.”

    “그, 그래…….”

    잭슨은 정천우의 말에 곧바로 잘못을 빌었다. 제럴드는 자신에게도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잭슨에게 어정쩡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와!”

    정천우가 자신이 할 말은 다했다는 얼굴로 나가 보라고 손짓했다.

    “후우…… 이제야 좀 조용하네.”

    정천우는 한숨을 내쉬며 앞마당에 놓인 의자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단약 제조에 대해서 정리하던 중에 방해를 받는 바람에 생각이 엉클어졌었다. 두 사람을 경비대로 보냈으니 다시 생각을 정리할 차례였다.

    “하하하! 천우 경! 오랜만입니다.”

    “……젠장.”

    정천우가 인상을 구기며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목책 경비의 책임자인 그란드의 방문이었다. 혼자 있고 싶어서 두 골칫덩이를 내보냈더니 더 큰 골칫덩이가 찾아왔다.

    “아이구, 그란드 경. 오랜만입니다. 어쩐 일로 절 다 찾아오셨습니까!”

    그러나 속마음과는 달리 밝은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게 다 생활의 지혜다.

    여기서 생활하는 동안 꾸준한 돈벌이를 제공할 사람들이다. 귀찮기는 하지만 돈 되는 일에 미소를 보이는 건 가장 기본적인 고객 관리다.

    “하하하! 영주님의 명령을 전하러 왔습니다.”

    “좆 까고…….”

    “네?”

    그란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왠지 들어선 안 될 뭔가를 들은 기분이었다. 정천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가 너무 미약해 정확히 알아들 수 없었지만 말이다.

    “아하하하! 오늘 날씨 좋지 않습니까? 영주님께서 절 이토록 신경 써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들어가서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정천우는 재빨리 너스레를 떨며 그란드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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