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54화 (54/200)
  • # 54

    Chapter 15. 하북팽가 영지의 안정화 (1)

    “넌 안 돼. 가라고 했잖아!”

    집 밖에 나와 육합권을 수련하려던 정천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모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천우 경!”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백색의 갑옷을 입은 사내는 바로 잭슨이었다.

    어제 정찰 임무에서 복귀한 뒤부터 정천우가 머무는 제럴드의 집에 찾아와 저렇게 버티고 앉았다. 어제는 정천우가 두들겨 패서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새벽부터 찾아와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웬만하면 받아들여. 기사님이 저러고 우리 집 앞에 앉아 있는 거, 내가 불편하다.”

    정천우의 손에 억지로 끌려 나온 제럴드가 찜찜한 얼굴로 말했다.

    경비대원에 불과한 자신 앞에서 기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무릎 꿇고 비는 모습을 보는 게 즐겁지만은 않았다. 부담스러웠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정천우의 생각은 달랐다.

    잭슨의 멍청한 짓 때문에 10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단순히 실수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너무나 치명적인 실수다.

    이런 놈을 받아들였다가는 재수 없는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원래 멍청한 놈들은 자신이 뭘 잘못하는지도 모르면서 태연히 미친 짓을 하는 법이니까.

    “내가 널 왜 받아 줘야 하는데? 기사는 때려치울 거냐?”

    “어제 영주님께 천우 경을 따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저지른 멍청한 실수로 정찰대가 전멸했습니다. 다른 동료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잭슨은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굳은 신념이 느껴져 엄숙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천우가 얼굴을 일그러졌다.

    “나한테는 면목이 있고? 이거 아주 이기적인 놈이네?”

    “절 받아 주십시오. 기사의 작위를 버리고 종자가 되라면 되겠습니다.”

    “네가 기사를 때려치우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나도 그 진우 경처럼 네놈 때문에 뒈져 달라는 거야, 뭐야?”

    정천우가 짜증을 숨기지 않으면서 바닥에 침을 뱉었다. 잭슨이 자신에게 엉기는 이유가 너무나 빈약하다. 이런 정도의 생각이라면 결국 피곤해지는 건 자신이다.

    “샤벨타이거…… 전설을 부활시킨 천우 경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그건 네놈 사정이고, 난 네가 귀찮아.”

    “모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잭슨은 고개를 조아렸다.

    갈 곳이 없다.

    동료 기사들이 경멸에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동료에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그럼 새꺄, 가서 기사 놀이나 하지, 뭐하러 나한테 와서 지랄염병을 떨어?”

    정천우가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걸어가려는 정천우의 다리를 잭슨이 두 팔로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안 놔? 대체 나한테 왜 들러붙으려고 지랄이야? 나 하나 먹고살기도 바빠, 새꺄!”

    “갈 데가 없습니다.”

    “갈 데가 왜 없어? 기사단에 다시 들어가면 되잖아!”

    “진우 경은 사실…… 사실 제 아버지입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뭐? 잠깐…….”

    정천우가 짜증 내다가 이상한 생각에 몸을 돌렸다.

    진우 경의 나이는 고작해야 3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그런데 아들이란다.

    이건 뭔가 묘하게 말이 안 되다.

    “너 몇 살이냐?”

    “열여섯입니다.”

    “그 얼굴이?”

    정천우는 황당한 대답에 기가 막혔다.

    누가 저 얼굴을 열여섯 살이라고 보겠는가! 노안도 이런 노안이 없었다.

    “제 어머니는…….”

    정천우가 관심을 보이자 잭슨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그의 어머니는 노예였다고 한다. 팽진우의 집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하찮은 노예였는데 어쩌다 보니 팽진우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난산으로 죽었고, 팽진우는 그렇게 태어난 잭슨을 노예가 아닌 일반 평민의 신분으로 바꿔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마 자신의 자식이라고 할 수 없어 이제껏 그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잭슨이 정천우를 올려다보았다.

    덩치가 크고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하는 짓을 보니 어린 게 맞았다.

    “젠장! 여기가 무슨 탁아소냐? 제기랄…….”

    정천우는 혀를 차며 갈등하는 얼굴로 잭슨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으로 넘어오기 직전에 복면인의 손에 죽었던 화의룡을 생각나게 하는 놈이었다. 잭슨과 화의룡의 처지가 비슷했기 때문에 생각났는지도 모른다.

    화의룡의 어머니는 기녀였고 그의 아버지는 제법 이름 있는 무가의 사람이었다. 눈칫밥을 견디다 못해 무작정 집을 뛰쳐나와 낭인촌에 흘러든 놈이었다.

    잭슨의 지금 모습은 화의룡과 낭인촌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빌어먹을…… 기분 꿀꿀하게…….’

    정천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듣지 말았어야만 했다. 아니, 잭슨에게 말을 건넨 것부터가 실수였다. 차라리 무시했으면 좋았을 것을…….

    중원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자 정천우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그리움을 참아 내기가 어려웠다. 죽은 화의룡에 대한 기억과 진미령에 대한 그리움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강해지고자 하는 이유……

    모든 게 중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그래, 떠나기 전까지만이다.’

    정천우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생각에 빠졌다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일어나라.”

    “받아 준다고 하시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알았으니까 일어나, 새꺄! 대신에 모두 정리하고 와라. 이곳에서도 얼빵하게 굴면 뒈질 줄 알아!”

    “저, 정말입니까?”

    완강하게 거절하던 정천우가 승낙하자 잭슨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최소한 일주일 이상은 죽자 사자 달라붙어야 겨우 마음이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로서는 의외였다.

    “싫어?”

    “아, 아닙니다! 빨리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나 돈 없다. 네놈이 살 곳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기사가 되고부터 지금까지 제법 돈을 모았습니다.”

    잭슨은 자신 있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사 생활을 한 시간이라고는 고작 2년 남짓이었다. 하지만 술과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월급을 고스란히 모았다. 목책 마을의 집을 한 채 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잭슨은 무릎을 꿇은 채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다급한 얼굴로 뛰어 나갔다. 정천우의 마음이 바뀔까 두려워 서두르는 것이다.

    뛰어가는 잭슨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강해질 거야! 강해져서 아버지의 자리를 반드시 내가 물려받겠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오로지 그것이었다.

    떳떳하게 팽진우의 아들이라고 밝힐 수 없는 신분이다. 그래서 더욱 애착이 생겼다. 핏줄이라고는 자신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전설을 다시 세상에 내놓은 사람.

    자신을 강하게 키워 줄 사람은 정천우밖에 없다고 굳게 믿는 잭슨이었다.

    ***

    “목책 밖에 서식 중인 대형 몬스터들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팽선웅 백작은 측근들을 모아 놓고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대사건이다.

    영지의 정규기사가 10명이나 죽임을 당했다.

    썬더 기사단을 제외하고 영지의 기사단 인원은 100명이 조금 넘는다. 기사 전력의 10%에 해당하는 인원이 고작 정찰 임무로 사라졌다. 지난번 무당파의 침입에서 발생한 사상자까지 생각하면 뼈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더 골치가 아픈 것은 그렇게 기사단 10명을 잡아먹은 대형 몬스터가 영지 인근에 둥지를 틀었다는 점이다.

    언제 또 영지를 위협할지 모르니 토벌하는 것이 정석이다.

    “영주님, 병력을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의 수비 병력을 놔두고 모든 전력을 투입해야 합니다. 정찰대원이 전멸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팽우룡이었다.

    주화입마에 빠졌다가 회복되고서는 더욱 활기에 넘치는 모습이었다.

    “저도 썬더 기사단장의 말에 동의합니다. 이번 사태를 일으킨 무당파에 대해서도 응징을 가해야겠지만 우선은 영지민의 안전이 가장 중요합니다. 몬스터를 토벌하지 않는다면 진격하는 것조차 만만한 일이 아니게 됩니다.”

    팽만리가 팽우룡의 뜻에 동조하고 나서며 평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조리 있게 의견을 내놓았다.

    그것으로 얘기는 끝났다.

    아니, 애초부터 두 사람의 얘기는 하나 마나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차피 몬스터 토벌을 확정한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영주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수수 경!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내놓도록 하게.”

    팽선웅은 신뢰의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팽수수는 여자의 몸으로 썬더 기사단에 들어간 대단한 기사다.

    어렸을 때부터 병법을 공부해 뛰어난 작전 수행 능력을 자랑한다. 그런 사람이 발언권을 요구하는 데야 팽선웅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면 억지로라도 조언을 구했을 터였다.

    팽수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중앙에 펼쳐진 지도를 손으로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영지 밖 몬스터 서식지는 언덕 위에 자리 잡았습니다. 상대는 대형 몬스터! 영지의 방패병은 있으나 마나 합니다. 방패병대과 검병대는 영지를 지키는 것으로 하고, 궁병대와 창병대만 데리고 가는 편이 좋을 거라고 봅니다.”

    “과연! 수수 경의 말이 맞아. 대형 몬스터를 상대로 방패병은 의미가 없겠지. 그건 수수 경의 말을 따르겠네. 그러면 토벌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을지 알려 주게.”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아무리 흉포한 대형 몬스터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무척이나 멍청합니다. 발 빠른 자들을 골라 그들을 유인하고 언덕 아래까지 쫓아오도록 하는 겁니다. 그리고 언덕 밑에는 창병대를 배치하는 겁니다.”

    “그렇군! 대형 몬스터를 창으로 무력화시키겠다는 의도인 것인가?”

    팽선웅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작전대로라면 영지 전력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몬스터들을 쉽게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언덕 밑으로 발 빠른 병사들이 도망치면 쫓아오는 몬스터가 쉽게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몬스터의 몸에 창을 갖다 대기만 해도 푹푹 꽂힐 게 뻔하다.

    흐뭇한 표정을 짓던 팽선웅 백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몬스터들이 창을 든 대규모 병력을 보고서 도망치지 않을까?”

    “길게 참호를 파고 그 안에 창병들이 몸을 숨기면 됩니다. 몬스터들이 속도를 줄일 수 없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면 그때 공격하는 겁니다. 마법사님들에게 부탁해서 참호를 팔 동안만 몬스터들의 눈을 속일 수 있게 지원해 주시면 됩니다.”

    “과연! 그대의 지혜는 정말 놀랍기 짝이 없군! 이번 토벌 작전은 수수 경에게 일임하도록 하겠네. 모두 그렇게 알고 수수 경의 뜻에 따라 주게.”

    팽선웅 백작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팽수수를 칭찬했다.

    “영주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궁금하오, 우룡 경?”

    “천우 경에 관한 것입니다. 그를 휘하에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기사들의 훈련을 도와준다면 영지의 전력은 엄청나게 증가할 것입니다.”

    팽우룡은 조심스럽지만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병력 증강과 훈련은 그의 임무였지만 정천우를 추천하는 데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로 정천우의 능력은 진짜였으니까 말이다.

    “알고 있다네. 하지만 그는 바람과 같은 사람일세. 바람이라는 건 가두면 사라지기 마련일세.”

    “그 말씀은 천우 경을 이대로 놔두시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인지…….”

    팽우룡은 정천우를 데려오지 않을 것처럼 말하는 팽선웅 백작을 조심스레 살폈다.

    “난 그저 문을 열어 두고 있을 뿐이지. 언제든 바람이 들어올 수 있게 말일세.”

    팽선웅 백작은 팽우룡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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